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음! 김지석 씨.”
“음?”
“저, 음…… 김지석 씨, 내 손…… 왜 잡았어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야?”
“음, 음!”
발갛게 달아오른 두 볼을 한 채 혜음은 헛기침만 반복해댔다.
“왜, 라고 생각해?”
“제가 질문했잖아요!”
쑥스러워할 땐 언제고 금방 발끈해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쳐온다. 그게 또 귀여워 지석은 슬쩍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잡고 싶어서.”
“네에? 참 나! 김지석 씨는 잡고 싶으면 아무 손이나 막 잡나 봐요?”
어이없다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쳐다보는 얼굴을 지석은 그의 감정 그대로를 담아 마주했다.
“민혜음 손이라 잡고 싶었고 너라서 놓기 싫었어. 지금 나, 민혜음한테 관심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꼭 이렇게 시끄러운 데서 이런 말해야 하나?”
진지한 목소리에 그야말로 화르륵, 한순간에 얼굴이 불타 버린 듯 뜨거워졌다. 주변에서 쏟아져 나오던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남자 김지석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못마땅한 목소리에 혜음도 절실히 동감했다. 왜 하필 여기로 들어와서 이런 이야길 물은 걸까, 자신을 탓해 봐도 답이 없다. 이미 지나간 시간인 것을!


[미리보기]


햇살이 잔잔히 부서지는 봄날이었다. 봄기운을 받아 푸릇푸릇한 잔디가 싱그러워 보이는 날이었다. 마당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화단에는 노란 황매화와 홍색 모란이 서로 자신의 빛깔을 뽐내고 있었고 화단 맞은편에는 크기가 다른 장독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집 안 곳곳에서 평화로움이 넘쳐나는 따뜻한 날이었다. 그때 낮은 나무 대문을 밀어내고 한 여인이 들어섰다. 공들여서 머리를 만진 티가 확연한 올림머리를 한 여자는 우아한 태도로 방금 들어선 대문을 쓰다듬었다. 낡은 대문을 쓰다듬는 손끝에서 아련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회한이 가득한 여인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서른 중후반이나 되었을까. 그러나 아름답고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녀의 눈가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고 있었다. 여자는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자신의 허리 높이만 한 나무문을 밀어낸 여자는 망설임을 끊어내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제법 넓은 마당을 둘러보는 여자의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슬퍼보였다.
이 대문을 들어서는 것이 꼭 이십일 년 만이었다. 여자는 잠시 뒤로 돌아보았다. 제가 건너온 건물을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이 바르르 떨렸다. 잠비당의 본관이었다. 저곳에 제 작품을 전시해 두기 위해 밤을 지새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건만 그것은 이미 이십 년보다 훨씬 전의 시간이었다. 울컥, 가슴 깊이깊이 묻어 뒀던 슬픔이 갑자기 몰려들어 여인은 화사하게 색칠한 입술을 질끈 베어 물었다.
집주인의 바지런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정원을 둘러보다 정면으로 보이는 낡은 한옥을 바라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기와가 생경하다. 그녀가 결혼을 하던 해, 시어머니는 여기저기 낡은 때를 벗겨내며 낡은 기와도 새로 올렸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집의 기와는 세월의 때가 묻지 않은 새것이었다. 기와를 바라보던 여자는 시선을 내려 활짝 열려 있는 유리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은 집을 보고 있자니 숨겨두었던 두려움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당장 발길을 돌려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겨우 낸 용기가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두려움이 어서 도망을 가라고 충동질을 해댔다. 여자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몇 걸음 뒷걸음질을 치던 여자는 이내 돌아섰다.
‘그래, 이제 와서 우스운 짓이야. 무슨 염치로 이곳을 찾은 건지. 미쳤었던 거야, 내가. 내가 미쳤었어. 돌아가자. 돌아가는 거……!’
“거기, 누구세요?”
자신에게 되뇌며 돌아서는 자신을 합리화하던 여자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여자의 몸은 얼어붙었는지 발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뭐라고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소리 없이 나타난 이방인이 했던 모양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찾아오신 분이신가요?”
뒤에서 들려오는 조심스런 목소리에 여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순숙아!’
오랜만에 들어본다고 동기(同期)의 목소리를 모르겠는가. 이십여 년 세월 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지만 어떻게 잊겠는가. 피를 나눈 자매처럼 그렇게 마음을 나누고 살았던 친구를.
“혹시…… 영, 영미니?”
여자는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참기 위해 손을 들어 입술을 막았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뒷모습만으로도 그녀를 알아봤나 보다. 여자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이내 마주한 이방인의 실체를 확인한 순숙은 신음을 흘렸다. 놀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십일 년 전 미련을 가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떠나갔던 친구가……. 다신 찾아오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매정하게 떠났던 친구의 등장은 폭풍과도 같았다. 곧 몰아닥칠 위기가 피부를 쓸었다. 순숙은 버석거리는 입술을 열어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무겁게 떨어져 내리는 목소리에 그녀의 혼란이 실려 있었다.
“……영미야.”
“그래, 순숙아. 나야, 백영미.”
“어, 어떻게 여길……?”
순숙은 가슴이 떨려와 제대로 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때 떠나면서 다신 찾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갔잖아? 진정한 물음은 이것이었지만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순숙이 굳이 입 밖으로 내서 묻지 않아도 영미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쓸쓸함과 안타까움을 안고 대답했다.
“……올 수밖에 없었어. 그 아이가 눈에 밟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
“이제 와서……, 선생님 아시면 불벼락이 떨어질 거야.”
“각오, 하고 왔어. 무슨 말씀을 하셔도 좋아. 얼굴 한 번만 보고 갈게. 목소리 한 번만 듣고 갈게. 제발…… 순숙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야. 너도 알잖아?”
순숙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 시간을 넘어 다시 만난 친구와의 회포를 풀 여력은 처음부터 없었다. 친구의 존재만으로도 지금 그녀는 벅찼다.
“……어머님은, 어머님을 봬야겠어.”
“지금 오수(午睡) 중이셔.”
“기다릴게. 제발, 부탁이야.”
“영미야, 꼭 이래야겠니? 이제 와서 어쩌자고 여길 찾……!”
“이모!”

현대물 첫사랑 재회물 까칠남 순정남 다정남 소유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