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 도르르 톡톡. '빗물이 홈통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익상이 틀어놓은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피아노연주곡 소리에 박자를 맞추었다. 문영은 벽 너머, 서가 쪽의 익상이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젖은 옷을 벗어내었다. 벌써 훌쩍 지나버린 두어 달 전, 아침에 눈을 떠보고는 벌에 쏘인 듯 놀라 그대로 꽁무니를 빼버렸던 그의 방이었다.'방 안에 있는 세간은, 주인이 자주 집을 비우는 것을 그대로 반영한 듯, 문갑 두 채와 단정하고 깔끔한 해서체로 시구를 쓴 8폭 병풍과 이부자리가 전부였다. 문영은 깨끗한 방에 혹여 더러운 무엇인가를 떨어뜨릴라, 조심스레 벗은 옷을 개켜놓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몸에 남아 있는, 한심하게 젖어버려 피부를 옥죄는 지갑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 결국엔, 그대로 익상이 내어준 마른 옷가지를 걸쳤다.'무릎까지 덮이는 셔츠를 입고 세 번, 네 번을 걷어도 치렁치렁 바닥에 끌리는 익상의 바지에 허리를 동여맨 채 문영은 방에서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헉 숨을 삼키고는 고드름처럼 얼어붙어야만 했다. 화르르 열이 번지고 문설주를 잡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서가의 책상 옆에서 젖은 옷을 벗은 남자. 그 적나라한 나신의 뒤태에 눈이 박혀버려서 몸까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틈이라고는 어느 한 곳도 보이지 않는 단단하게 다져진 몸. 살집 없이 늘씬한 사내의 몸에 돌덩이처럼 배긴 근육들은 위험과 고통의 단내를 맡으면서 만들어진 것임을 문영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 자신은 고통의 단내를 맡아 본 적이 있던가? 아니, 없다. 그만큼 길게 고통을 겪어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래서인지 그의 야신은 더없이 야했다. 야하다는 말의 의미조차 정확히 몰랐지만 상해의 호텔에서처럼 아랫배에 드는 간질간질한 느낌에 발가락에 절로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익상이 마른 옷가지로 손을 뻗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등과 옆구리, 허벅지와 종아리에까지 희미하게 남아있는 멍 자국들을 눈에 담았다. 경성으로 돌아와 한 달 가까이 병원에 있을 수밖에 없던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천천히 뒤를 돈 그가 문영의 시선과 마주하였다. 그 찰나의 순간 사내의 단단한 근육들이 제각각, 그러나 거의 한순간에 단단하게 조여들었다. 관자놀이에 정맥이 도드라지고, 마른 옷가지를 움켜쥔 팔에 힘줄이 불거졌다. 하지만 그는 마주한 시선을 놓지 않은 채, 보고 싶다면 다 보여주겠노라는 듯이 느릿하게 움직여 속옷을 입고 바지를 꿰었다. 고개를 갸웃 꺾어 경직된 목을 풀고 바지에 허리띠를 끼며 문영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기대어 서 있는 벽에 한쪽 팔을 기대어 비스듬히 마주선 익상이 씨익, 양쪽 입 끝을 끌어올렸다.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난 혼전 순결 뭐 그런 것을 지켜주겠노라는 마음에도 없는 헛소릴 지껄이는 인간은 못 된다. 여인의 순결에 집착하는 멍청하고 한심한 놈이 되라면 되는 척은 해보겠다만, 그래도 내 속이 어디 가겠냐. 물론 이런 내 생각에 가정교육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놈이라 손가락질 할 인사들도 수없이 있겠지만……. 난 예전부터 손가락질에 익숙해진 놈이다. 그러니 너도 손가락질하고 도망가려거든 지금 가라. 그럼…… 바로 잡으러 갈 테니까…….”'