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은 뜬금없이 소요를 찾아왔다. '“뭐, 뭐라구?” '소요는 들고 있는 종이를 구긴 채 자신이 방금 전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치켜뜨고 눈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소요의 격렬한 반응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느긋한 태도로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커피를 마실 뿐이다. '“바, 방금 전에 뭐라고 했냐구!” '애가 탄 소요는 남자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설마, 당신. 반복 학습이 필요할 만큼 이해 능력이 떨어지나?” '귀찮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린 남자는 소리가 나도록 찻잔을 내려놓으며 창백한 안색의 소요에게 물었다. '“내가 무슨 바보 삼룡인 줄 알아!” '“그렇다면 왜 되묻는 거지?” '“그야 믿기지 않으니까 그렇지!” '너 같음 믿겠냐? 소요는 계속해서 마주 앉은 상대에게 커피숍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물론 그로 인해 커피숍 안에 있는 모든 이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 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지금 그녀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뭐가? 아아, 당신 아버지가 우리 금융회사에 대출을 받고 이자를 기한 안에 갚지 못해 빚 대신 자신의 딸을 팔아 버린 것?” '“그, 그래!” '지금 눈앞의 남자에게 자신이 아버지의 빚 대신 팔렸다는 기막힌 현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가 물건이야? 무슨 아파트 담보 대출도 아니고 사람을, 나를 담보로 대출을 했다는 아버지도 믿을 수 없지만 너희 금융회사, 아니 조폭 소굴이 무슨 이윤이 남는다고 나를 담보물로 인정해서 계약을 성립시켰다는 거야?” '손에 쥔 계약서를 휴지 구기듯 구긴 소요는 이제 악을 쓰기에 이르렀다. '“왜 어디서 한번쯤 들어 본 적 있을 것 같은데. 대출 받고 이자 못 갚는 인간들이 신체 포기각서 쓰고 몸 어디 한구석이 병신이 되거나 산 채로 장기가 척출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여기저기 팔려 다니기도 한다는 얘기. 뭐, 그것보다 심하면 소리 소문 없이 개죽음을 당하기도 한다는.” '남자는 지극히 일상적인 얘기를 꺼내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편한 자세로 바꾸더니 나른하고 느릿한 몸짓으로 담배를 꺼내 물며 파리한 안색의 소요를 힐끔거렸다. 소요는 뜬금없는 남자의 얘기에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물론 들어는 들어 봤다. 그러나 그건 그녀와 상관없는 세계의 일일뿐이었다.'“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당신의 사정이야 어찌됐든 우리 측에선 받아낼 건 받아내야 하는 입장이거든.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든지. 손해를 보려고 이 바닥 장사를 하는 건 아니니까. 채무자가 상환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채무불이행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으니 그 가족이 대리변제의 의무를 이행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더구나 당신은 이 계약의 담보물이니 어찌 보면 계약의 주체라고 볼 수도 있겠군.” '“그래서 지금 날 갚지 못한 그 빚 대신에 그렇게 하겠다는 거야? 뭐야? 너 지금 나 협박하니?” '그래 분명 자신의 아버지가 눈앞의 남자에게 자신을 팔아넘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상관없다고 여기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남자의 말이 살 떨리도록 무서운 현실감을 갖고 그녀의 심장을 죄어오기 시작하는 건 멀지 않는 미래에 그녀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야, 이 자식아. 그래도 내가 네 친구 누나다. 알긴 아냐?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아. '“글쎄.” '새파랗게 질린 채로 물어오는 소요와는 상대적으로 상당히 여유로워 보이는 남자는 의미 모를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랑은 상관없어!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구!” '“금전 대출 시 보통은 연대 보증인이 있기 마련이지. 보증을 선 셈 치면 되겠네.” '“지금 장난쳐?” '“아니, 난 돈과 관련된 일에서는 한 번도 농담이나 장난을 쳐 본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남자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 아무튼 난 인정할 수 없어!”'남자의 지나치게 진지한 말투에 순간 당황한 소요는 말을 더듬었다. 지금 그녀가 당면하고 상황도 충분히 당황스러움 그 자체였지만.'“나도 모르는, 나를 담보로 한 이 계약은 난 모르는 일이라구! 보증은 얼어 죽을!