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월관의 별관인 태화관 오른쪽 제일 끄트머리 방. 푸르스름한 바깥 기운에 아담하고 소박한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접객용으로 쓰는 방은 아닌 듯 소박하였다. 방 중앙에 술병과 잔이 놓인 작은 교자상과 방석이 있고, 맞은편으로 난 커다란 미닫이창 밖으로는 뒤뜰의 우거진 녹음이 보였다. 그리고 그 창 아래로 반듯하게 깔린 보료 위로 익상이 이마에 팔을 얹은 채로 누워 있었다.
잠이 든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도 아직 30여 분전의 흥분과 울렁임이 다 가라앉지 않았는데, 이유모를 주먹다짐까지 한 그가 잠이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문영은 조심조심 다가가 명월관 주인에게서 받은 옷을 머리맡에 놓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익상은 핏물로 젖은 셔츠만 벗어둔 채였다. 문영의 눈이 눈두덩에 얹힌 그의 팔을 따라 겨드랑이 체모에서 낯을 붉혔다가, 조용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으로, 또 가슴팍의 얕은 골을 따라 탄탄한 복부로, 복부의 배꼽언저리에서 그 아래로 길게 이어진 검은 체모를 따라 움직였다. 마치 바지를 벗으려다 만 듯, 조임세가 풀려 있는 혁대 그 안쪽까지 다 보려는 것처럼 말이다.
낯이 달아오르고 목을 조이는 교복이 갑갑하였다. 하지만 나가고 싶지 않다. 자신의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눈두덩에 얹은 팔을 걷어내지도 않고, 불러주지도 않는 그가 문영은 불안하였다. 머뭇머뭇 손가락을 뻗어 눈 아래 광대에 난 상처를 살그머니 어루만졌다. 화가 난 걸까? 그렇다면 왜일까? 주먹다짐을 하던 익상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반 정도 이성을 잃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다급하게 불렀을 때에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쉽게 풀지 못하는 것 같았으니까.
문영은 여전히 기척을 내지 않는 익상 옆 보료 바깥 맨바닥에 가만히 모로 누웠다. 오늘 하루는 정말이지 열흘 같은 하루였다. 감정의 기복이 아슬아슬 줄타기를 한 것도 모자라 사건과 사고에, 기쁨과 놀람과 안도, 불안까지 집약된 감정의 덩어리들에 몸도 마음도 집어삼켜진 기분이었다.
“혹시, 화가 나셨습니까?”
아래로 뻗은 익상의 엄지손가락을 살며시 말아 쥐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역시 답이 없다. 아니 익상은 미동도 없었다.
“제가 뭘 잘못한 겁니까?”
다시 한 번 물었다. 싸우기는 치후와 싸운 것 같은데, 왜 자신이 잘못을 했느냐 물었는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뒤로 널브러진 기녀를 보기 위해 왔을 때, 찰나의 시간 동안 어금니를 문 채로 뚫어져라 자신의 눈을 헤집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저는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엄지를 말아 쥔 익상의 손등을 뺨에 대며 문영은 계속 웅얼거렸다. 익상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손등에 닿는 보드랍고도 뜨거운 살갗의 열기에 참고 눌러왔던 어떤 욕망이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저는.”
또다시 종알대려는 문영. 익상은 눈두덩을 가렸던 팔을 내리며 보료 바깥에 모로 누운 문영의 몸을 그대로 덮쳤다. 다리를 얽고 문영의 손을 바닥에 눌러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해놓고는 반쯤 올라타 갸웃 고개를 틀었다. 너무나 놀라서 반항할 생각도 못한 채 멀뚱멀뚱 눈만 껌벅거리는 문영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가 돌았었다, 핑 하고.”
“예?”
갑작스런 상황, 갑작스런 대답에 그녀가 얼뜬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온몸에 박혀들듯 자신을 덮친 사내가 전하는 육체의 감촉에 얼굴은 이미 시뻘겋게 익은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머리꼭뒤가 돌아버렸었다는 말이다. 아주 정신이 나가버리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잘 못 알아듣겠습니다.”
“네가 그 녀석한테 웃어주는 바람에 내가 미쳐 날뛴 거란 말이다. 모르겠냐?”
문영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익상의 눈을 파고들었다. 그가 모르겠느냐, 물었지만 사실은 그의 첫마디에서부터 알아들어 버렸다. 그럼에도 자꾸만 되물은 것은 믿기지 않아서였다. 문영의 양 손목을 찍어 누르고 있던 익상의 한 손이 붉게 달아오른 도톰한 입술을 조심스레 슬었다.
“싫다, 네 눈이 다른 놈을 보는 것.”
뜨거운 숨결과 달콤한 머루주 향취. 익상이 고개를 틀어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매만지던 문영의 입술에 입술을 겹쳐왔다.
“싫다, 네 입술이 다른 놈 이름을 부르는 것도.”
손목을 누르던 손이 허리 아래로 들어가 허리를 감아 안았다.
“다시는 내가 미쳐 날뛰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마지막 말끝에 익상의 입술이 거칠게 문영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래…… 이제야 알겠다. 내기놀이 시작 전, 익상의 그 표정의 의미. 그리고 어디 누구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왜 그리 싸움박질 하듯 치후와 주먹다짐을 했는지도. 왜 찰나로 이성을 내다버렸었는지도 문영은 알 것 같았다. 온몸이 저릿하도록 벅차올랐다. 질투는 명은을 향한 문영 자신만의 몫인 줄 알았는데…….
“다 보여줘.”
귓속으로 데일 듯 뜨거운 숨결과 함께 밀려든 말이었다.
“나만 아는 홍문영을 보여 달라는 말이다.”
익상의 손이 문영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고개를 깊이 틀어 입술을 깊이 맞물리고 격정적으로 입맞춤을 해왔다. 그러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문영의 셔츠단추를 풀어 그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나만 아는 홍문영을 달라는 말, 다 보여 달라는 말’ 그것도 알겠다, 무슨 뜻인지.
문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떼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익상의 관자놀이로 손을 뻗었다. 인내와 욕망과의 싸움으로 불거진 관자놀이의 핏줄을 가만히 매만졌다. 어쩌면 이 남자는 아까 전 화장실에서도, 내기놀이에서 주먹다짐을 하는 동안에도, 또 기도가 막혀 뒤로 넘어간 기녀에게 응급처치를 할 때에도 이렇게 사내의 욕망과 내내 싸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처음 만난 그날, 그 밤부터…….
“다시는…… 어떤 이유로도 저 말고 다른 여자를 곁에 두지 마십시오.”
문영은 순응하는 고갯짓 대신 발칙한 말을 뱉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