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끔히 치워진 탁자에 후식으로 차와 과일이 나왔다.
두 손으로 따뜻한 찻잔을 감싸고 있으려니, 정효가 배 한 쪽을 포크로 찍어 그린에게 건넸다. 역시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데, 그 어떤 군더더기도 없게 단정한 움직임이다. 숨을 쉬고 말을 하는 것처럼 너무도 당연하고 평온한 동작이, 여자에 대한 매너가 몸에 오래 밴 사람의 그것 같다.
궁금해진다. 이 사람이 살아온 날들에 스쳐갔을 여자들이. 아니, 궁금하지 않다. 그냥 막 싫다. 이 남자와 마주 앉아 눈빛을 나누었을 미지의 여자들이.
“말을 하라니까.”
“무슨 말을요?”
“지금 너, 뿌, 의 단계를 막 넘어서고 있잖아.”
그 말인즉슨, 눈 내리깔고 입 꼭 다물고 있는 것? 그의 말에 내포된 의미를 헤아리며 그린은 후후 웃어버렸다.
“말을 하라고 했지, 웃으랬어?”
조금 전 마음의 물가에 내린 감정들을 그에게 어떻게 말로 전할 수 있을까. 알고 싶은 마음도 무작정 싫은 마음도 말로 꺼내 놓으면 그에게는 헛소리로 여겨질지 모르는데. 나조차도 그런 내 마음들이 어이없고 이상스러운데.
“전화 받을 때요. 누구인지 확인도 안 하고 그냥 받나 봐요. 아까도 그랬고, 또…….”
“또.”
“내 전화 받을 때도 그랬던 것 같아서요. 사람들 전화번호랑 이름이랑 이런 거, 저장도 안 해놔요?”
“그런 거 원래 안 해.”
“왜요?”
“귀찮아서.”
이유 한 번 심플해주신다.
“누가 별종 아니랄까 봐.”
“그게 불만이야? 그래서 그렇게 입 꼭 다물고 분위기 잡고 있었어?”
“아니, 불만이라기보다…….”
어쩐지 서운하고 어쩐지 허전하고 그렇죠. 귀찮아서 저장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점이.
“그리고 뭐, 내가 무슨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고 그래요?”
“너는?”
“나요? 나 뭐요?”
“당연히, 사부님 나의 사부님이라고 해두었겠지?”
뜨끔해진 그린은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효가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대답하듯 곧바로 그린의 핸드폰이 울었다. 화면을 들여다보려는 찰나, 그가 순식간에 핸드폰을 빼앗아 가버렸다.
“피라밍크스?”
보자마자 인상을 팍 쓰며 다그친다.
“사람도 아니다 이거지?”
정곡을 콕 찌르기까지. 예술가의 직관 운운하더니만 진짜 예리하다. 살랑살랑 고운 웃음으로 때워야 할지, 너그러이 봐달라고 예쁘게 울상을 그려 보여야 할지. 난처한 맘에 생각만 곰곰, 하고 있는데 그가 물었다.
“왜 피라밍크스야? 더 난해한 메가밍크스도 있는데.”
진짜로 궁금해서 묻는 건지 시빗거리 하나 보태려고 그러는 건지, 표정이나 어조만으론 잘 모르겠다.
“그런 걸 다 알고 있고. 큐브 홀릭인가 봐요?”
“대답이나 하시지?”
“메가밍크스는 정십이면체라서 생김새가 비교적 둥글둥글하잖아요. 피라밍크스는 피라미드처럼 꼭짓점들이 뾰족뾰족.”
“그러니까 내가, 샤프하게 생겼다?”
“그러니까 그게요. 외모가 아니라 성격이……”
그의 눈썹이 보란 듯이 날카로워졌다. 그린은 얼른 항복했다.
“당장 바꿀게요. 사부님, 나의 사부님으로요.”
“검사한다.”
엄포와 함께 핸드폰을 돌려주는 그에게 그린은 슬금슬금 반격을 해보았다.
“그래도 난 딱 보면 누군지 알 수 있게 저장이나 해놨지. 사부님 나의 사부님은 아예 아무 것도 없잖아요, 뭐.”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내 폰에다 너를 저장해 달라 이거야?”
“원하면 들어줄 거예요?”
“생각 좀 해보고.”
“치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풀죽은 시늉을 하자, 정효가 그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린은 두 손으로 턱을 괴고서 기대감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가벼운 터치들이 이어지더니, 그가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뭐라고 저장했어요?”
“알 거 없어.”
“알고 싶다.”
부러 어리광을 피우듯 말했더니, 그에게서 올곧은 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피하고 싶지 않다. 심장은 이토록 두근거리는데. 손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기운이 솔솔 빠져나가는데. 가뭇없이 몽롱해지는데…….
“중독녀 증상 또 나온다.”
“내가 뭘요?”
“사람 앞에 두고 혼자 멍 때리기.”
그러게 누가 그런 눈으로 쳐다보래요?
그린은 냉큼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그가 치워버리기 전에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핸드폰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화면을 들여다본 순간, 그린의 두 눈에 들어온 글자는……여자.
“에? 이게 뭐예요?”
“한글 몰라?”
“아이 참, 그러니까 이게 무슨 의미냐고요.”
“뭔 의미를 찾아? 너 남자야? 아니잖아.”
빙글거림이 섞인 정효의 대꾸에 그린은 그만 아연해졌다.
맙소사. 피라밍크스는 여러 종류의 큐브들 중에서 한 가지를 딱 지정이라도 하지. 여자. 이건 뭐 흔하디흔한 보통명사에 불과하잖아. 사람, 이렇게 해놓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인 건가?
“후유.”
“후유.”
정효가 그린의 어투를 따라 했다. 얼굴에 어린 빙글거림도 그대로다. 얄밉게도.
도끼눈으로 쏘아봐주어야 하는데 그래지지가 않는다. 그린은 입술을 뿌, 내민 채로 정효 대신 핸드폰 속 두 글자를 실컷 노려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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