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서 기다리시면 곧 찾아뵈올 것입니다.”'진한 황토색의 단정한 무복 차림을 한 사내가 모자라지 않을 만큼 예를 갖추어 길을 터주자 빈틈없이 새까만 차림을 한 장신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 비록 다급하게 구한 것이기는 하나 이곳 토언국 뿐 아니라, 타국에서도 솜씨 하나 만큼은 알아주는 용병들이라 합니다.”'까만 옷처럼 차분하다 못해 시릴 만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를 장군이라 부른 이는 그를 바로 뒤에서 따르던 머리가 곱슬곱슬한 남자였다. 두 사람은 좁지만 깨끗한 방으로 들어서서 방 가운데 놓인 탁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흠.”'“송구하옵니다. 이 지역이 워낙에 산세가 험하고 날이 춥다고 하여 미리미리 무사들 체력을 보충한다는 게 그만.”'딱히 저를 책하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으나 곱슬곱슬한 머리의 남자가 장군, 무록을 향해 그만 얼굴을 붉혔다. 금일 이 자리에 마땅히 함께했어야 할 숙련된 장군의 무사들은 전날 기름진 음식과 술을 먹고 난 후 크게 복통을 일으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몸이 회복되는 것을 기다리기에는 날짜가 촉박했기에 부득불 이 지역의 믿을 만한 연줄을 통해 급히 호위 무사로 쓸 용병들을 고용하기에 이르렀다.'“소신의 어리석음이 장군께 심려를 끼치니…….”'토언국 동쪽 지방의 오랜 명문가인 연씨 집안의 아들로 가히 칼 솜씨가 신기에 가깝다는 칭송을 듣는 무록을 가까이서 모셔온 지 십여 년. 아무리 급작스러운 명이었다고는 하나 무록의 병사들을 관리하는 자신이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은 금번이 처음이었다. 사내의 목소리에는 자책감이 가득했다. 정신력으로 버티고는 있으나 그 역시도 심한 복통에서 벗어나지 못해 얼굴이 여전히 누렇게 뜬 상태였다.'“되었으니 이만 가서 쉬게.”'덩치 큰 사내가 뭐라고 말을 잇기도 전에 무록은 큰 손을 들어 가볍게 저지했다. 비록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들을 고용하는 것이 마음에 꼭 차는 방도는 아니었으나, 급작스럽게 맡게 된 황실 대장군의 명을 따르느라 생긴 일로 누군가를 탓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장군…… 허면 몸이 회복되면 곧 뒤를 따르겠습니다.”'사내는 새까만 어둠 속에 잠긴 무록을 바라보며 할 수 없이 허리를 반쯤 접었다. 길고 새까만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무록의 얼굴은 소름이 끼칠 만큼 아름다웠으나 표면에서 푸른 냉기가 고스란히 퍼져 나오고 있었다.'‘그래도, 그분이 계셨을 때는…… 후우, 아니다. 두 해째 소식이 감감한 분이 아니신가.’'원래도 다른 평범한 이들처럼 감정을 얼굴에 내비치는 분은 아니셨으나, 두 해 전쯤 이유야 어찌 되었던지 곁에 두었던 유일한 여인이 사라진 후로는 미동도 하지 않는 두꺼운 돌덩이처럼 단단히 굳어진 무록의 얼굴이었다. 한 톨의 부드러움도 찾을 수 없는 수려한 얼굴은 오히려 화첩 속의 인물처럼 보여서 고요한 방 안에 자리한 무록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아까부터 부글거리며 끓고 있는 속을 더는 어찌하지 못하고 두꺼운 떡갈나무 문을 닫고 나오며 사내는 들리지 않게 작은 한숨을 더했다.''“귤강차.”'자신이 거느리는 무사들의 우두머리인 사내를 내보내 놓고 무록은 하얀 찻잔에 담긴 말간 차를 바라보았다. 새큼하게 번지는 향이 부드럽게 코끝을 자극했으나 그 귤강차를 조금도 입에 댈 생각은 없는 듯, 무록은 천천히 찻물을 돌려 부드러운 물결을 만들었다.'하얗게 내린 눈에 시끄러운 소음마저 차박차박 쌓이기만 하던 조용한 날이었던가. 아니, 그런 날이 아니더라도 바람 끝이 조금만 매서워져도 무늬 없는 하얀 찻잔에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피워 내는 귤강차를 담아들고 서실 문을 조용히 두드렸었다. 희노…… 그래, 그 아이, 아니 한때는 제 사람으로 살았던 여인이. 무록의 새까맣게 짙은 눈썹 끝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어리석게 이미 놓쳐 버린 인연의 끈에는 미련만이 나풀거렸다. '“……!”'제 생각이 탐탁지 않아 충동적으로 찻잔에 입술을 댄 무록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졌다. 부드럽게 퍼지는 상큼한 향이 꼭 그 아이, 희노가 바로 곁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했던 것이다.'“들어가도 되겠습니까?”'그때, 아까의 진한 황토색 옷을 입은 사내의 목소리가 두꺼운 문을 뚫고 조용히 울려 퍼졌다. 고용할 만한 용병들을 뽑아 데리고 온 모양이다. 언뜻 둥글둥글하게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행동이 꽤나 재빠르고 민첩한 사내였다. '“들어오게.”'무록은 찻잔을 내려놓고 틈 하나 찾아 볼 수 없이 굳어진 얼굴로 천천히 열리는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토색 옷을 입은 용병단의 대장 뒤로 키가 크고 말랐으나 무척이나 날렵해 보이는 사내가 한 명, 그리고…….'“장군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게 될 탄우와 희라고 합니다. 자, 인사들 드리게. 이분은 연무록 장군님이시니라.”'무록의 시선은 황토색 옷의 사내에게도, 탄우에게도 멈추지 않고 곧장 ‘희’라고 소개된 여인, 아니 정확히는 사내 옷을 입고 있는 마지막 인물에게로 향했다.'“탄우라고 합니다.”'눈동자가 무록 못지않게 날카로운 탄우가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였을 때, 어둑해진 밤하늘에서 일시에 노랗게 영근 달빛이 ‘희’라는 인물의 어깨 위로 나비치고 있었다.'“희라고 합니다.”'변함없이 시리도록 맑은 눈동자가 무록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풍부하게 감정을 담아내지 못하는 까만 시선은 이내 딱딱하게 굳어져 짧은 인사만을 남긴 채 거두어져 버렸다.'무록은 어지럽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잠시 몸을 돌려 눈을 감았다.'‘희노.’ '2년 만에 마주하는 얼굴이다. '허나 너무도 환하게 웃던, 투명할 만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던 그 아이는 이제, 눈빛마저 새까맣게 얼어 버린 용병이 되어 제 키만큼이나 커다란 칼을 허리에 차고 있는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