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 그들: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천둥벼락 맞은 얼빠진 소리를 하고 있구만!”
“난 누나이고 넌 동생이야. 그러니 까불지 마라!”
“쳇 누나 좋아하고 있다!”
싸가지 없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고등학생, 그런 망아지 같은 고삐리를 리드하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왜냐고? 누나이니까! 그리고 그의 과외 선생이니까! ‘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 그래서 그녀는 참는다!


십 년 후 그들:
“넌 나한테 그냥 상사이고 동생일 뿐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난 네가 편하고 좋아. 그러니까 우리 연애하자!”
십 년 후 그는 여전히 싸가지 없고 건방지다. 자신한테 ‘몹쓸 짓’을 저지른 그를 저주했고 원망했으며 미워했다. 하지만 너무나 우습게도 그녀는 그의 페이스에 멋지게 휘말려 들었다.

“나쁜 놈!”
“내가 나쁜 놈이면 좋겠니?”
“넌 원래 나쁜 놈이야! 싹수머리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놈아!”
“그래, 네 말이 맞아. 나 싸가지 없고 건방져. 그리고 성깔도 고약해! 하지만 그런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그녀로 인해 그는 어른이 되어가고 그로 인해 그녀는 사랑을 깨닫는다. 연상연하의 밀고 당기기 신경전.
과외 샘과 학생에서 연인으로, 그리고 결혼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 거기에 잇따른 버림받은 다른 한 남자의 가슴 아픈 울부짖음, 불행한 혼인을 겪은 상처로 얼룩진 다른 한 여자의 삶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




[본문 중에서]


“너 진짜 한 번도 여자랑 자본 적 없냐?”
왜 그런 엉뚱한 말이 입에서 나왔는지 모른다. 내뱉고 나서 후회했지만, 그렇다고 꺼냈던 말을 도로 삼킬 수는 없었기에 명진은 짐짓 태연한 표정을 띤 얼굴로 건을 쳐다봤다.
“알고 싶니?”
두말하면 잔소리 아닌가? 당연하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명진을 향해 건이 귀를 가까이 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곤 천천히 노래하는 투로 읊조렸다.
“엿 먹어!”
건의 상스러운 욕질에 명진은 어처구니없어 하며 헛, 하고 괴이한 소리를 내더니 항변이라도 하듯 구시렁거렸다.
“이런, 싸가지 없는 짜식! 너는 어쩌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냐?”
“그러니까, 이젠 멍청한 소릴 좀 그만해라!”
내가 뭘, 하는 눈빛으로 명진은 건을 향해 억울함을 마구 호소했다.
“그럼 그런 의심을 받지 않게끔 여자라도 좀 사귀던가? 어른들이 뭐라 하지 않아?”
그렇게 묻는 명진은 내심 심각한 표정인데, 건은 오히려 그가 웃긴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정신 나간 자식! 네 코나 잘 닦아!”
“하여튼 인정머리 없는 자식 같으니. 그래서 여자들이 없는 거야.”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차던 명진은 더는 이런 잡담이 재미가 없는지 슬며시 화제를 바꾸었다.
“근데, 그것 정말이야?”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내지르는 명진의 말에 건은 무슨, 하는 의문의 눈빛으로 뒷말을 다그쳤다.
“디자인 카피 건 말이다. 상대가 YJ이라고 했나?”
“어떻게 생각해? YJ에서 만들어낸 옷에 대해 말야.”
잠깐 생각에 잠긴 듯 명진의 이마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그러곤 한참 후에야 명진이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음, 뭐랄까? 깔끔하고 청순한 듯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느낌 같달까? 주요 고객은 십 대와 이십 대더구먼.”
“그런 옷을 만들어낸 디자이너 말이다. 감각이 뛰어난 인재라고 생각하지 않아?”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서 넌지시 물어보는 건의 눈동자가 빛났다. 건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명진은 그의 질문이 약간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순간 두 눈이 번득이더니 놀란 목소리로 급하게 물었다.
“너, 그럼 혹시……설마……?”
감탄 반 놀라움 반으로 명진의 말이 토막토막 끊어졌다. 그런 명진의 모습에 건이 그게 뭐 대수라는 듯 어깨를 살짝 들어 올리며 싱긋이 웃었다.
“다른 곳에서 채가기 전에 내가 먼저 낚아왔지.”
천방지축 말썽꾸러기, 소문난 싸움꾼, 입만 열었다 하면 욕이 줄줄 나오는 싸가지가 십 년 전 건의 모습이라면 지금의 그는 도저히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능구렁이 같은 엉큼한 녀석이었다. 오죽하면 한때 나, 수석이요, 하고 보란 듯이 뽐냈던 명진마저도 건에 대해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까? 지금의 녀석은 냉철한 지성과 치밀한 판단력, 명쾌한 사고력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절호의 기회를 잡고 고급 인재를 사냥하는 뛰어난 사업가였다. 게다가 잘생기고 몸매 또한 훌륭한 매력남이기까지 하다. 감탄 섞인 표정으로 건에게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던 명진이 은근슬쩍 물었다.
“근데 디자이너가 여자야? 남자야?”
자잘하게 웃던 건이 갑자기 표정을 굳히더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명진을 짜증스레 노려봤다.
“이, 미친 새끼! 여자에 환장했어? 그렇게 여자가 고프면 술집에라도 가던가?”
“세상에 여자 싫어하는 남자가 있을까? 병신이 아닌 이상은 말이지.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아나? 예쁜 꽃들이 많잖아? 그 디자이너 여자 맞지?”
능글능글하게 잘도 웃는 명진의 면상에 주먹이라도 한 대 갈겨 주고 싶은 걸 참으며 건은 대신 앞에 놓인 티슈 통을 집어 명진의 얼굴에 냅다 던졌다.
“아앗…….”
“꼴도 보기 싫으니 얼른 꺼져!”
“쯧, 녀석이. 농담 한마디 한 것 가지고 지랄 떠네.”




