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선보는 건 아까 끝났어.”
“무슨 말이죠?”
“네가 비서를 달고 들어왔을 때부터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고.”
KD그룹 김 회장의 하나뿐인 외손녀이자 보수당 정치인을 아버지로 둔 최고의 신붓감, 강혜준.
하나, 베일에 싸여 있던 혜준의 실체는 가족들의 착취구. KD 김 회장에게 금전적 도움을 얻기 위한 도구로써, 제 의지도 미래도 없이 시들어가는 메마른 화분이었다.
KD그룹 김 회장과의 오랜 인연으로 KD에 영입된 서진혁.
서른두 살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하며 단 한 번도 실패해본 적 없는 그는, 김 회장의 강권으로 강혜준과의 선 자리에 나갔다.
두 번 다시는 그녀를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만나볼까요?”
“글쎄. 내가 두 손 들고 항복할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쫓아다녀보든가.”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은 혜준은, 본디 제 모습을 찾아 싱싱하게 뿌리 내린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진혁을 향한 호감이 멋대로 가지를 뻗어가, 그녀를 밀어내기만 하던 진혁의 마음을 거세게 뒤흔든다.
문득 진혁은 알아차렸다. 혜준의 저에 대한 호감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일 뿐이라는 것을. 그런 그녀에게 저는 이미 온통 흔들리고 농락당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네가 나를 착각 속에 살게 했다면, 나는 그것을 진실로 만들어버리면 그만. 나 때문에 웃고, 나 때문에 울다, 네 눈에서 나를 향한 진심 어린 감정이 출현하는 그 순간을 반드시 보고 싶다.’
한 번도 제 뜻대로 살아본 적 없는 여자.
한 번도 제 뜻대로 안 된 적이 없는 남자.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 두 세상이 충돌하며 하나가 되어가는데…….
2. 작가 소개
서은수
▣ 출간작
공주, 선비를 탐하다
윈터 블루스
고백의 이유
설렘의 기억
3. 차례
#11. 이미 차려진 판
#12. 일루전(illusion)
#13. 길 잃은 귀뚜라미
#14. 마지막 장벽
#15. 그렇게, 너는 나를
#16. 난제
#17. 사라진 그날의 기억
#18. 아픈 첫사랑
#19. 불완전한 연애
#20. 거짓 순정
4. 미리 보기
혜준은 손을 들어 눈물을 훔치고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그랬잖아요. 내가 화도 못 내는 사람이었다고요. 생각도 없고, 의지도 없고, 그냥 남이 하라는 대로만 휘둘리는 사람이었다고요.”
동요하는 눈빛과 진정되지 않은 떨림이 불길한 징조를 몰고 왔다. 늘 그랬듯 좋지 않은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서진혁 씨가 틀렸어요. 난 그것보다 더 형편없었어요.”
혜준은 지금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난…… 친구가 없어요.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한 명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한국에선 학교도 못 다니고, 아는 사람도 없고, 심지어 집에서 동생들하고 편하게 대화한 적도 없었어요.”
“…….”
“어머니는 내가 집에만 있어주길 바랐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인형처럼……. 사람들한텐 백지수표로 불렸고, 권 비서는 저를 은근슬쩍 무시했어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굴욕적인 속사정을 전부 털어놓고 깨끗이 물러나겠다던 예전의 그 약속. 이 와중에 혜준은 미련하게도 제가 했던 그 말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잠도 못 자고, 밥 먹으면 전부 토해내기 일쑤고, 고민을 털어놓을 가까운 지인도 없고. 그런데도 바로잡을 생각조차 못 했어요.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했죠.”
“강혜준.”
“난……, 내가 없어요. 무능하고, 바보 같고.”
“혜준아.”
“미안해요. 그런 주제에 서진혁 씨한테 무리한 부탁을 했어요.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을 거예요.”
각오를 다지듯 혜준은 물기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외골수처럼 성실하게 한길만 파는 데 소질이 있으니 이대로 수긍하면 아마 내일부터 죽어라고 그를 피해 다닐 것이다. 며칠 전 그가 선언했던 관계의 종말과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의미의 마지막.
그런데 어쩌지?
난 네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는데.
진혁은 기가 차고 어이없어 짜증스럽게 비소했다. 애간장을 태우며 쫓아오느라 잠시 잊고 있던,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노여움이 다시금 살아났다.
