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 작고 사소한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길고 긴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 글은 여타의 로맨스 소설과는 달리 큰 갈등 없이 잔잔하고, 인물들이 나이들어 가면서는, 시간에 따른 이야기 전개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정열적이지는 않지만, ‘순수한 사람들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또한 이 글에서는 흉내만 낸 사투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 충분히 있는 사투리를 대충 흉내만 내는 걸 원치 않았기에, 외국어의 자막처럼 설명도 불가피 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순수'를 지향합니다.
그렇잖아도 지치고, 힘들고, 상처받은 이 세상에서, 글로써나마 작은 위로를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았으면 합니다.
제아무리 잘난 사람이건, 씩씩한 사람이건 간에, 저마다의 욕심으로 다들 외로워하기 마련이니까요.
표현하는 마음을 좋아합니다.
가슴에 품어두기만 한 따뜻한 관심과 사랑은, 상대방에겐 무관심과 똑같은 의미일 수도 있으니까요. 직접 보고 듣지 못했다면 아예 없는 거라고 생각해 버리는 오류를 흔히들 범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연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선물이니까요.

* * * * *

12살 소녀가 69살 노인이 되기까지…….
사랑하며 살았던 그들의 모습. 그들의 자녀이야기까지 함께 실었습니다.
(1편은 ‘자연과 함께 성장하는 순수한 동심’, 2편은 ‘함께하는 사람들의 순수한 행복’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1편 :
산골 마을의 12살 친구들. 여우 같은 정순, 터프한 4차원 소녀 순자, 단순하고 소심하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절대 못 참는 여주인공 오숙.
가꽁자(경사가 급한 비탈길)를 넘어지고 구르면서 학교에 온 그들에게, 담임 선생님은 하얗고 멋진 전학생을 한 명 데리고 왔습니다. 과연 그 소년은?


-본문 중에서 -

“오숙아!”
또 시작이다, 저 녀석! 반기긴 누가 반긴다고, 출근하자마자 자기 사무실로 직행 안 하고, 저리도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대며 들어오는 것인지……! 늘 있는 통과의례처럼, 아침마다 우리 사무실을 꼭 거쳐서 가는 저 인간 속내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하긴 사무실 여직원들이 좋아라 하긴 한다. 저 잘난 낯짝을 들이대며 환한 미소를 여기저기 뿌려 대는데, 나같이 저 인간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싫어할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난 분명히 안다.
‘저 녀석을 알게 된 것이, 장장 16년. 그 오랜 기간 동안, 찰거머리처럼 내 옆에 딱 들러붙어 온갖 악행을 저질러 오면서도 절대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징한 저놈, 한용우!’
나한테 맘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사람들 오해하게 왜 꼭 저러나 모르겠다. 많지도 않은 나이에 작지도 않은 이 회사의 사장까지 된 녀석이 저러니까, 내 나이 스물여덟 먹도록 맞선도 하나 안 들어오고, 이 나이 이때껏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해 본 게 아니겠냐 이 말이다.
사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이름이 좀 시골스러워서 그렇지, 어디 내놔도 딱히 빠지는 얼굴은 아닌데도, 그 흔한 데이트 한번 못해 보고 이렇게 팍 삭아 버린 건 모두 저 녀석 때문인 것 같아 분하기만 하다. 남 보기엔 저렇게 완벽해 보이는 녀석이 늘 내 옆에 붙어 다니는데, 게다가 저 녀석이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오숙아, 오숙아!” 이고 보니, 세상천지 어떤 남자가 나한테 접근을 해오겠냔 말이다.
제발 좀 떨어졌으면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 어려운 불경기에 저 녀석이 취직시켜 준데 대한 보답으로 차마 대놓고 싫은 소리도 못하겠다. 그래도 명색이 사장씩이나 되니까.
‘내가 낙하산이란 거 저렇게 만천하에 공개할 필요가 있나?’
오늘도 몰래 구시렁거리고 있는 나다.
‘그러려면 잘해 주기나 하든지……!’
어찌나 씩씩하게 내 이름을 불러 대며 들어서는지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다. 우리의 16년 우정이 비록 징그럽게 끈질기다 해도, 그래도 저렇게 대놓고 저럴 필요는 분명히 없다.
‘제발 내 입장 좀 생각해 줘라, 이 녀석아!’
저 녀석이 매일 아침마다 미소를 한바탕 뿌리고 가면, 사무실 여직원들이고, 남자직원들이고 할 것 없이 국수는 언제 먹느냐며 물어 대는 통에, 그때마다 우린 전혀 그런 사이 아니라고 둘러대기도 이제 신물이 난다. 물론 그 말을 들은 그 누구도 내 대답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억울한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누구 혼삿길 막을 일 있어? 도대체 저 녀석이 왜 저러나……?’
이 회사 들어오고 나서부터, 그러니까 벌써 5년째 아주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지만, 아직도 뚜렷한 정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저 녀석은 날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인간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 미리보기 >

