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스물두 살 진소윤. 아버지의 명으로 나간 선자리에서 만난 김수안은 그녀에게 너무도 큰 남자였다. 만남이 계속되고 결혼에 골인했지만, 여전히 그녀를 어리게만 보는 수안. 시간이 흐르며 소윤은 그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낯선 여자에게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로 불안감에 휩싸이는데…….

“난 그저 만만한 동거인일 뿐인 것 같아요. 나 아니라도 당신은 상관없을 테니까.”
“그렇지 않아.”
소윤은 남편의 손이 자신에게 닿을 듯 말 듯하다가 차마 못 잡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뭔가 말하고 싶어했지만 하질 못했다. 소윤은 사랑했다는, 아니 지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버린 후 돌아서고 싶었지만 지금 이 사람 앞에 생긴 자존심 때문에 다른 말은 다 해도 그 중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당신이란 사람을 난 그동안 모르고 있었어요. 지금 내 앞에 있는 김수안도 내가 아는 사람과 달라요. 마음 없이 자상하고 친절하고 좋은 남편이죠. 그저 고마운 사람이에요, 당신이란 사람은. 난 딴 남자랑 산 거랑 마찬가지예요.”
소윤은 눈물 대신 덤덤하게 말했다.



작가 소개

장해서

로맨스를 많이 좋아하고,
성실하고 나태하며 온유하고 괴팍한 모순된 사람.
피우리넷에서 연재를 함.

▣ 출간작

전남편
몹쓸 사랑
고요 속 외침
차가운 열망
내 인생의 주인(ebook)
중독, 블루




미리 보기

“나한테 할 말 있어요?”
긴 드레스 그림자 자락 끝에 소윤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자 도전적으로 경멸하듯 박지민이 물었다. 술로 인해 얼굴이 붉고 걸음이 무척 불안정하게 흔들리면서도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와인 잔이 들려 있었다.
“당신이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거 아닌가요? 뒤에서 훔쳐보지 말고 앞에서 말해요.”
소윤은 속이 뒤숭숭하고 심장이 팔딱거리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김수안 아내다, 이건가? 어리석은 여자를 보면 불쌍해. 당신이 김수안 아내라고 해서 그 남자가 당신 것은 아니야. 소유권 주장하지 말라고. 불쌍하게 그걸 모르다니……. 아니야. 당신 잘못이 아니지.”
박지민 시선은 소윤에게서 떨어져 허공으로 분산되며 마치 연극 무대에서 독백하는 것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김수안, 그놈 잘못이지. 그 못되고 무정한 놈 때문이야. 그놈의 자식은 마음속에 사람에 대한 애정이 애당초 없는 놈이니까. 그래, 그런 놈이야. 내 잘못이 아니야.”
복도에서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말 전부가 김수안 욕으로 채워졌고, 점점 더 강도가 심해져갔다.
“그만해요.”
소윤은 이 여자에게서 남편의 욕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 누구에게도! 수안에 대한 욕은 자신만 할 수 있다고 소윤의 내부가 소리 없이 외치었다.
“그만하라구요.”
계속 그만하라고 말해도 박지민은 고장 난 녹음기처럼 계속 욕을 해대었다. 소윤의 작은 얼굴이 마구 찡그려져 갔다. 박지민에게서 남편의 이름이 이렇게 손쉽게 나오는 것도 견딜 수가 없는데 욕은 더군다나 마음에 차고 넘치는 분노를 위험하게 건드렸다.
“이제 됐어요.”
그래도 소용이 없자 이성을 잃고 어떻게든 멈추게 하겠다는 생각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짝……하는 소리가 주위에 크게 울리었다.
소윤은 여배우, 박지민을 때린 것을 얼얼한 손바닥과 더 빨개진 그녀의 뺨과 짧은 정적으로 알았다. 복도 끝, 문으로 닫혀 진 계단이 이어지는 작은 공간이라 그들의 모습은 거의 사람들 눈에 노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명한 여배우를 때렸다는 것에 더 놀랐다. 죄의식이 들기도 전에 상대가 소윤의 작은 뺨을 맞받아쳤다. 그 반동으로 눈이 감겨 버렸다. 순간 아프고, 순간 마음이 편했다.
“미안해요.”
이미 맞아놓고 소윤이 붉어진 뺨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내 남자 욕하지 마요.”
“내 남자?”
박지민의 얼굴이 슬퍼졌다. 그녀는 소윤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눈빛엔 잘난 척은 사라졌다. 그저 쓸쓸한 기운만 퍼져갈 뿐이었다.
“그 남자는 누구의 것도 아니야. 그 누구도. 생명이 있는 것들을 마음에 담지 못하는 냉정한 사람이 김수안이니까. 그 사람 사랑하지 마요. 그럼, 나처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