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후계의 재목이 되지 못합니다.” 은록이 다문 입술을 먼저 열었다. 시간을 끌어 봤자 자신을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으니 답답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형산이 추억에서 빠져나오며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계국에서 자라 계국의 교육을 받은 네게 어려운 일이란 걸 안다. 그럼 장사는 어떠하냐?” “장사 또한 소질이 없습니다.” “장사는 소질이 없고 후계엔 자신이 없다, 라.” 그가 은록의 미래를 정하기 어렵다는 듯 꽤나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한참 뒤에 말했다. “그럼 여자로 태어났으니 여자로서의 삶을 살 수밖에.” 은록은 차분히 숙인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이형산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감이 잡혔다. “혼처를 알아 두었다.” 은록이 자기도 모르게 두 손에 힘을 꽉 쥐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그 긴말을 늘어놓으며 속을 떠보다니 솔직하게 대답한 자신이 너무 아둔했다. “이름 있는 상인 집안의 자제다. 가문보다 여인의 성품을 본다 하더니 따질 것 없이 너를 점찍었다 한다.” “제가 뵌 적 있는 분입니까?” “오가며 얼굴 한 번 못 봤을까. 그것보다 풍요를 등에 업고 사는 삶을 영위하게 되었음을 기뻐하거라.” 웃는 이형산을 보며 은록은 열었던 입술을 다시 다물었다. 원래 쉽게 말을 하지 않고 냉랭한 분위기를 몸에 감고 사는 조카였다. 이형산은 개의치 않고 할 말을 마저 했다. “멸문당한 가문을 일으키는 건 내 몫이 아니다. 너의 몫도 아니지. 여긴 계국이 아니라 인수산국이야. 우린 명예가 아닌 돈이 주는 권력을 탐내야 하느니라. 돌아가신 형님의 마지막 핏줄인 너를 위해 안배한 것이니 후회 없이 잘 살거라.” 안배는 맞다. 남의 나라에 쫓겨 와 배를 곯는 가난 속에서도 그녀를 거둬 주고 키워 줬으니 배려고 애정이다. 난세에 친인척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배고프고 굶주리면 핏줄도 소용없는 게 현실인 것을. 은록은 한심한 처지를 한탄하는 대신 담담함을 가장해 이형산에게 물었다. “혼례가 언제입니까?” “늦진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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