[미리보기]


윤주를 쳐다보는 눈빛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종류였다. 남자들은 감탄이 섞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여자들은 ‘너 뭐니?’ 하며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이미 예상했었기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온갖 추접스런 소문만은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다. 제 딴에는 윤주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소곤소곤 귓속말을 한다고 하였음에도 그런 소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윤주의 귀에 전달되었다.
“들었어? 최 사장님이 숨겨 놓은 애인이라면서?”
“어머, 세상에! 진짜?”
“생각해 봐.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면 미쳤다고 이름도 없는 아마추어 회사의 디자이너를 여기로 스카우트하겠니?”
“그러게.”
“어그, 그 강수영 지지배 열나서 펄펄 뛰겠네.”
“앞으로가 더 재미있지 않겠니?”
하아, 뭐? 숨겨 놓은 애인? 허탈한 듯 싸늘한 조소가 섞인 웃음이 윤주의 단정한 입매를 물들였다. 그녀를 둘러싼 온갖 희한한 루머들로 인해 윤주가 한창 수없이 일어나는 자기 안의 짜증을 억누르고 있을 때 때마침 여름 패션 신상 준비에 관한 회의가 잡혔다. 좋은 기회라고 흡족하게 생각하며 그녀는 등을 꼿꼿이 펴고 회의실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갔다.
잠시 뒤 먼저 회의에 참가한 관계자들에게 그녀에 대한 짤막한 소개를 끝낸 건이 막 회의를 진행하려는 찰나 윤주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죄송하지만, 잠시 할 말이 있습니다. 1분만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호기심과 궁금증을 담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윤주는 불편한 기색 없이 입가에 싱긋 미소를 걸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요즘, 이상한 소문들이 떠돌고 있더군요. 워낙 쓸데없는 소문을 그냥 듣고 편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지요. 이 기회를 빌려 잘못된 소문을 바로잡고자 합니다.”
조용하던 회의실이 갑자기 웅성거렸다. 건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 고요한 정적을 뚫고 윤주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건 사장이 숨겨 놓은 애인 아냐? 어떻게 이름도 없는 아마추어 회사의 디자이너가 대기업에 들어올 수 있냐? 헛, 기가 차는군요. 아직 시집도 못 간 노처녀에게 숨겨 놓은 남자가 있다니요? 이러다 내일이면 곧 사생아도 나오겠군요.”
민망하기 그지없는 말들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지만, 정작 말하는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얼굴에 빙긋이 미소까지 매달고 있었다.
“소문이란 그렇습니다. 좋은 소문은 한 사람을 거쳐 한 사람에게 퍼지지만 좋지 않은 소문은 한 사람이 열 사람에게 알린다는 말은 다들 잘 아시죠! 오늘이 내가 최건 사장의 애인이 되고, 내일이면 두 사람 사이에 사생아도 있다는 소문도 돌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더 더럽게 징그럽게 퍼지기 전에 저는 이 소문을 바로잡고자 합니다.”
건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지금껏 윤주에게 머물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건에게로 옮겨지자 윤주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건을 향해 차갑게 물었다.
“최건 사장님, 우리 정말 연인 사이였습니까? 제가 정말 당신이 숨겨 놓은 애인이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