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갈게요.”
연하에게로 오는 무진의 눈빛이 서늘히 외로워졌다. 따지고 보면 늘 그랬던 것 같은데, 지금 이 순간, 새삼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이제부터 부지기수일 테니, 태연한 자세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오래도록 그래온 듯 익숙해져야만 하는 일.
“혼자 보려고요. 그러고 싶어서요. 아빠에겐 소중할 비밀이잖아요.”
“알았어요. 그래도 잠깐 있어요. 데려다만 줄 테니까.”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혼자 가도 돼요.”
“기다려요.”
연하는 무진으로부터 돌아섰다. 묵묵히 현관을 향해 걸어갈 때.
“기다려!”
낮게 울리는 명령의 말이 너른 거실을 빽빽하게 채웠다. 연하는 지금,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전부 다 닫고 싶었다. 아니, 전부 다 환히 열고 싶었다. 내쉬는 숨, 들이마시는 숨, 모두가 다 무진에게서 오고 무진에게로 가는 것만 같았다.
“태풍이…….”
무진의 말은 거기에서 멎었다. 태풍을 염려하는 것은 온당하다. 태풍에 기대어 함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불온하다. 온당함과 불온함, 둘 사이에는 언제 범람할지 모를 경계가 부실한 둑으로 버티고 있을 터.
두려움을 멍에처럼 등지고 연하는 집을 나섰다. 우산이 가려주는 건 고작 얼굴 하나. 미친 세기의 돌풍이 연하의 몸 전체에다 비를 뿌려놓았다. 바람과 맞서 총총걸음을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무진에게 가로막혔다.
우산도 없이, 폭풍이 지나간 얼굴을 하고서, 무진이 연하에게서 우산을 빼앗았다. 차문을 열고 연하를 보았다.
“화나셨네요.”
“화났어요.”
“많이.”
“많이.”
“그런데도 무섭지가 않아요.”
“간 큰 낙하산이니까.”
오랜만에 듣는다. 낙하산이라는 표현. 펼쳐지면 추락하진 않을 테니, 적어도 그 속에 있는 동안은 안전하겠다. 무진이 꺼내든 낙하산에 연하도 동승했다.
“친절한 이사님께는 착하게 굴어야 하는 거죠?”
“당연히.”
대답은 명료한데 눈빛은 깊고 또 깊었다. 그 눈빛에 풍덩 빠지듯, 연하는 차에 올랐다. 차문을 닫아주고서 무진도 차로 올라왔다. 비바람에 젖은 냄새가 차 안에 아릿했다.
“처음부터 착하게 굴었으면 안 젖었을 거잖아.”
나직하면서도 친밀한 어조가 또 다시 마음을 뭉클뭉클 떠오르게 했다. 지난밤, 지지난밤의 꿈들이 아찔하게 재생되었다. 연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거짓말 같은 감각들.
“아파요?”
무진이 물었다.
“아니요. 왜요?”
“방금, 얼굴이…….”
“저요. 자꾸만 나쁜 꿈을 꿔요.”
“나랑 같네.”
“이사님도요?”
아픈 설렘도 있구나, 느끼는 연하에게 무진의 말이 다가왔다.
“나쁜 꿈 퇴치법. 첫째, 잠을 안 잔다.”
“그게 뭐예요. 순 엉터리다.”
말과 더불어 소르르 웃음이 기어 나와 다행이었다. 웃음의 분량만큼 마음도 말캉해졌다.
“둘째는요?”
“둘째는 말해주기가 곤란해.”
“그러니까 더 듣고 싶다.”
“둘째, 즐긴다.”
이마에 신열이 훅 올랐다. 어디로든 달아나고 싶었다. 무진의 눈길이 없는 데로. 아니, 어디로든 숨어들고 싶었다. 무진 외에는 누구의 눈길도 없는 데로.
연하는 뜨거워진 이마를 두 손에 파묻었다. 환각 같은 두통이 정수리에 꽂혔다. 차가 태풍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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