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련공원, 연못이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은 기은은 아까부터 내내 들여다보고 있던 잡지를 비로소 내려놓고는 길고 옅은 한숨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하늘에 새하얀 솜털구름이 물위에 뜬 돛단배처럼 천천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이 높게 둥실 떠 있었지만 늦은 봄 무렵이라서인지 그리 덥지는 않았고 바람은 상쾌하다 싶을 만큼 적당하게 불었다. '저 멀리, 비행기 한 대가 파란 하늘에 하얀색 줄을 기다랗게 그리며 지나갔다. 장난스럽게 비행기를 손가락으로 따라가던 기은이 자기도 모르게 빙긋 미소를 지었다. 참 신기하게도 하늘을 쳐다보고 있자면 복잡하고 고단한 일상은 잊히고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마음 놓고 꿈을 좇아가기에는 너무나 팍팍한 삶이지만 가끔씩 하늘을 쳐다볼 여유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주머니는 가볍고 늘 쪼들리지만 그래도 직장이 있고,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쉴 공간이 있고, 고향에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가. 힘든 삶인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큰 불행에 처하지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다. 게다가 오늘은 기은이 가장 좋아하는 화요일이다. 일곱 밤을 자고 나면 어김없이 화요일이 찾아와 준다는 사실도 얼마나 고마운지.'화요일은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기도 했지만 기은은 무엇보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날이라서 좋았다. 그림실력에 비해 초상화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요즘 사람들이 초상화보다는 사진 찍기를 더 선호해서 그런 것인지, 하루 종일 자리를 깔고 앉아 있어도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운이 좋은 날은 너덧 명도 그렸지만 어떤 날은 하루 종일 하늘만 쳐다보다가 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기은은 손님 수와 상관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요일만 되면 무조건 행복해졌다. 화요일에는 마음껏 하늘을 쳐다볼 수도 있고, 현실감각이 좀 떨어지는 날에는 마음껏 멋진 미래를 상상할 수도 있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활동하기 딱 좋은 날씨 속에서 시린 하늘과 대면하고 있자니 기은은 솔솔 잠이 오기 시작했다. '“기은아!”'껌벅껌벅 느릿하게 움직이던 기은의 눈꺼풀이 완전히 감겨드는가 싶은 찰나, 공원에서 한두 번 마주치다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급작스럽게 친해진 진영이 한 마리의 새처럼 잽싸게 곁으로 날아들었다. 진영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노래연습 겸, 기타를 칠 겸하여 채련공원을 찾는다. '“잘 돼가?”'진영은 기은과 얼굴만 마주치면 늘 그렇게 물었다. '“잘 되긴. 오라는 손님은 안 오고, 잠만 징하게 온다.”'기은이 대답 끝에 길게 하품을 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오니 그런지 그나마 몇몇씩 지나다니던 사람들의 발길마저 뚝 끊겨 드넓은 공원에는 마치 기은과 진영 두 사람뿐인 것만 같았다. 떨어진 과자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려 간간이 바닥으로 내려앉던 새들도 뜨거운 태양을 피해 그늘로 숨어들었는지 자취를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오전 내내 한 장도 못 그렸어?”'연이어 달라붙는 하품을 떨쳐내며 기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어. 오늘도 공쳤네. 그림 값을 더 내려야 하려나.”'하지만 그림 값을 내리기만 한다고 상황이 나아질 게 아니라는 것을 기은은 알고 있었다. 요일이 문제였다. 기은은 가능하다면 그림 그리러 오는 날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주말로 바꾸고 싶었지만 수입의 제일 큰 덩어리를 차지하는 건축 사무소 일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그럼 다 관두고 나랑 밥이나 먹으러 가자. 몇 번 거푸 얻어먹었으니까 오늘은 내가 한 턱 쏠게.”'좀처럼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공원을 휘 둘러보던 진영이 말하자 권태롭게 꿈쩍거리던 기은의 눈꺼풀이 팽팽하게 위로 들리더니 금세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네가 쏜다고? 