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세상을 다 가진 남자, 서강재.

고고한 자존심의 소유자, 유은서.

이성적이고 냉철한 그들의 불꽃같은 만남.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승부욕이

사랑을 뒤덮는다.

“……그럼 왜 나랑 자고 싶은지 물었을 때 대답을 피했어요?”

“관심 있는 여자랑 같이 시간 보내고 가까워지면, 당연히 자고 싶은 거 아닌가?”

“…….”

“나는 네 능력이나 미래에는 타당하고 정당한 돈을 지불할 거야.”

“지금 말하는 게…….”

“다시 말하면, 너랑 자게 되도 돈은 안 준다는 거야.”

2. 작가 소개

최수현

필명은 연하늘빛.

다시 생각나고, 또 읽고 싶어지는

그런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 출간작

기다려줄래

그 여름, 나는

당신의 자리

▣ 출간 예정작

기억하나요

취향의 문제

그곳에, 네가

3. 차례

#09

#10

#11

#12

#13

#14

4. 미리 보기

새벽같이 눈이 뜨였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는 한참 여유가 있었지만 그래도 괜히 그가 준 책을 넘겨가며 조급한 마음을 잠재웠다. 조금 후 시간을 확인하고는 머리부터 감으려 화장실로 가려는데 문을 열고 나오던 은우와 떡하니 마주쳤다.

“너 지금 이 시간에 어디 가?”

“……웬 상관이래.”

신발을 신으며 불만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은우를 뒤에서 잡아챘다..

“빨리 말해. 나도 오늘부터 출근해야 하는데 너 잡고 이럴 시간 없으니까.”

“출근? 어디? 서강재 뭐 어쩌고 그 사람 회사 맞지? 아이 씨, 진짜.”

“네가 그 사람 이름을 어떻게 알아?”

“어, 언니가 전화할 때 강재 씨 어쩌고 했잖아. 그거 들었어.”

“……그래서 어디 간다는 거야? 지금 이 시간에?”

“나 재수학원 등록했어. 거기 가는 거야.”

“너 지금 나한테 그 소리를 믿으란 거야?”

너무 어이가 없어 웃던 은서를 은우가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래도 1, 2년 전에는 말하는 대로 꽤나 믿어주던 은서였는데 자신이 어느새 이런 존재가 되어버린 걸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해볼 만한 여유가 없었다.

“나 빨리 나가야 돼.”

“거짓말하지 마. 너 못 나가.”

“진짜야. 전화해보면 되잖아. 나 지금 빨리 가야 돼. 응?”

시곗바늘이 어느새 숫자 6에 다다르자 약속에 늦으면 1분에 10만 원씩 회수하겠다던 강재의 경고가 뻐꾸기 종처럼 울려댔다. 그런데 체격도 작은 은서의 손이 얼마나 야무진지 도무지 놓아줄 것 같지가 않았다. 울컥하는 마음에 이전처럼 소리라도 지르려는데 이번에도 강재의 말이 가벼운 입을 막았다.

「괜히 언니한테 비아냥대거나 열받게 만들어 네 언니가 내 앞에서 힘들어하는 모습도 절대 사양이야.」

“에이, 정말! 에이, 정말! 에이 씨!”

결국 짜증 가득 섞인 손동작으로 재수학원증만 던져두고는 은서가 손을 뺀 사이에 도망치듯 달려 나갔다.

“너 안 들어와?”

“못 들어가는 거야! 안 들어가는 게 아니라!”

◇ ◆ ◇

교수 추천서와 자신의 보고서를 가지고 사무실에 들른 적은 있었지만 정식으로 일을 하러 온 것은 처음이니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빌딩 안에 들어섰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한적한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의 말대로 실수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마추어에게나 해당할 말이었다. 돈 받고 일하는 프로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긴장은 여기까지야, 올라가서는 안 돼.’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서너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종착지를 찾아 눌렀다. 은서 역시 폴라의 사무실이 있는 27층을 누르려는데 문득 28층의 사장실에서 일을 할 강재가 떠올랐다.

‘출근했을까?’

어제 한참이나 떠나지 못하고 자신을 안고 있던 그가 벌써 보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그는 자신보다 까마득한 상사였다. 원할 때 그를 보려면 자신의 실력으로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가장 떳떳한 단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27층 누르실 거예요?”

잠깐 다른 생각에 빠져 있을 때쯤 버튼을 누르려던 그녀의 뒤에서 조심스러운 질문이 흘러나왔다. 긴장하긴 한 모양이구나, 이렇게 멍하니 다 있을 때가 있고. 그녀가 얼른 버튼을 눌러놓고 몸을 돌렸다.

“아, 네.”

벌써 출발해 위로 올라가던 엘리베이터 안에서 같은 층수를 누르려 했던 남자에게 자연히 눈이 갔다. 그 역시 자신을 보고 있었던 건지 시선이 닿자 먼저 웃으며 말을 걸었다.