꺼지라고는 했지만 네가 과거를 털어놓고 돌아서겠다는 말에는 동의한 적이 없었다. 고작 이런 소리나 들으려고, 나를 네 인생의 중요한 존재인 양 느끼게 해놓고 실제로는 한 톨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이나 하려고 죽어라 쫓아온 게 아니었다.
너와 나, 둘 중 하나가 등을 돌려야 한다면 그건 나.
착각에 빠져 있든, 환상에 젖어 있든, 아직도 네 마음을 자각하지 못했다면 그 상태로 머물게 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네가 먼저 시작해 나를 이 꼴로 만들었으니 이 관계가 영원히 끝나게 되는 날, 그것을 선언하는 쪽은 내가 되어야 한다.
구질구질한 패배감에 속이 뒤틀리면서도 진혁은 고집스럽게 혜준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로 촉발되었는지 과거의 상처로 여자는 아파하고 있었다. 쉽게 위로할 수 있거나 치유될 수 있는 상처는 아니었다. 따뜻하고 안락한 곳에서 시간을 들여 천천히 공을 들여야 마땅한 일. 그러므로 진혁은 도움도 되지 않는, 어설프게 위로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당면한 과제부터 신속히 처리하기로 했다.
“예전에 말이야.”
내리뜬 두 눈에 혜준을 담고서 고저 없이 건조한 음성으로 서두를 시작했다.
“잘난 척하면서 바다에서 수영하다가 다리에 쥐가 난 적이 있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을 뻔했는데 회장님께서 구해주셨지.”
“……?”
“주위에서 하도 걱정하시기에 난 남자답게 괜찮다고 말했어. 한국 나이로 갓 스물이 되었을 때라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었거든. 하지만 그날 밤, 침대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펑펑 울다가 박 실장님한테 걸리고 말았지. 내 인생 최대의 수치이자 부끄러운 순간이었어.”
슬픔이 가득했던 혜준의 두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네 옛날이야기가 흥미롭긴 하지만 이 시점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 않느냐는 반문이 섞인 눈빛이었다.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죠?”
“굴욕적인 기억은 누구한테나 있어.”
“그게 그거랑 같나요?”
침통해하던 혜준은 황당함을 드러내며 따지고 들었다. 진혁은 시큰둥해하며 잘라 말했다.
“뭐가 달라. 불행이 꼭 상대적인 것만은 아닌데.”
“서진혁 씨!”
혜준은 기막혀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생기를 잃고 공허함만 띠던 조금 전의 모습보다 저렇게 발끈하는 쪽이 한결 보기에 좋았다. 진혁은 때를 놓치지 않고 냉철하게 몰아붙였다.
“그러니까 좀 더 그럴싸한 이유를 대봐. 겨우 그 정도로 창피해서 날 못 보겠다고 하는 건 너무 가소롭잖아. 혹시 나한테 질려서 그만하고 싶은데 핑곗거리가 없어서 이래?”
“아니에요.”
“아니면 제대로 말해. 대체 뭐가 창피하고 뭐가 굴욕적이라는 거야?”
“다 알아들었으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난 쉽게 한 말이 아니었어요.”
“네가 무슨 말을 했는데?”
진혁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혜준이 했던 말을 제 식대로 요약했다.
“넌 남한테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성격이고,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지 않아 병문안을 와줄 가까운 친구가 없어. 여기서 어떤 점이 그렇게 문제라는 거지?”
“…….”
“물론, 그 소극적인 성격은 좀 고쳐야 할 거야. 성인이 되어 자신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좋은 쪽으로 바꿔가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것을 창피해하거나 굴욕적이라고 여기지 않아.”
그러고는 혜준을 빤히 응시하며 태연히 질문했다.
“타인에게 모진 말을 못 하는 사람과 상대의 그런 점을 알고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사람. 둘 중 어느 쪽이 자신의 행동을 반성해야 할까?”
복잡한 심리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면이 있지만 혜준이 자기혐오에 빠져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그것은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닐뿐더러 어느 정도 효과도 나타냈다. 긍정적인 해석에 넘어간 혜준이 화를 내야 할지 수긍해야 할지 헷갈리는 표정이었으니.
기왕 이리된 거 진혁은 생각할 시간마저 내주지 않기로 했다.
“아니면, 불륜이나 도박, 마약, 절도 같은 일에 관련된 적 있어?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해서 딴소리하고 있는 거야?”
“아니에요.”
“부끄러워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지금이라도 개과천선하도록 도와줄 테니까.”
“아니라고요!”
심각성을 띤 그의 다그침에 혜준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자 진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혜준을 내려다보다가 불쑥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어쩔 수 없네, 그럼. 앞으로도 계속 보는 수밖에.”
