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ling Harbour.
          Darling you!

사랑을 믿지 않는 그 남자, 그 여자

하지만 사랑은 봄날의 꽃봉우리처럼 순식간에 찾아오고 만다.

마음은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흐르고 모든 걸 뒤흔든다.


이렇게 너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우린 하나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운명을 믿지 않아도 운명이 되고 만다.


당신의 성에 초대합니다.
성 안에 정.



-본문 중에서-


천천히 걸어서 달링하버가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날이 깜깜한 어둠으로 뒤덮여서인지 근처 높다란 건물들은 불빛을 내뿜고 있었고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는 요트들과 항구를 따라 기다랗게 늘어선 노천카페와 음식점들의 북적거림이 채원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항구를 따라 길게 난 길을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불어와 연신 채원의 머리카락이 흩날렸지만 아까 오페라하우스에서 만난 바람처럼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덮고 있기에 그대로 놔두었다. 이래서 연정이 아름답다고 했구나. 이래서 사랑스럽다고 했구나. 정말로 달달한 사랑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채원의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볍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떠한 일을 하든 어떠한 삶을 마주하든 피하지 않고 부딪혀 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이 도시는 그렇게 해도 된다고 채원의 귓가에 쉼 없이 재잘대고 있었다.
그렇게 길을 걷던 채원의 발이 문득 멈춰 섰다. 살랑거리는 호주의 바람이 채원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흘러갔다. 야경의 불빛을 받은 항구의 물결이 잔잔했다. 그 달콤한 향기가 채원의 눈을 멀게 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또다시 환영을 본 것이라 생각했다. 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맞은편에서 역시 시간이 멈춘 듯 걸음을 멈춘 사람을 보며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다. 꿈이 아니다. 환각이 아니다. 마법처럼 이 순간이 믿기지 않았지만 지금 채원은 눈앞의 사람을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람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하염없이 채원을, 그녀의 자태를 보고 있었다. 몇 걸음만 옮기면 닿을 거리에 그녀가 서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들은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 서 있었다. 다시 한 차례 불어오는 달콤한 바람이 그들을 휘감고 지나갔다. 이 고요한 설렘이 천천히 걸어오는 그 사람으로 인해 물들었다.
“찾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간신히 나온 말인 듯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채원은 떨리는 마음과 흔들리는 눈빛을 애써 거두며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채원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 사람은 다시 서서히 팔을 들어 올려 바람에 흩날리는 채원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잘…… 지냈어요?”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가 채원에게 닿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을 일렁이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금 마음에 설렘을 퍼지게 하며 온통 물들게 하였다.
“여긴 어떻게…….”
채원이 간신히 꺼낸 말에 그가 살짝 미소 지었다.
“산책 나온 건데. 아, 시드니는 해외학교 설립할 예정이라……. 지난주부터 출장 와 있어요. 채원 씨야말로 어떻게?”
그의 말에 채원이 그랬구나, 하며 웃었다. 그동안 마주칠 수 있었던 날은 많았다. 그런데 어떻게 떠나기 하루 전인 오늘 이렇게 만날 수 있었을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해도 좋은 걸까. 불빛이 아름답게 비치는 항구의 일렁임이 채원의 마음을 흔들었다.
“난…… 엄마랑 여행 왔어요. 내일 돌아가요.”
“아, 정말? 재밌었겠다.”
그의 말에 채원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묶고 있습니까?”
“타운홀 역에 있는 호텔이요. 윤호 씨는?”
“나도 거기서 멀지 않아요. 하이드 파크 있는 곳.”
채원이 아, 어딘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윤호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어딘지 명칭도 다 알 만큼 시드니가 빠삭한가 봐요?”
채원은 그의 말에 계속 웃음이 나왔다.
“시드니 정말 멋진 도시인 거 같아요. 난 이 도시와 완전 사랑에 빠졌어요. 하루도 쉬지 않고 돌아다녔어요.”
채원의 미소는 보기에 좋았다. 그리고 예뻤다. 다시 에너지를 머금은 싱그러움이 그녀의 얼굴을 돋보이게 하였다. 윤호의 시선이 어정쩡하게 맞잡고 있는 그녀의 손으로 향하였다.
“우연이 세 번이면 운명이라는 말, 믿어요?”
윤호의 나지막한 말에 채원의 가슴이 쉼 없이 떨렸다. 그의 손이 맞잡고 있는 채원의 손을 깨고 한 손을 잡아왔다.
“5년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유치원에서, 그리고 여기 머나먼 땅 시드니에서……. 이렇게 우연으로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말에 다시금 채원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채원 씨가 그랬죠. 인연이라면 만날 것이라고. 당신이 보기엔 어때. 우리가 어떤 사이인 것 같아.”
윤호의 진지한 눈빛을 애써 돌렸다. 채원의 머뭇거림에 윤호는 그녀의 손을 살짝 이끌어 걸었다.
“호텔까지 데려다 줄게요. 아니면 더 산책할래요?”
“아니요. 이제 들어가야지요.”
그의 손에 잡힌 채 걸어가면서도 채원은 지금 여기서 그를 만난 것이 믿기지 않고 꿈만 같았다. 환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윤호는 정말로 여기에 있었다. 꿈처럼 그가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바람이 데려다 준 것인지 마법처럼 그녀의 앞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자 주인을 잃고 뛰는 심장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를 못 본 지 한 달. 그동안 잊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붉어지는 얼굴은 채원의 생각과는 다르게 속수무책으로 변해갔다.

*****

채원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호텔 로비 버튼을 눌렀다. 지금 그를 놓친다면 다신 마주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로 지금 이 순간이 그를 보는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비로 내려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채원은 뛰다시피 걸어 호텔 게이트를 향해 갔다.
벌써 가버렸으면 어쩌지. 그가 없으면 어쩌지. 그를 못 보면 어쩌지.
문 밖으로 나와 윤호의 모습을 바삐 찾았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멈춰 섰다. 윤호는 호텔의 외벽에 기대 서 있다 채원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를 보자 채원의 눈에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윤호도 놀란 듯 하염없이 바라보다 이윽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뛰는 심장은 더욱더 바쁘게 움직였다.
“아직…… 안 갔네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천천히 내뱉는 그녀의 음성을 들으며 윤호의 눈동자가 진해졌다. 그리고 짓는 미소가 너무나 부드러웠다.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너는 왜 나왔어.”
그의 음성도 떨려오고 있었다. 채원은 눈 안에 담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모두 쏟아내었다.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는 다르게 채원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나도 그냥…… 보고 싶어서.”
채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한 힘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안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