“27층이면 폴라 투자자문 가시겠네요?”

“네.”

“아, 반갑습니다. 저 오늘 첫 출근이거든요.”

반갑게 말을 걸던 남자가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사실 저도 첫 출근이에요. 아직 인턴이지만.”

“그래요? 역시 젊어 보이신다 했는데. 김서진입니다. 잘 부탁해요.”

“유은서예요. 저도 반가워요.”

27층에 내려서도 서진은 여전히 은서의 옆에서 적극적으로 대했다. 첫 출근 첫 만남에 남녀 간의 호감도 아닐 테고, 입사 동기끼리 반가운 마음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던지라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서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은서는 여자치고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서진은 남자치고 말이 많은 편이라 특별히 어색함으로 쉬어 가는 시간은 없었다.

“저는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교포라서 많이 서투르기도 하고, 그래도 첫 출근에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입사 동기라니 왠지 느낌이 좋아요.”

“아, 그러셨구나.”

백팩을 메고 캐주얼한 정장 차림의 서진은 꽤나 어려 보이는 외모였다. 교포라니 군대를 가지 않은 건지,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건지 조금 의아했지만 첫 대면에 이런저런 사생활을 물을 것은 아닌지라 조용히 웃으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은서 씨는 따로 지망하는 팀 있어요? 저는 처음부터 해외 투자 팀으로 면접 봤었는데.”

“아…… 저는 오늘 결정 난다고 이야기만 들었어요. 주 2회 파트로 시작하는 거라 일단 시키는 일이면 어디든지 해봐야죠.”

“마음가짐이 완전 신입 사원의 표본이네, 저랑 너무 비교되겠어요.”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닌 것 같은데 소리 내어 웃는 그의 목소리가 맑았다. 자신과는 다른 성격이 재미있기도 하고 처음 사회생활을 하는 만큼 저런 서글서글한 태도는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도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리서치 팀에 들어가고 싶어요.”

“애널리스트 지망이에요?”

“증권사는 아니지만 하는 일이 제가 관심 두는 데랑 비슷해서요. 사실 정식 지원했으면 증권사로 먼저 가 RA 쪽 일을 하자고 생각했거든요.”

“아아.”

“그럼 제 경쟁자네요. 저도 리서치 팀 지망인데. 인턴이든 정규든 대기업도 아니니 한 명밖에 안 뽑을 텐데.”

열려 있는 대기실 문 앞에 기대 있었던 건지 은서보다 두어 살 더 많아 보이는 여자가 고개를 까딱이며 몸을 드러냈다.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말하는 걸로 보아선 오늘 입사하는 사람이 여기 둘 말고도 더 있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유은서입니다.”

“김지원이에요.”

맞은편에 앉은 지원이 서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다지 다정하거나 싹싹하게 굴지는 않았지만 호기심은 서진 못지않은지 은서에게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나섰다.

“은서 씨는 리서치 지망이면 따로 자격증 준비했어요? 저는 대학 다닐 때 CFA레벨 1 따고 금융투자분석사도 같이 통과했어요. CPA 합격해서 연진회계법인에 있다가 이번에 이직했거든요.”

“저는 학부 졸업할 때 관심 있어서 CFA레벨 1 따긴 했는데 지원 씨처럼 화려한 자격증은 없어요. 대학원 가면서 다시 원 전공에 파묻혀 있었거든요.”

“전공이 뭔데요?”

“수학이요.”

“아, 하긴 요새 수학과로는 전공 살리기 어렵죠? 하긴 그쪽은 길이 좁으니 여러 군데 찔러보는 게 맞죠.”

못 할 말은 아니겠지만 듣고 있던 은서로서는 마음에 썩 내키는 대화는 아니었다. 이직을 했다면 확실히 자신보다 경험이 많아 그리 얘기하는 건가 싶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이라면 저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을 텐데, 적당히 웃어넘겼다. 아직은 자신을 향한 적의라 할 만큼의 단서는 없었고.

“자, 다 모였죠? 여자 둘에 남자 하나네. 음, 김서진 씨는 해외 투자 팀으로 가기로 얘기 되어 있다던데, 맞나요?”

“네.”

이제 와 면접은 아니겠지만 서너 명의 사람들이 대기실로 들어오자 앉아 있던 은서와 일행들이 모두 일어나 인사를 했다. 당연히 강재는 보이지 않았고 조금은 상기된 자신의 모습에 차라리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전에 사장님이 본인 지원이랑 팀장님들이 맞춰서 한 명씩 데려가라 하셨는데, 운용 2팀이랑 리서치 팀이셨죠? 운용 팀 김 과장님은 아직 안 오셨는데 최 차장님이 먼저 데려가시겠어요?”

서진이 벌써 가방을 챙겨 해외 투자 팀 팀장을 따라 나가며 뒤에 남은 은서에게 파이팅 표시를 크게 해 보였다. 조금 냉담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지원이 먼저 최 차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김지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유은서입니다.”