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어떻게 아무리 아버지라는 사람이 술과 노름에 미쳤다고 해도 그렇지 자신의 딸을 담보로 돈을 빌릴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야!” '아무튼 소요는 간신히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물론 당신 아버지가 술과 노름에만 빠져 있었다면 하나 밖에 없는 딸을 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겠지만 최근 어떤 천박한 길거리 여자의 꼬드김에 넘어가 딸 판 돈을 들고 여자와 함께 날라 버렸지.” '소요의 화를 부추기듯 남자가 친절하게 말을 덧붙였다.'“그래도 아버지니까 어떡하겠어. 이해해야지.”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아버지는 개뿔. 그 인간은 아버지도 아냐. 이건 이미 이해의 수준을 넘었어. 넘었다구.” '소요는 허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가산을 노름으로 탕진하고 술만 먹으면 자신과 남동생을 복날 개 패듯 패곤 했었지만 여자에게 눈이 뒤집혀 끝내 자신의 딸까지 팔아 버리는 아버지라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차라리 어머니가 집을 뛰쳐나갈 때 그녀도 같이 나가야 했을까.'“훗, 언제는 ‘그렇게 패도 아버진데 어떡하겠어.’라더니. 맞는 건 괜찮고 팔리는 건 싫은 가보지? 재미있군.” '넌 재미있냐? 난 지금 죽을 맛인데. 소요는 남자의 말에 얼굴을 찡그렸다. '“일단 시간을 좀 줘.” '“무슨 시간?” '“밀린 이자랑 원금 어떻게든 갚을 테니까 시간을 좀 달란 말이야.” '힘이 빠진 듯 자리에 앉은 소요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꽉 막힌 음성으로 대꾸했다. '“이미 원금 상환 일도 넘겨 버렸고 밀린 이자도 만만치 않거든. 시간 끌면 끌수록 이자만 불어나. 그 눈덩이처럼 불어난 금액을 당장 변통할 곳도 마땅치 않아 보이는데, 피차 괜히 힘 낭비, 시간 낭비하지 말자구.” '“그럼 어쩌라구? 야, 이 자식아! 네가 그러고도 소민이 친구냐! 친구 아버지가 돈 때문에 딸자식을 갖고 지랄하는 것 같으면 말리든가. 아님 나한테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든가. 아버지가 돈 갖고 여자랑 도망갈 때까지 왜 알면서도 입 다물고 있었던 건데? 이 망할 놈아!” '“왜 나에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 당신의 아버지는 나를 친구의 아버지로 찾아온 게 아니었으니까. 난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는 주의거든.” '“어이구, 그래. 너 잘났다!” '“알아.” '소요의 말에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해왔고 소요는 그런 남자를 잠시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응시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말했지, 자꾸 당신 소리 하지 말라구.” '짜증이 치미는지 소요는 버릇처럼 앞머리를 뒤로 쓸어 올리며 불만을 표출했다.'“상황 판단이 안 되는 모양이군. 그런 속 편한 요구나 하다니. 그나마 당신이 소민이 누나이기에 이런 커피숍에라도 데리고 와 모양 나게 대화로 풀고 있는 거지 안 그랬다면 당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진즉에 지저분한 창고에 끌려가 반병신이 되거나 실컷 남자 놈들에게 윤간 당한 뒤 섬이나 사창가에 팔렸을 거라는 걸 모르겠나?” '낮은 음성으로 경고하듯 소요에게 말해오는 남자에게서는 묘한 웃음이 묻어났다. '그래. 이 정도가 그래도 편의를 많이 봐준 얘기란 말이군. 언제 한번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 하고 있을 남동생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하기는 개뿔! 어쨌든 놈이 말한 예시들은 내가 앞으로 겪어야 할 일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소리잖아! '소요의 안색은 이제 파랗다 못해 하얗게 질려 버렸다.'“박주안.”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한쪽 눈썹을 치켜세움으로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 소민이와의 인연을 생각해서 인심 쓰는 김에 좀 더 쓰면 안 되겠니?” '“무슨 말이지?” '“네가 하는 말은 뭐든 할 테니까 제발 나 병신 만들거나 딴 데 팔지만 말아라. 응? 제발 부탁이야!” '소요는 테이블 위에 올려 진 남자의 손을 잡고 사정했다. '“그래? 내가 말하는 건 뭐든지 하겠단 말이지?” '잠시 남자의 눈이 위험스레 빛난다 싶은 순간, 그 빛은 금세 자취를 감췄다. '“그래, 뭐든지!” '“흠, 그럼 대신 이렇게 하지. 원금을 상환할 수 있을 때까지 변제 기안을 무한대로 늘려 주지. 변제 일까지 원금만 상환한다면 이제까지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겠어. 하지만 알아둬. 이자는 현금이 아닌 내가 말하면 뭐든 하겠다고 말한 당신이라는 사실을. 만약 조금이라도 내 신경에 거슬리는 행동을 한다면 이 계약은 자동 파기야.” '“그래그래! 알았어.” '소요는 남자가 내건 조건이 마음에 드는지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해.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은 나 박주안에게 속한 존재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