“그럼 니들이 먹겠다는 게, 도대체 뭔데?”
“도시락 반찬!”
드디어 도시락 반찬통을 꺼낸 순자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뭐?”
“오늘 학교서 먹고 남은 도시락 반찬 있을 거 아이가! 지금 그거 묵자꼬.”
당연한 듯 씩씩하게 외치는 순자를 뒤로하고, 그제도 정순이는 얌전한 척이었다.
“니들은 못 말려, 정말.”
이제는 인이 배겨 버린, 뒤로 ‘호박씨 까기’가 주특기인 정순이의 저 서울말일랑은 사뿐히 무시해 주고, 용우를 향해 또다시 두 눈을 빛내는 나였다.
“용우야, 여기 앉아 봐라. 니 도시락 반찬 남았제?”
“남긴 남았다만…….”
“그라모 니도 함 꺼내 봐라. 얼른 묵고 가자. 배고프다.”
“반찬만 먹으면 짤 텐데…….”
내 말에 성큼 거절은 못하고 머뭇거리는 용우였다.
“*짜모, 감시는(‘짜면, 가면서’의 사투리) 삐삐 뽑아 묵든가, 찔레 꺾어 묵든가 하면 되지. 그런 거는 간도 안 돼 있다 아이가!”
흥! 전에 자기 집 갔다 온 뒤로, 평소처럼 깐죽깐죽 싫은 소리는 타박타박 하면서도, 어쩐지 내 말이라면 대놓고 거절 못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나도 믿는 구석이 생겨 더 밀어붙이고 있었다. 자기 때문에 벌에 쏘이기까지 하고, 가꽁자서 만날 구르는 나를 보니까 불쌍해서 그런가 보았다. 아니면 자기 할머니를 봐서 그런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는…….”
“싫으모 니는 하지 마라. 순자야, 우리 묵자.”
“은냐.”
순자랑 나는 딸랑거리는 도시락 통에서 포크 달린 숟가락을 꺼내고, 시큼한 김치 냄새 물씬 풍기는 반찬통을 열었다. 엄마가 자주 해주는 *수리미(오징어채 비슷한 반찬)가 남아 있어서, 실은 학교 나올 때부터 순자를 꼬드긴 참이었다. 빨간 양념에 안 볶고, 기름에 튀기듯이 볶은, 엄마가 해준 수리미 반찬은 꼭 과자 같이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이, 참!”
맛있어서 행복한 우리는 킥킥거리며 오도독오도독 반찬을 씹고 있는데, 못 이기는 척 옆에 털썩 주저앉는 용우였다.
“와? 니도 물라꼬?”
“…….”
대답은 안 하지만, 이미 그 애 가방에선 반찬통이 나오고 있었다.
‘짜슥! 너 오늘 맘에 든다.’
“우히히히.”
순자와 나는 급속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집이 좋은 만큼, 용우의 반찬은 양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늘 맛난 것만 가득한 걸 알기 때문이었다. 용우의 도시락에선, 시골에선 보기 힘든 비엔나소시지도 가끔 나오고, 시골 아이들 모두가 선호하는 ‘쇠고기 장조림’도 자주 등장하곤 했다. 내키지 않는 건 눈에 뻔히 보였지만, 어쨌든 용우도 젓가락을 집어 자기 반찬을 찍어 먹었다.
“나는 니가 싸오는 소세지가 참 맛나더라.”