“사장님이 우먼파워 하시더니 이 말이었구나. 반가워요, 리서치 팀 팀장 최부경 차장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한 명만 데려가면 되는데, 둘 다 여기 지원인가요?”

은서와 지원 모두 고개를 끄덕이다 서로 미묘한 시선을 교환했다. 지원의 경력이 더 화려한 거야 객관적인 사실이니 부정할 바 없겠지만 은서 역시 해보지도 않고 지레 포기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인물인지라 일단 두들겨라도 보고 싶었다.

“서류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경제학과 졸업해 CPA 땄고 다른 필요 자격증도 여러 가지 취득했습니다. 연진회계법인에 있다가…….”

“그렇게 듣다간 끝도 없겠네. 같은 회사 내라도 여기는 경쟁 사회니까, 운용 2팀 김 과장님 오기 전에 나부터 선택권 가지려면 빨리 서둘러야죠.”

알아서 자신의 소개를 읊어내리던 지원을 손동작 하나로 가로막은 최 팀장이 두 사람을 살짝 훑어보다 질문 하나를 던졌다.

“둘 다 머리가 나쁘지 않다면야 나머지는 배워도 늦지 않아요. 나는 뭐…… 간단하게 하나만 물어볼게요. 과수원 A, B가 있어요. A는 재작년 백 개, 작년 2백 개 수확이고 B는 재작년 천 개, 작년 9백 개. B가 A보다 열 배 크고 그만큼 유명하고. 뭘 비교하려는지는 알겠죠? 그럼 올해 하나 투자하려면 어디 하겠어요? 극단적인 수치니까 그러려니 하고 질문은 각자 두 개씩. 입 아프니 안 하면 더 좋구요.”

빠르게 말을 하던 최 팀장이 벌써부터 시계를 두드리며 가만히 두 사람을 넘겨다보았다.

“기후나 토지 조건은요?”

“둘 다 같다고 할게요.”

“일하는 사람은요?”

“뭐, 그것도 열 명씩.”

먼저 두 가지 질문을 마친 지원이 생각에 잠기자 최 팀장이 눈썹을 올리며 은서를 바라보았다. 선수를 빼앗겼는데 과연 무슨 질문을 하려나, 흥미가 넘쳐 보였다.

“……사과 신선도는요? 서울에서 먹으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신선도?”

이거 꽤 재미있네, 턱을 올리는 최 팀장 옆에서 지원이 ‘킥’ 하고 웃음을 참았다.

“뭐 서울서 한 시간 거리? 그 정도로 하죠. 이제 둘 다 빨리 말해요. 역시나 말 안 해도 좋고.”

“아, 저는 과수원 A요. 규모가 같다면 몰라도 B의 10분의 1밖에 안 되지만 급속도로 양이 늘어나고 있고 그만큼 묻혀 있는 가치가 크다고 생각해요. 더 알려지기 전에 투자하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 같아요.”

지원의 대답에는 자신감이 대단했다.

“오케이, 그럼 은서 씨는?”

“저는 B요.”

“이유는?”

“당장에는 떨어지는 추세라도 말씀대로라면 꼭 사과에 투자를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닌 것 같아서요. 서울서 한 시간 거리라면 어쨌거나 경기도 내고 과수원 용지로 본다면 남쪽이나 동쪽으로 갈 가능성이 많겠죠. 그렇게 따지면 동쪽으로는 청평에서 남쪽으로는 천안 전까지 되지 않을까요? 규모가 크니 평야일 가능성이 높고 과수원이니 산은 물론 적당한 수원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조건상 레저나 휴식 용지로 적합할 것 같은데 요새 트렌드에도 맞구요. 규모가 크면 클수록 나누기도 메리트 있고 당장에 사과 수확 개수가 떨어져도 용지 변경해놓으면 세금 문제도 덜 테구요. 또 인지도가 있는 만큼 고정 시세도 있을 테니 가격이 확 떨어지지도 않겠죠. 결정적으로, 땅 개발만 잘되면 그깟 사과 몇 천 몇 만 개는 상대도 안 될 거예요.”

“상당히 그럴듯하네요. 그래도 허점이 너무 많은데?”

“그러니까 팀장님이 앞으로 다른 정보를 더 주셔야죠.”

얌전한 표정 뒤로 거침없는 은서의 대답에 최 팀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나이가 제법 있는 남자가 터덜터덜, 발걸음도 무겁게 대기실로 들어섰다.

“김 과장님, 빨리 좀 다니시라니까. 나 먼저 가요.”

손을 살짝 들어 보인 최 팀장이 시계를 확인하고는 먼저 문으로 걸어갔다.

“유은서 씨, 뭐 해? 가방 들고 빨리 따라와요. 나 바빠.”

뚱한 표정의 김 과장과 인상을 쓰는 지원을 뒤로하고 은서는 조급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