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린 거야? 지난겨울에 그랬던 것처럼?
윤희는 무턱대고 조급해져선 대문 밖으로 종종거리며 뛰어나갔다. 차는 어젯밤에 몰고 온 그대로였다.
그는 뜻밖에도 부엌에 있었다. 도마를 앞에 두고 칼질을 하고 있는 그를 보자 윤희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웃음의 30퍼센트 정도는 물론 안도감이었다. 훌쩍 가버리지 않은 그에 대한. 쪼그리고 앉으며 윤희가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보시다시피.”
웃으며 그가 한 손으로 대파를 들어 올리곤 말했다.
“파를 썰고 있는 중이에요.”
“파는 어따 쓰게요?”
가스레인지 위에 보글거리는 뚝배기를 보고서도 윤희는 짐짓 그렇게 물었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파를 총총총 썰어, 끓고 있는 찌개에다 넣었다.
“맛있겠죠?”
아닌 게 아니라 냄새가 꽤나 구수했다.
“잘 잤어요?”
그의 물음이 너무도 다정해서 윤희는 아늑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걸까. 마법처럼, 시간의 여백들을 모두 뛰어넘어 그가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도 되어버린 것일까.
윤희는 이토록 친밀한 모습으로 눈앞에 존재하는 그를 바라보는 일이 즐거웠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 기분 좋을 정도로만 적당히 윤희에게 간지럼을 태우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연우 씨는요? 잘 잤어요? 잠자리 불편하지 않았어요?”
“드디어!”
환호를 겨우 참는 듯, 그러나 환하게 웃으며 그가 외쳤다. 의아해진 윤희를 똑바로 보며 그가 말했다.
“연우 씨라고 불렀어요, 방금.”
“그게 뭐가,”
“늘 쌀쌀맞게 이연우 씨, 이연우 씨, 그러더니.”
윤희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가 금세 거두어들이곤 대꾸했다.
“잠이 덜 깼나 봐요.”
“핑계는.”
“그런데 아침밥은 언제 먹게 되는 거예요, 이연우 씨?”
혀를 날름 내미는 느낌으로 윤희가 묻자 그가 대답했다.
“들어가 있어요. 먹음직스럽게 한 상 차려서 대령할 테니. 이모님 드릴 죽도 끓여 놨지.”
“예뻐라.”
후후, 이번엔 그가 좀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가, 세수나 좀 하지? 자고 일어나 눈곱도 안 떼고, 머리는 부스스하니. 남자 앞에서 그게 뭐야.”
윤희는 발딱 일어났다. 얄미우면서도 한편 부끄러움이 치밀어 톡 쏘아보다 돌아서는데 그가 나긋나긋 놀리듯 말했다.
“달팽이는 어떻게 세수하나. 토끼는 옹달샘에 가 세수할 텐데, 달팽이는 어디 가 세수하나.”
“그렇게 궁금하면 따라와 직접 보시던지.”
윤희는 툭툭 화난 걸음으로 걸어 나와 마당으로 내려섰다. 볼이 붉어진 듯 손을 대자 따끈했다. 걸어 나오는 뒷모습을 슬슬 미소 짓고 바라보았을 그, 그 표정이 눈에 선했다.
설마 정말 따라 나온 건 아니겠지?
대야에 물을 퍼 담고서 세수를 하려다 말고 윤희는 고개를 돌려 마루를 쳐다보았다. 이런. 그가 있었다. 한 손엔 국자를 든 채 웃음 가득한 얼굴로 지켜보고 선 그가. 화들짝 놀라 외면하는 윤희에게 그가 톤을 좀 높여 말했다.
“머리는 안 감으려고? 세수만 달랑 하려고? 예쁜 달팽이, 내가 머리 감겨줄까?”
윤희는 두 손으로 물을 떠다 그를 향해 힘껏 뿌렸다. 그러나 물은 그에게까지 닿지 못하고 벗어둔 신발 근처에서 젖은 무늬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