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에서-

“좋아요, 당신이 이유를 말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한 번 해보죠. 재형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은 것은 아마도 당신이 숨어 사는 이유와 같을 겁니다. 내 말이 맞죠?”
지금까지 고집쟁이처럼 입을 꼭 다물었던 그녀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러더니 추운 겨울에 연못에 빠진 사람처럼 파랗게 질려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나, 난……, 숨어 산 적……, 없어요.”
“그 흔한 통장 하나 못 만들고 의료보험카드도 없고 하나밖에 없는 아이, 학교에 보내지도 못하는 게 숨어사는 게 아니라고요?”
그녀는 마치 지금 누가 막 괴성을 지르며 쫓아오는 것을 본 사람처럼 얼이 빠져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걸 보면 주민등록등본을 떼는 데 뭔가 문제가 있다는 말이죠. 두 가지가 있겠군요. 주민등록등본이 말소된 경우, 아니면 주민등본은 있는데 뗄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경우. 어디 하나하나 봅시다. 당신은 분명히 서울에 살다가 부산에 내려왔으니 전입신고만 하면 간단히 등본을 뗄 수 있을 거예요. 설령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도 예전 주소로 등본이 남아있을 테니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등본을 떼지 않았을까? 흠…….”
이제 그는 그녀를 보지 않고 허공을 노려보며 혼잣말하듯 웅얼거렸다. 하지만 만약 그가 그녀의 눈을 보았다면, 만약 그가 조금만 덜 명석했더라면, 그리고 만약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지금 그가 파내고 있는 것이 판도라의 상자란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고 평상시처럼 더 이상 캐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너무나도 자신의 추리에 빠져서 그녀가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사실을 기반으로 객관적인 분석을 술술 읊어대고 있었다.
“……가만, 전입신고를 하면 주민등록등본에 기록이 남지. 아마 당신은 누군가 자신이 살고 있는 주소를 아는 게 두려웠을지도 몰라. 그래서 신고를 하지 않은 거겠지. 위장전입신고를 해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면 부산에 국한할 수밖에 없을 테니, 살고 있는 주소를 알려고만 하면 당신이 어디에 사는지 알아낼 수 있을 테니 그게 무서워서 전입신고를 아예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지금껏 그는 소돔의 롯이었다.
‘하느님이 이르시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지 말고 도망하여 멸망을 면하라.’
롯처럼 그는 미노가 이르는 대로 그녀의 과거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동안 느껴왔던 이상한 점을 파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부탁 때문이기도 했지만 만약 그가 그녀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들춰보면 그녀가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잠재적으로 느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의식하지도 못하게 반쯤 뒤돌아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롯이 아니라 롯의 아내가 된 것이었다.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
공허한 공기를 가르고 그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주민등록등본이 말소가 되었다면 당신이 직장을 갖지 못하고 의료보험증도 갖지 못하는 이유가 다 설명이 돼. 하지만 말소가 되었다 하더라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방법은 있지. 하지만 이것도 거주사실을 입증해야 해.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당신은 당신이 살고 있는 주소를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렇다면 그 말은 당신은 주민등록에 변경된 거주지를 마음껏 열람할 수 있는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건데…… 그렇다면 그건 주민등록등본상의 세대주겠군. 당신 부모는 다 돌아가셨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남편이 되겠지. 만약 이혼했다면 세대주는 당신일 테니 당신이 주민등록등본에 알레르기를 일으킬 이유는 하나도 없을 테니 말이야. 그러니 세대주는 남편이란 가정이 더 맞을 거야. 가만, 그렇다면 그 말은…….”
혼잣말하다 멈춘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제야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하얀 석고상 같았다. 표정이 없었고 굳어있었다. 그녀는 그 상태로 쥐어짜듯 애원했다.
“그만해요, 제발…….”
잠시 동안이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제야 지금 그가 하려는 것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예전 같으면 여기서 멈췄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공포로 커다랗게 변한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이제 더 이상 그녀가 이런 식으로 숨어사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혹시 지금까지 숨어산 것이 남편한테 도망치기 위해서였습니까?”
이때 그는 아까부터 쉬익, 쉬익 하고 공기 중에 나부꼈던 이상한 소리의 정체가 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마치 천식환자처럼 힘들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남편한테 도망치는 거 맞는군요. 왜 그랬습니까? 그가 때리기라도 했습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눈언저리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그가 그녀의 두 팔을 힘주어 잡았다.
“말해요, 내 말이 맞죠?”
여전히 그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의 말이 맞는다고 확신했다. 왜냐면 그녀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까무러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현대물 미스터리 능력남 까칠남 무심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