순자가 대뜸 용우 반찬을 집어 들었다. 나도 장조림을 하나 집어 먹었다. 하지만, 용우 반찬만 탐내는 우리가 내심 미안해서, 나도 엄마가 해준 반찬을 포크에 찍어 그 애 입 앞에 갖다 댔다.
“용우야, 이거 먹어 볼래? 우리 엄마 수리미는 진짜로 과자 같다!”
“응…….”
그랬더니, 내가 먹던 숟가락이라 찝찝해서 그런지, 안 어울리게 머뭇거리는 용우였다.
“안 더럽다. 내 이빨 하루에 한번씩 꼭 닦는다.”
“어이구, 오숙아! 양치질은 원래 하루에 3번씩 하는 거다.”
못 말린다는 듯 쯧쯧거리는 용우의 얼굴이 그제야 평소대로 자연스러워졌다.
“그라모 니는 하루에 3번씩이나 이를 닦느나?”
“당연하지.”
“아따. 귀찮겄네.”
“말을 말자, 말을 말어.”
내가 툭 내뱉은 말에, 학을 떼는 용우였다.
“하여간에 무끼가 안 무끼가!”
“…….”
참다못한 내 호통에, 안 어울리게 얌전히 입을 벌리는 용우의 입속에 냉큼 수리미를 넣어 버렸다.
‘은자 니는 하루에 한번빼끼 이빨 안 닦는 내랑 숟가락 같이 썼다 아이가!’
어린 마음에, 내심 그게 고소해서 웃어 버렸다.
“우떻노? 맛나제?”
“…….”
대답도 못하고 씹고 있는 용우 얼굴이 어쩐지 빨개진 것도 같았다.
‘짜슥, 그리 안 내키나? 그래도 내 이빨 썩은 거 한 개도 엄거든!’
“하루에 이빨 한번빼끼 안 닦는다꼬 그리 찝찝하나? 머스마 자슥이 그리 비우가 약해 갖고 뭐해 묵겄노! 그럴 거 같으모 순자꺼는 아예 몬 받아묵겄네.”
“거서 내 이야기가 와 나오노!”
양치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부터 조용하던 순자가 기어코 소리를 쳤다.
“하여간에 너희들은 참……!”
여우 같은 정순이는 도시락 반찬도 안 꺼내면서 아까부터 옆에서 지키고 선 게 웃기기 짝이 없었다. 그런 정순이를 향해 순자와 내가 동시에 소리를 쳤다.
“그라모 니는 하루에 이 몇 번 닦는데!”
‘가수나! 지도 한번빼끼 안 닦을 낌시롱 잘난 척은 잘도 한다. 니가 아무리 서울말 씨부리 사봤자, 니나 우리나 우산리 가수나들빼끼 안되거든!’
하여간에 못 말리는 씽냉이들! 단순해서 더 용감한 순자와 나였다.

“니는 도시락 반찬도 좋은께네 앞으로도 종종 부탁한다.”
대놓고 용우의 반찬을 탐내는 나의 한마디에 종종 반찬을 남기는 용우. 어쩌다 하는 우리의 이벤트가 재밌었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가끔은 자기가 먼저 남은 반찬 먹고 가자고 나서는 일까지 생겨 버렸다.
“짜슥! 역시 사람은 길들이기 마련인기라! 니라꼬 별수 있겄나? 우산리에 오모, 우산리 법을 따라야제.”
타고난 도시아이인 용우를 시골스런 아이로 길들여 버린 게 나의 업적인 것만 같아, 그럴 때마다 은근히 기분 좋은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현대물 잔잔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