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먹는 것만 밝힐 줄 아는 초 단순먹보 김소요.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늘 밝아 보이기만 한 그녀에게도 사실은 유년시절의 아픈 기억이 있으니 계속되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하루 배 채우기도 어려운 지독한 가난이었다.

그런 역경 속에서도 늘 밝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온 그녀. 그러나 그 밝음 뒤에는 주변과 깊은 관계 갖기를 꺼려하는 자기방어적인 무심함이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그녀를 원하는 한 남자 박주안.

열일곱의 나이에 새로 사귄 친구 소민을 따라 그의 낡고 비위생적으로 보이는 집을 방문했다.

누렇게 변색된 벽지며 집 안 전체에서 풍겨나오는 구린내. 환한 대낮 등을 켜놓아도 어딘지 어둡고 음침해 보이는 허름한 집.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마치 더러운 연못 위에 피어나는 연꽃처럼 그렇게 그에게 불쾌감만을 주던 초라하기 짝이 없는 집 안에 단숨에 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소요가 있었다.



그녀가 그를 보며 환히 미소 짓던 순간 머리 위에서 빛나는 태양보다도 더한 눈부심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날 이후로 주안의 그녀를 원하는 마음은 그의 심장 위에 뿌리를 내려 마치 살아 있는 식물처럼 끊임없이 자라났다. 아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오랜 시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던 시간.

이제 그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더 이상 기다릴 마음의 여유 따윈 없다.

주안은 소요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기 위한 행동을 개시한다.



그래. 김소요. 당신은 육년이라는 시간동안 그저 날 동생의 친구라고만 여기며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을 지도 몰라. 내가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에 날 외면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알아? 당신을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기 위해 그 순간을 침묵하고 있었던 건 아냐. 당신은 나 박주안의 것이야. 이제 침묵하고 있지 않겠어. 당신의 외면을 말없이 견뎌내지만은 않을 거야. 두고 봐. 당신은 이제 날 무시할 수 없을 걸, 결코 외면하지 못할 거야. 내가, 이 박주안이 그렇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주안의 대사 中


-본문 중에서-


“누난 예전부터 심각해질 만한 일들은 의식적으로 외면했지. 그게 편하니까.”
소민이 그녀의 아픈 부분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넌 너무 과민한 거 아니야? 그냥 네 망상일 수도 있잖아?”
소민의 지적에 마음이 불편해진 소요가 반대 의견을 펼쳤다.
“생각해 봐. 그동안 뭐, 이상한 점 느낀 적 없어?”
소요가 투덜대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소민은 그녀를 채근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그동안 주안에 대해 의심스러웠던 부분들이 떠올랐다. 우진과 우영을 폭행해서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놓았던 것이라든지, 갑자기 자신에게 기습 키스를 했던 거라든지, 소민이 말한 대로 어쩌면 모든 것이 박주안의 의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왜? 소민의 말대로 그녀 자신을 원해서였다면 왜 그녀를 원하는 걸까. 사랑하는 걸까? 그녀를? 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요의 얼굴이 급속도로 빨개졌다.
“왜 그래?”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표정을 주시하고 있던 소민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는 그녀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아, 아냐. 아무것도.”
소요는 양 뺨에 손을 얹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래서 생각나는 건 있어?”
소민의 질문에 소요는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
“소민아.”
“왜?”
“혹시 주안이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뭐? 사랑?”
기가 막혀 반문하는 소민을 향해 소요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친 거 아니야? 그래서 방금 전에 그 생각 때문에 얼굴 붉힌 거였어?”
소민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을 못 찾고 고개를 푹 숙였다.
“혹시 박주안 그 새끼 좋아해?”
“응.”
“혹시……. 그 새끼랑 잤어?”
이를 꽉 악물고 하는 소민의 질문에 그녀가 번쩍 고개를 든다.
“아니야! 안 잤어! 그럴 뻔한 적이 몇 번 있긴 했지만…….”
소요는 저도 모르게 대꾸를 하다가 불필요한 말까지 내뱉고 나서야 자신의 입을 황급히 두 손으로 막으며 소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럴 뻔한 적이 몇 번? 하!”
그녀의 대답에 기가 막힌 소민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오늘 하루, 이 몇 시간 동안 몇 번이나 기가 막히는지 이러다 정말 기도가 막혀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고하는데, 박주안 그 자식은 죽어도 안 돼.”
“왜?”
“내가 생각하는 일이 전부 사실이면 어쩔 거야?”
“…….”
“그런 미친놈한테 가고 싶어?”
“네가 생각 일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잖아.”
“왜 사실이 아니라고 당당히 말 못하는데.”
소요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박주안이 누나를 사랑한다는 생각 자체가 망상인 거야. 누가 사랑하는데 그딴 식으로 행동을 해? 그게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냐구? 그 자식이 누나한테 느끼는 감정은 그저 소유욕일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하지 마. 그 자식은 안 돼. 그 자식은 위험해. 위험한 놈이야.”
“…….”
“누나, 심각하고 복잡한 거 싫어하잖아. 그냥 평범한 삶에 안주하고 싶어 하잖아. 그렇게 살아. 박주안 옆에 있으면 분명 틀림없이 누나 인생은 위태롭고 불안해질 거야. 누나 그거 견딜 수 있어?”
소민이 양손으로 소요의 뺨을 감싸고 눈을 맞춰왔다. 소요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있지. 주안이를 생각하는데, 날 사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심장이 두근거렸어.”
“일시적인 거야.”
“주안이와 하는 키스는 항상 너무 짜릿했어. 온몸이 감전된 것 같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
“그런 키스는 몸에 해로워.”
“네가 어떻게 알아? 몸에 해로운지 아닌지.”
“항상 짜릿하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키스만 하면 정말로 언젠가 심장이 멈출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심장이 멈춰도 좋다면, 그래도 안 되는 거야?’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민이 그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 준다.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주안이 저지른 일들이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어쩌면 주안이 한 짓일지도 모른다고 우진의 일을 겪을 때 하던 의심, 우진을 영화관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그 의심이 사실로 드러났을 때, 우영에게도 손을 댔을 거라고 확신을 했던 순간.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잠에만 빠져 있었던 날들, 다시 주안의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일상의 변화가 싫어 애써 모른 척 들추지 않은 진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은 박주안이라는 남자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계속 경고를 하고 있었다.
“정말 가슴이 두근거렸어. 너무 행복했는데.”
소요는 자신을 위로하는 소민의 품에 안겨 크게 소리 내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