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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무록.
단지 밀약으로 시작되어 처음부터 끝을 예정하고 있던 사이였다.
헌데 건조하게 마른 눈동자에 자꾸만 담겨오던 그 아이의 미소를 차게 외면하면 할수록, 가슴속에는 따스하고 고운 달빛이 나비쳤다. 그 인연을 아프게 놓쳐버린 후에도…….
이제 다시 만난 너를 어찌 하면 좋을까.

희노.
마지막 남은 꽃잎을 남겨두고 떠나온 것은 가슴속에 원망이란 그림자로도 그가 남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감정이 고스란히 보이는 솔직한 눈동자로 늘 웃고 있던 계집아이 대신 어엿한 무사가 되었으니 더는 그때처럼 마음을 보여 상처를 입는 짓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구슬프게 떨어져 내렸던 인연의 꽃잎에는 마음을 담은 향기가 여직 남아 있을까.
무록과 희노, 두 사람의 그때 그리고 다시 만난 지금에도 달빛은 나비친다.

[본문 중에]

“도련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순간 익숙하지 않은 온기가 하얀 눈밭 위로 날렸다.
손을 뻗어 그대로 이 아이를 품에 안으면 날아가는 온기 한 점까지도 모조리 제 것이 될까. 낯선 충동이 불꽃처럼 일렁였지만, 무록은 끝내 입을 열지 못하고 여전히 곱게 미소 짓고 있는 희노의 손에서 떡이 담긴 바구니를 빼앗듯 받아 들었다.

아픈 줄 몰라서, 힘든 것을 너끈하게 견뎌낼 만큼 무뎌서가 아니었다. 제가 낸 날카롭고 깊은 상처를 끌어안은 채, 다시 곱게 웃으며 다가와 손 내미는 이 아이는…….
“후후, 많이 배우지 못하여 말하는 것이 이렇습니다.”
겸연쩍은 얼굴로 희노가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자그마한 얼굴에 섬세하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가 순간 깨어버리고 말 봄꿈처럼 애틋하게 고왔다.
“……너는.”
시리도록 맑은 겨울하늘이라 그런 것일 테지. 달빛이 눈동자에 차더니 이내 가슴속으로 말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

변함없이 시리도록 맑은 눈동자가 무록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풍부하게 감정을 담아내지 못하는 까만 시선은 이내 딱딱하게 굳어져 짧은 인사만을 남긴 채 거두어져 버렸다.
무록은 어지럽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잠시 몸을 돌려 눈을 감았다.
‘희노.’
2년 만에 마주하는 얼굴이다.
허나 너무도 환하게 웃던, 투명할 만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던 그 아이는 이제, 눈빛마저 새까맣게 얼어 버린 용병이 되어 제 키만큼이나 커다란 칼을 허리에 차고 있는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