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보다 못한 취급에도 그의 앞에선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 가슴에 와 박힌 건 윤의 눈빛이었다.

웅크린 흑색 범을 연상케 하는 오만한 시선과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예기(銳氣).

한 치의 틈도 없는 그 눈 속엔

피부를 찌를 듯한 싸늘함 외의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술과 계집에 빠져 지낸다는 사내의 눈이 이럴 수 있을까.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팔려 가듯 하게 된 혼인이었지만

소문과 다른 그의 모습에 가슴을 조여 오던 불안함이

어느새 조금씩 수그러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두어 식경도 되지 않아 깨어지고 말았다.

첫날 밤, 그것도 초야를 치르지도 않는 신방에

다른 계집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새신랑이라니.

머나먼 왕족의 딸로서 말조차 하지 못하는 벙어리 신부는

그에게 있어 한낱 금수만도 못한 존재였던 것이다…….

▶잠깐 맛보기

의문이 채 풀리기도 전에 이번에는 서아가 자리끼 대접을 치워 놓고는 처음부터 제 자리인 양 그의 옆에 다소곳이 와 앉았다. 윤의 눈썹이 놀라움으로 꿈틀거렸다. 그가 잠이 들었을 때야 얼마든지 다가와 살펴볼 수 있다지만 깨어 있을 때조차 겁 없이 그를 마주 대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신명나게 술판을 벌이고 질펀하게 하룻밤을 난 계집들도 맑은 정신으로는 감히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의 신분이 그러했고 그가 여인네들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했다.

‘혹시 사내의 손을 탄 계집인 것일까? 하여 이리도 담대한 것일까?’

순간 뜻 간 데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도착하기 전인 오전만 해도 그에게 그녀는 없는 존재와 같았다. 하여 마중도 나가지 않았다. 신부가 설령 덤받이를 데리고 온다 하여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그녀에겐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마지못해 혼례는 치른다 하여도 별채에 처박아 두고 평생 발걸음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비인 왕에게 당한 모멸감을 차비로 오는 이에게 보복하는 것이 사내로서 비겁한 짓인 줄은 알지만 그녀는 그에게 있어 그렇듯 하찮은 존재였다. 흥밋거리도 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한데 지금은 아니었다.

해당화처럼 발그레하게 볼을 붉히면서도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계집에게 욕심이 생겼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처럼 투명한 살결에 다른 사내의 손길이 닿고 저 작고 가녀린 몸을 누군가 올라탔다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분노가 일었다.

“벗어.”

윤이 무시무시한 어조로 명했다. 어떤 목적이 있어 차비로 왔건 마지못해 억지로 끌려왔건 그가 알 바 아니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이제부터 그녀가 그의 명령과 처분을 따라야만 하는 제 소유라는 것뿐이었다. 하여 아내로서 존대를 해 주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윤은 부러 하대를 했다.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그가 그녀를 품는다 하여 달라질 것이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사내로서 욕정이 돋아 계집을 안는 것뿐, 다른 뜻이 있을 리 만무했다.

윤의 명령에 그녀가 빤히 눈을 빛내며 그를 보았다. 호기심이 스며 있는 천진난만한 그녀의 시선에 윤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가슴이 뜨끔했다.

그는 입고 있던 포와 저고리를 소리 나게 벗어 던졌다. 제 몸을 불사르며 빛을 밝히는 촛불 너머로 늠름하고 탄탄한 그의 몸이 위용을 자랑하듯 꿈틀거리자 서아가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벗으라 하였다. 그도 싫으면 내가 찢어 주랴?”

▶목차

序~二十二

* 이 전자책은 2011년 타출판사에서 출간된 〈벙어리 신부〉를 eBook으로 제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