씩씩거리던 혜준이 호흡을 멈추었다. 그제야 이상한 점을 눈치챘는지 짙은 선홍색을 띤 눈가가 의문으로 물들었다. 한참을 멍하니 올려다보더니 심란한 얼굴로 캐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널 붙잡고 있잖아.”
“왜요?”
“글쎄. 네 정성이 감동적이었나?”
태평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그가 원하는 건 명확했다.
지금까지 네가 나를 착각 속에 살게 했다면, 나는 그것을 진실로 만들어버리면 그만. 나 때문에 웃고, 나 때문에 울다, 네 눈에서 나를 향한 진심 어린 감정이 출현하는 그 순간을 반드시 보고 싶다. 우리가 헤어져야 한다면 아마도 그다음.
진혁은 분노와 기대가 포함된 눈길로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혜준을 내려다보았다.
“네게 기회를 주고 싶어졌어.”
“화가 풀렸다는 뜻인가요?”
“아니.”
그는 유유히 냉소했다. 착각이 진실로 뒤집히지 않는 이상 이 부분에 관해선 끝까지 화나 있을 예정이다.
“그런데 어째서……?”
“왜. 싫어?”
의아해하는 혜준에게 진혁은 대답을 거부했다. 그래놓고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조용히 기다렸다. 혜준은 그의 돌변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하더니,
“싫다는 뜻이야?”
긴 침묵 끝에 그가 압박을 가하자 재깍 대답했다.
“아니요.”
쫓기듯 대답해버리고 얼굴이 붉어져 그의 시선을 피했다. 거하게 작별을 고해놓고 기회가 주어지니 덥석 수용한 게 민망했는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언뜻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자존심도 내팽개친 모습이라 진혁은 쓴웃음이 번졌다.
저러니 내가 헷갈렸지.
속으로 자조하면서도 열패감에 휩싸여 부글부글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고개를 숙였던 혜준이 울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눈을 들었다.
“그럼……, 다시 카페에 가도 되나요?”
“아니.”
머뭇거리며 건넨 물음에 진혁은 욱해서 대답했다.
그놈의 카페.
거기 들어앉아서 언제 날 사랑할래?
정말이지 신물 나는 장소가 아닐 수 없다. 이번 기회에 그 상가 건물을 사들여 업종을 바꿔서 세나 줘버릴까. 진혁은 진지하게 고민하며 혜준이 빠져나갈 수 없는 촘촘한 올가미도 서둘러 내밀었다.
“만나보자며. 제대로 해야지.”
“그게 무슨 소리죠?”
“그 좁아터진 카페에서 이만 나오라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그의 눈은 형형했다.
혜준이 처음 보는 풍경의 일부처럼 더는 수동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만의 신기한 세상 속에서 작은 점처럼 찍혀 있기도 싫다. 멀리가 아닌 가까이서, 네 마음을 갖지 못했다면 우선은 네 시야 속에서라도 그는 혜준의 중심이 되고 싶다.
진혁은 피가 뜨겁게 끓어올라 강조했다.
“혜준아, 난 너랑 손만 잡고 다닐 생각은 없어.”
혜준은 눈이 동그래져 그를 응시했다.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살짝 벌어져 유혹하듯 그의 시선을 잡아챘다. 여태껏 꽉 깨물고 있었기 때문인지 도톰하게 부풀어 새빨간 꽃잎처럼 유난히 붉고 예뻤다.
거리를 좁힌 진혁은 천천히 손을 뻗어 혜준의 한쪽 얼굴을 매만졌다. 찬 바람 속에서도 눈물 자국이 남은 뺨은 발그레하고 뜨거웠다. 길고 매끈한 엄지로 촉촉한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연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래도 나랑 연애할 수 있겠어?”
“연애요?”
충격으로 물든 그녀가 간신히 입술만 달싹거렸다.
“응. 연애.”
“……하, 할 수 있다면요?”
손바닥을 타고 혜준의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고개가 들려 있어 곧게 뻗은 목선이 고혹적이었다. 무릎에 가지런히 올려 깍지 낀 두 손은 안쓰러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다.
자신을 앞에 두고 긴장하는 혜준을 보는 게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이보다 더한 모습도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뻐근했다.
“해야지, 그럼.”
진혁은 서늘한 미소를 띠고 허리를 굽혔다.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목덜미를 잡아 퇴로를 차단하고 혜준의 말캉한 입술에 제 잇자국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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