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도, 후궁도 정사를 위해서는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다 생각했습니다.”
이용가치라는 말에 달기의 한쪽 눈썹이 매섭게 올라갔다. 이용이라니? 사람이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정사를 위해서는 가능하단 말인가?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황제의 생각을 뜯어 고치고 싶었다.
“또한, 황제에게 여인이란 독일뿐 연정의 감정은 필요 없다 생각했지요. 헌데…….”
점점 더 하다. 듣고 있자니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제 잘난 황제라 이거야? 달기는 스스로 비워진 자신의 잔을 채웠다. 서초국의 술이 아닌 황제 풍이 즐기는 화국의 술. 바로 독주였다.
“너 때문에 이런 나의 논리가 깨지고 있지. 왜일까? 왜 너는 내 범주를 흔들어 놓는 거지.”
이 양반이 취했나? 지금 자신을 너라고 칭한 황제 풍을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던 달기는 오히려 그의 강한 눈빛에 얼어 버렸다.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이미 알고 있다.’ 라는 뜻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모른다. 달기는 정녕 황제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다.
“취하셨나 봅니다.”
“취했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취해서 취중이었다 그리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정신은 아직도 온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군요.”
금일까지 꼬박 이틀째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처음에는 당당하면서 좀 버릇없는 여인이라 생각했다. 조신함보다 털털한 성격이 황실생활을 감내하기 어려울 것 같아 조금 가르칠 필요가 있겠다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그 모습에 빠져든다. 당당히 검을 들고 가식 없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얼음 같은 마음을 이렇듯 흔들어 놓으니 황제가 가지고 있던 논리는 천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약조한 시일 내에 정표를 받을 수 있겠지요?”
잊을만하면 물어오는 정표 때문에 달기의 머리가 빠르게 얽혀갔다. 지금 자신이 이곳에 왜 있단 말인가. 바로 수놓기를 하다 손가락이 벌집이 될 것 같아 도망 나온 길이었다. 이런 와중에 잘 되어 가냐 묻는 것은 더욱 술병을 기울이게 만들 뿐이었다.
“황상.”
제법 독주를 마신 달기의 발음이 슬슬 꼬이기 시작했다.
“말씀하세요.”
“황……상은 나쁜 놈입니다.”
“!”
“나쁜 놈. 착한 달기를 괴롭히는……나쁜 놈.”
달기가 대뜸 던진 말에 풍은 입 안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쁜 놈이라니……. 감히 황제인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가 세상 또 있을까? 역시 달기는 다른 이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벗어난 그런 여인이었다. 게다가 착한 황녀라는 말은 더욱이 인정할 수 없었다.
“나쁜 놈이라……. 예, 그리 생각하세요. 착한 황녀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아직도 버리지 못했답니다.”
일정한 숨을 내쉬며 잠이 든 달기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풍의 손이 떨렸다. 넓은 이마를 지나 오뚝한 콧날을 타고 인중까지 내려온 풍의 손가락은 선홍빛 입술에서 멈췄다.
“너는 왜 내게 왔고, 나는 왜 너를 내치지 못할까.”
읊조리는 듯한 풍의 말은 가을밤 운치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갖고 싶다. 너의 입술을…….”
이 밤 이들이 나눈 대화는 오로지 풍의 기억 속에만 남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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