진짜로?”'“그럼, 진짜지.”'진영의 밥 사준다는 말에 졸음이 싹 달아난 기은은 묵직하게 벤치를 누르고 있던 엉덩이를 번쩍 치켜들었다. 기회가 될 때 먹어두어야 한다는 오랜 생활습관이 따사로운 햇살에 흐리멍덩해져있던 그녀의 몸과 마음을 각성시켰다. '“혹시 생일이야?”'기은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니. 사실은 어제 내가 팁을 좀 짭짤하게 받았거든.”'“아아…….”'기은은 재빠르게 손을 놀려가며 앞에 펼쳐 놓았던 그림들을 접고 화구를 챙겼다.'“그나저나 이 남자는 누군데, 만날 그렇게 들여다 보냐?”'기은이 짐 챙기는 것을 거들던 진영이 잡지 한쪽 면에 커다랗게 실린 남자의 얼굴을 손톱으로 쿡쿡 찌르며 물었다. '“어머, 야!”'사진에 흠집이 생길세라 얼른 잡지책을 빼앗아간 기은은 손바닥으로 툭툭 털고 햇살에 기울여 상진의 사진이 진영의 손톱에 긁히지 않았는지를 확인했다. 우려했던 대로 매끄러운 상진의 왼쪽 얼굴에 희미한 줄 하나가 그어져 있어 기은이 사납게 진영을 흘겨보았다.'“어이구, 이거 콧구멍에 시커먼 칠이라도 해 두면 아주 죽일 기세네. 대체 누군데 그러냐?”'진영이 정말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기은은 대답 대신 피식 웃기만 했다. '상업적인 미술가로 크게 성공한 30대 초반의 남자를 흠모하는 이 마음이 정확히 그가 벌어들이는 돈의 규모 때문인지, 아니면 꽤나 잘 생긴 외모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멋스러운 남자의 분위기 때문인지, 기은은 아직도 정확하게 판정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나상진이라는 남자에게 처음으로 눈길이 쏠렸던 이유는 절대적으로 그의 그림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는 있다.'어떤 대상을 그리던 세밀하고 너무나도 자세한 묘사를 하는 자신과는 완전 반대로 심플한 선 몇 가닥만으로 완성되는 상진의 그림은 그녀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그가 그려놓은 몇 개 되지 않는 선들은 어느 때에는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명기(名器)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퇴폐적인 여인의 뒤태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를 놀라자빠지게 한 것은 그의 그런 단순한 그림이 번번이 굉장한 가격에 거래된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작품은 그녀가 일 년 내내 휴일 없이 일 해서 버는 돈과 맞먹기도 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상진이 기은의 우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기은은 아주 여러 가지 이유로 그를 동경했고 몹시 흠모했다. '“혹시 연예인이야?” '잡지를 들여다보며 빙긋이 웃기만 하는 기은의 태도에 진영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아니.”'“그럼?”'“화가.”'“화가?”'진영의 왼쪽 콧방울이 잔뜩 위로 들렸다.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었거나 황당한 상황에 닥쳤을 때마다 진영은 그런 표정을 지었다. '“음.”'진영은 기은의 팔과 잡지 사이로 끼어들며 상진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화가란 말이지?”'“그렇다니까.”'“근데 뭔 화가가 이렇게 뺀질하게 생겼냐?”'“그럼 화가가 어떻게 생겨야 하는 건데?”'그가 그려놓은 그림에 충격을 받은 기은은 그의 그림이 얼마에 낙찰되는지에 한 번 놀라고 그의 얼굴을 보고는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지금 진영이 뭔 화가가 이렇게 생겼냐고 놀라는 것처럼 말이다. '단조로우면서도 묘한 느낌을 뿜어내는 그의 작품을 보며 기은이 상상했던 상진의 얼굴과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모습은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었다. 기은은 그가 명성에 걸맞게 아주 괴짜처럼 생겼거나, 늙수그레하고 돈에 빠삭한 눈빛을 지니고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다소 날카롭기는 했지만 무척 따스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고, 좀 딱딱한 목소리로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입매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냉정함과 온유함을 한 얼굴에 다 담고 있는 상진은 어디가 특별히 잘생겼다고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묘한 매력을 폴폴 뿜어내는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