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변한 세상을 주인님과 함께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저는 그래서 세상이 변해가도 쓸쓸하지가 않습니다.”

천술사 유가에게 잡혀 그의 비복이 된 요신 홍주.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만난, 그들이 써나가는 새로운 이야기.

“형님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내 생각이나 더 하렴.”

“저는 언제나 주인님을 생각합니다.”

꼭 제 얼굴 같은 여린 목소리에 유가는 그저 속으로 홍주를 불렀다.

‘홍주야, 홍주야. 불러도, 불러도 그 이름이 닳지 않으니 나도 참 큰일이구나.’

2. 작가 소개

정혜

착실한 청개구리

▣ 출간작

야차

달콤한 인생(eBook)

몸(eBook)

러브 크라임(eBook)

연담(eBook)

3. 차례

#외전

4. 미리 보기

“주인님.”

“주인이 아니래도.”

문턱에서 홍주가 애매한 얼굴로 싱긋 웃는다. 손짓을 하니 쪼르르 다가왔다. 곁에 앉는 홍주의 무릎을 두 팔로 끌어안고 얼굴을 기댔다. 홍주가 가만히 머리를 쓸어넘겨준다. 그것이 기분 좋아 그대로 있었다.

“비가 계속 와서 두희도 곧 돌아올 것 같아요.”

“그렇겠군.”

이생에서 색목인이 된 두희는 그 타고난 덩치와 힘을 재능으로 삼아 목수일을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무사히 제게 돌려보내주신 것에 감사인사를 드리러 홍주가 명양사를 향했을 때 몇 번 따라오더니, 곧 거기서 알게 된 꾼 밑에서 일을 배우게 됐다고 했다.

나무를 베고 다듬고 틀을 세운다. 그것은 집이 될 때가 있었으며 가구가 될 때도 있었다. 또 어느 날은 나무를 심으러 며칠간 어느 산에 다녀오기도 했다.

“두희가 오면 빈대떡을 해 먹을까요?”

유가는 작게 웃었다. 몸을 움직여 홍주를 올려다본다. 작고 귀여운 그 얼굴은, 제가 천술사였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솜꽃 같은 청아한 향기도 마찬가지다.

“홍주, 너는 꼭 내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구나.”

“제가요?”

“그래. 나도 마침 빈대떡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찌 알았냐.”

홍주가 방그레 미소를 그린다. 그 얼굴이 매우 사랑스러워 유가는 뿌듯하게 차오르는 저 안쪽 가슴을 느꼈다. 홍주는 요신이다. 그리고 자신은 천술사였다. 천술사는 요신을 때려잡는다. 요신은 대개 악신이 되기 때문이다.

시선을 내려 작고 하얀 손에 관절이 불거진 자신의 손을 얽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만지작거리다 입가로 가지고 와 부드러운 살갗에 입술을 눌렀다.

야화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금실다람쥐가 된 홍주를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은 순전히 두희 때문이었다. 멀거니 혼자 집을 지키는 두희의 적적함을 달래주려 했던 것이다. 그런 것이 지금은 유가에게 없으면 안 될 존재로 자리매김해버렸다.

아직도 생각한다. 초상화를 저에게 달라던 작은 요신을. 요신이 천술사를 지켜준다고 말한다. 자신이 좋으니 온 힘을 다해 무덤가를 지켜준다고 했다. 어린아이 재롱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듦과 동시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홍주는 내내 순하고 귀여웠다. 요기 대신 훈기가 나오는 것이 신기했고,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두희를 제 가족으로 받아들여 도와주고자 하는 것에 놀랐다.

예쁘게도 구니 정이 금방금방 붙는다. 그래서 어느 정도 유가의 삶이 정리될 때에 홍주를 놔줄 생각이었다. 내친김에 어찌 살아야 할지 길잡이도 해주려 한다. 혹여, 혼자 남아 어정거리다 다른 천술사에게 액을 당할까 심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유가에게 다음 생에도 만나자고 청해온 것은 홍주다. 긴 기다림을 주저 없이 하겠다고 한다. 거절하는 게 좋지 않을까. 홍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기약 없음’이 얼마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그래서 모든 귀와 신들이 그 긴 시간 동안 악신이 되는 것이다. 악신이 되기 쉬워지는 것이다.

터덜터덜 산길을 내려가는 작은 등을 본다. 명대부 손자분의 정인연을 문성삼매께 올리고 내려가는 길이었다. 모른 척 웃고 넘겨야지, 하기가 무색하게 혼자 내려가는 작은 등이 눈에 밟혔다.

자신의 삶 중에 여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찰나처럼 스쳐간 여인이 있는가 하면, 계절을 함께 난 여인도 있었다. 여인들과 이별했을 때를 떠올린다. 담담히 흘려보내던 때도 있었고, 몇 날 며칠을 생각에 잠기어 보낸 때도 있었다.

다시 앞을 봤다. 홀로 가는 홍주가 보인다. 생각해보니 연을 맺은 이래 홍주가 저리 먼저 간 적은 없었다. 그걸 자각하자 쓸쓸함이 다가왔다.

홍주와의 이별이 씁쓸하다. 자신 외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정이 붙어 이 사랑을 내보인다 생각하자 속이 쓰린 것도 같았다.

앞으로 살면서 자신의 무덤가를 지켜주겠노라 말해줄 이가 또 있을까. 이런 연을 그대로 놓친다면 남의 연은 기를 쓰고 이어주던 ‘천술사 유가’의 명성이 다 죽는 것 아니냐. 홍주가 이대로 떠나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

그래서 불러 세웠다. 혼자 그리 가지 말고 같이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