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를 사오겠다던 은재는 들어올 때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자꾸만 문 쪽을 건너다보고, 문 앞에 나와 서서 거리 저편을 휘휘 둘러보고, 그러기를 두 시간. 마음을 꽁꽁 묶어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서도 수정은 그만 슬퍼졌다. 서운해졌다.
“가면 누가 겁나나 뭐.”
수정은 씻어 엎어 놓은 커피 잔들을 모조리 끄집어내어 개수대에 담갔다. 물을 틀고, 깨끗해서 더 닦을 것도 없는 잔들을 북북 닦고 또 닦았다.
“그래도 그렇지. 비겁하게 그냥 가버리냐? 치사하다, 이은재. 그럴 거면 뭐 하러 마음 주니? 치사해, 치사해. 비겁해, 비겁해. 맹꽁이, 맹꽁이.”
“거 참, 나 없는 데서 내 욕 하는 거 재미 들였나.”
은재의 음성이었다. 수정은 얼른 돌아서지 못했다. 놀라움과 반가움과 원망이 뒤섞인 채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나 좀 봐요.”
“왜.”
심통을 그대로 내보이며 대꾸하자 은재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나 바빠.”
“바빠도 잠깐만 봐요.”
“뭔데 그래?”
홱 돌아선 수정을 맞이한 건 은재의 환한 미소였다. 은재가 두 손을 들어 수정의 눈 앞에다 활짝 펴 보였다.
“자, 잘 봐요. 두 번 안 보여줘.”
“뭐 하는 건데?”
“마술.”
“마술?”
대답처럼 은재가 싱긋 웃었다. 활짝 폈던 두 손을 하늘하늘 현란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기도하듯 마주 갖다 붙였다.
“이 안에서 뭐가 나올 거 같아요?”
“나오긴 뭐가. 빈 손인데.”
수정은 괜스레 퉁박을 주었다.
“과연 그럴까?”
여유 있게 물으며 은재는 마주 붙였던 두 손을 접어 각각 주먹을 쥐었다. 왼손은 수정에게 가까이 내밀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수정의 머리 위를 휙 스쳤다 내려왔다. 그리고 그 손을 주먹 쥔 왼손 위로 쓰다듬듯 덮어 안았다. 수정의 눈을 들여다보며 은재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어!”
수정의 탄성과 더불어 은재가 손을 들어올릴수록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가느다란 금실. 웬만큼 들어올려졌을 때 은재가 속삭여 말했다.
“내 손, 펴봐요.”
수정은 좀 떨리는 마음으로 은재의 왼손, 손가락들을 하나씩 풀어 폈다.
“어머. 이건…….”
수정은 감동했다. 은재의 손 안에 든 것은 펜던트로, 일 주일 전 은재가 만들어온 라벤더 리스와 똑같았다. 크기만 조그맣게 축소시켰다 뿐, 재료도 색도 모양도 리본의 위치까지도 같았다. 거기다 유리처럼 투명한 플라스틱 외장재로 표면이 감싸이고 금실까지 매달려 목걸이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은재가 수정의 손을 펴 리스 목걸이를 가지런히 얹었다.
“아기 리스네.”
수정이 중얼거리자 은재가 끄덕이며 받았다.
“아기 리스예요.”
“예쁘다.”
“아기들은 원래 다 예쁘잖아요.”
동의하듯 수정은 조용히 웃었다. 지금 마음 속을 물결치는 어떤 것들에 도저히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다. 은은하고 기쁘고 따뜻하고 정겨운 느낌이라는 것 외에는.
“마술사가 선물한 마법의 목걸이네. 우유 사러 간다더니, 이거 가지러 갔던 거였어? 난 그것도 모르고.”
“내 욕만 들입다 하고 있었죠? 어디로 가버린 줄 알고. 두어 시간도 못 견딜 거면서, 일 주일은 어떻게 견뎠담? 맞아, 그러고 보니 일 주일 동안 내 욕 엄청 했겠다. 그렇죠? 어쩐지 일 주일 내내 귀가 간지럽더라니.”
“그럼 좀 와보지 그랬냐? 귀 간지럽다는 사람이 안 오고 버티기는. 너도 은근히 매정한 데가 있어. 그렇지?”
“매정한 사람이 누군데? 전화 한 번 하면 하늘이 무너져, 땅이 솟아나. 기다리는 거 뻔히 알면서.”
“답답한 사람이 오는 거지, 내가 왜 전화를 하는데?”
“하나 안 답답해서 매일 내 욕만 했네?”
“솔직히 매일 욕만 한 건 아니다 뭐.”
“그럼? 나 보고 싶어도 했어요?”
수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더 열면 진심이 튀어나와버릴 것 같아서였다. 투닥투닥 말씨름을 벌여도 따스한 물에 몸을 담그고 앉은 듯한 평온함으로 가득했는데, 그 평온이 깨어질까 두려웠다. 보고 싶었다는 말은 은재에게는 결코 쓰지 못할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