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원수의 핏줄!


추악한 왕위 다툼에 가문은 몰락하고 소중한 가족을 잃었다.
오로지 복수하겠다는 일념뿐이었던 연후는 사랑하는 여인, 란아를 만나고 마음을 연다.
행복한 때도 잠시,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란아의 생사도 알 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만다.

미친 듯 찾아헤매던 여인이 원수의 핏줄이 되어 연후의 앞에 나타난다.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게 만드는 정인과의 해후,
연후는 울음을 터트리며 다가오는 란아에게서 매몰차게 돌아서버린다.
“차가운 건 이제 다 싫습니다. 저를 더는 춥게 만들지 마세요.”
란아의 호소에도 연후의 오랜 복수심엔 흔들림이 없는데…….


[본문 중에서]

찬 겨울바람에 실려 온 작은 음성은 지난 몇 달 동안 연후의 꿈속을 지배했던 여인의 것이었다. 용문양이 금빛으로 자수된 스란치마 아래 차분한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이는 어떤 모습이든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수도 없이 기도했던 여인이었다.
곱게 땋아 내렸던 머리칼을 빈틈없이 틀어 올려 찬란한 왕관을 쓰고, 수수했던 옷차림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엄숙하고 화려한 여왕의 정복에 고운 화장으로 꾸민 모습이 몹시도 낯설었다. 하지만 착각이라 지나칠 수 없는 연후의 정인이 분명했다.
윤 수행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장군…….”
연후는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여왕의 행차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윤 수행은 상관과 함께 어서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재빨리 보고했다.
“장군의 명을 받고 그 길로 제원 조가의 종가를 찾았는데…… 여왕의 외가가 되었다며 커다란 잔치가 벌어졌더이다. 무천군 유장의 아내가 제원 조가였고, 둘 사이에 낳은 남매가…… 유란아와 유한이었습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바람에 연후는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어허, 무엄하오!”
어느새 여왕의 행차가 연후와 윤 수행의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이 지긋한 상궁이 나서 여왕의 행차에도 뻣뻣하게 서 있기만 하는 연후와 윤 수행을 꾸짖었다.
“예를 갖추시오!”
연후의 귀는 이미 멀어 있었다. 상궁의 입을 쳐다보았지만,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멍하기는 윤 수행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란아가 여왕 된 사실을 알고 달려왔음에도 여왕을 알아본 제 눈이 의심스러웠다.
살얼음이 뜬 연못을 바라보던 여왕의 시선이 상궁을 지나 막 허리를 굽히는 연후에게서 멎었다. 세상의 의미를 잃은 모양 처연해 보이던 여왕의 표정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여왕과 연후의 눈길이 부딪혔다. 그러나 분노에 휩싸인 연후의 눈동자에 여왕은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멈춰 섰다. 고개를 숙여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여왕은 연후의 모습에서 공포에 가까운 노여움을 보았다. 눈빛으로나마 연후에게 그 없이 지나온 시간들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는 잠시도 허락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여왕의 표정은 몸도 마음도 이 구중궁궐에 갇혀 버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었다. 지금 연후의 기막힌 심정을 알기에 엄청난 분노를 이해하기에 더더욱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정인의 외면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불편한 침묵이 지난 후, 여왕의 행차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연후는 그제야 여왕 유란아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떤 모습이든 살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내 마음에 대한 너의 대답이냐?
애타게 찾아 헤맸던 정인은 빛나던 가문을 몰락시킨 파천대군의 조카이며 형제의 추악한 왕위찬탈 앞에 나라와 백성은 나 몰라라 제 한 몸 지키려 굽실거렸던 무능한 왕족 무천군의 딸이었다. 멸문에 이르고 소중한 가족을 잃게 만들었던 원수의 핏줄이었다.
일평생 하나라 믿었던 사랑이 제거해야만 자신의 오랜 복수가 끝나는, 마지막 목표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널 만났으니 됐다. 애초에 내 바람은 여기까지였다. 더는 네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연후는 분노를 짓씹으며 차갑게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