도망가라는 말과는 달리, 짧은 미소 뒤 벽을 짚지 않은 익상의 다른 손 검지가 부대자루처럼 커다란 자신의 셔츠 안쪽으로 보이는 문영의 쇄골을 스윽 쓸었다. 그 느긋한 손짓에 문영의 심장이 조바심을 칠만큼 말이다. 손톱이 시작되는 손가락 첫마디에 칼에 베었다가 아문 상흔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여기. 쇄골.”'마치 눈길로 입술을 맞추듯, 눈동자를 마주한 채로 그가 입술을 열었다.'“그리고 여기는 흉골의 경정맥 절흔.”'좌우 쇄골이 만나 움푹 팬 흉골 경정맥 절흔에 머물렀던 익상의 검지가 단단한 종이갑옷 밑으로 감추어진 가슴골을 따라 내려갔다.'“여긴, 검상돌기.”'그리고 종이갑옷 아래로 맨살을 드러낸 복부의 가장 윗부분 명치끝에 머물러 거칫하고 뜨거운 손바닥으로 복부를 쓸며 지갑(紙甲) 위로 올라갔다.'“검상돌기 위로 복부대동맥이 지난다.”'의학부생이 알아야 할 10만 개의 의학용어 중 극히 일부지만, 그 명칭만으로도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해부학 용어들. 익상은 가르치듯 말하지만 그의 눈은 해부학 용어를 묻고 있지 않았다.'“심장은 여기 이 아래.”'지갑(紙甲) 위 유두 끝에 머문 손가락의 감촉에 문영은 숨을 멈추었다. '“유두와 유방륜 그 아래…… 젖샘과 단단한 흉골과 흉벽 그 안에 있지.”'웃고 있지만 굳어진 입매, 겹쳐질 듯 마주한 눈동자에 일고 있는 격랑에 멈춘 숨을 뱉어낼 수도 없었다.'“늘 생각했었다. 왜 심장은 하필 이 얄궂은 위치에 있는 것인가 하는.”'문영은 말을 하는 유려한 익상의 입술에서 단단하게 여문 코끝을 지나 콧등의 굴곡을 타고 시선을 움직이다가 자신을 보고 있는 그의 눈으로 되돌아왔다. 눈…… 그래. 이 사내가 뿜는 오라의 실체를 규정짓는 곳을 찾아냈다. 바로 이 눈. 이리 가까이 마주할 때면 숨이 턱턱 막히도록 강렬한 사내 냄새를 뿜지만 무섭고 두렵지 않은 이유. 그 눈동자에 심장이 통째로 쥐어 흔들리는데도 그 저릿한 고통마저도 애가 달도록 소중한 까닭은 눈 때문이었다. 날래지만 엷은 속 쌍꺼풀 아래서 옅게 웃음 짓는 까맣고 맑은 눈동자는 이 사내의 여린 영혼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다.'“심장이 여기 있는 이유…….”'익상의 손가락이 지갑(紙甲) 위로 드러난 가슴골 안을 슬며시 파고들었다. 참았던 숨을 뱉어낸 문영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이곳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지.”'젖무덤이 시작되는 동그랗게 부푼 언덕 언저리에 그의 손이 놓였다. 후두두 후두두, 다시금 지붕을 두드리기 시작한 빗방울 속으로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하고 맑은 리듬이 섞여 들었다. 지갑(紙甲) 아래 숨은 젖무덤에 사내의 뜨거운 입술과 숨결이 스며들었다. '그가 이야기한…… 심장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상대를 향하여 심장이 고동칠 때 그 심장의 고동을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곳이니까. 전해주는 뜨거운 숨결과 설렘과 욕망이 가장 정직하고 빠르게 심장으로 전달될 수 있는 곳이니까. 아마도 심장이 그곳에 있는 까닭은 그러할 것 같았다.'익상의 손이 문영의 등 뒤로 돌아가 가슴을 동여맨 띠의 끝을 찾았다. 이마를 더운 숨결로 덥히는 그의 눈이 띠를 풀어야겠다며, 그러나 동의는 얻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녀의 눈을 직선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살보다 빠르게, 총알보다 빠르게 오늘 아침 수화기 너머 숙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이내 연기처럼 뭉그러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흐트러진 숨소리만 빗소리 속을 부유한다. 흉골 경정맥이 아프게 울리도록 뛰어대는 심장의 고동과 등에서 지갑(紙甲)을 그녀의 가슴에 옭아매고 있는 긴 끈의 끝을 잡고 있는 익상의 손끝이 전하는 생소한 전율만이 전부인 순간이었다. 문영이 천천히 작게 흐트러진 숨소리를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