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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녀를 그리다.
그의 손길이 몇 번 움직이자 머리카락이 몇 올 흘러내린 여자의 목덜미가, 땀이 배어 나오던 둥그런 어깨가 그려졌다. 잠시 후 왼팔 위에 오른팔, 그리고 그 위에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올린 머리가 얹어졌다. 감긴 눈꺼풀이 고즈넉하다.
심지가 굵게 깎인 연필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이 하얀 종이 위, 허공에서 여자의 겨드랑이부터 엉덩이까지 한 번에 내려 긋는 연습을 했다. 그는 한 번, 두 번, 세 번의 연습이 끝나고 난 다음에야 연필심을 종이에 대고 여인의 아찔한 곡선을 그려나갔다. 이내 움푹 꺼진 허리를 지나 달처럼 탐스러운 엉덩이가 둥실, 욕조 속에 담겼다.

<본문 중에서>

그녀, 그를 그리다.
정신없이 그림을 그려나가던 기은은 그의 눈에 다다르자 커다란 문제에 봉착한 사람처럼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진의 치뜬 눈이 그녀를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잡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도 마치 눈을 뜨고 자는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눈도 별로 깜박이지 않았다.
기은은 그의 강렬한 눈빛을 감당하지 못해 손이 달달 떨렸다. 곧이어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는 게 느껴졌고 숨이 턱턱 막혔으며, 견딜 수 없이 긴장되었다. 때문에 아무리 집중을 해도 연필 선은 자꾸만 수전증환자가 그려놓은 것처럼 비틀거렸다.
기은은 아랫입술을 물고 있는 윗니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조금만 더 세게 깨물면 금세 핏물이 배어나올 듯 입술이 새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