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님 ‘덕분에’ 이루는 신분상승 따위 날려버려!

웹 기획자 효령, 꿈에 그리던 프로젝트를 맡게 된 기쁨도 잠시, 클라이언트인 완벽주의자 규진 때문에 눈물로 지새는 밤 연속이다. 하지만 은근히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그. 과연 규진은 백마 탄 왕자님일까요? 효령은 구두를 잃어버린 신데렐라일까요?

2. 작가 소개

여해(呂海)

Wanna Be Storyteller
온라인 필명 네오메이커
밥벌이하느라 바쁜 호모 이코‘노믹’스
틈틈이 글쟁이의 기쁨을 만끽하는 호모 루덴스
충무공 이순신의 자 여해(汝諧)와 유사한 이름이 무척 자랑스러운 호모 코레아‘니우’스
백수가 체질이라 일하고 글 쓰는 틈틈이 놀 궁리만 하는 호모 날‘라리’안
역사와 사회에 관심 많은 호모 폴리티쿠스
가와사키 GTR 1400을 열렬히 짝사랑 중. 구입하는 대로 튜닝해서 사막에 끌고 갈 꿈에 부풀어 있다.

▣ 출간작

신데렐라 예행연습
비혼녀의 연애 USB
호모 메리지쿠스 - 결혼하는 인간

3. 차례

제5장 그녀의 리바운드, 그의 터닝 포인트 - 공은 둥글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법
제6장 벨벳 아줌마 가라사대…… 여자들이여, ‘여성의 가로 본능’을 도발하라!
제7장 사랑과 인생에 ‘빽’ 도는 없다
제8장 히든카드는 없다. 그녀는, 와일드카드다
에필로그

4. 미리 보기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효령은 이 시간에 아무런 연락 없이 집으로 올 사람을 재빨리 떠올려 봤다. 얼마 전 같은 층에 새로 이사 온 사람과 인사를 나눴던 기억이 났다.
‘떡이라도 돌리나 보네.’
못 들은 척하려 했지만 방문자는 집요했다. 집에 있는 거 다 아니까 얼른 문을 열라고 재촉하는 듯 초인종이 계속 울렸다. 벨소리의 강요를 못 이겨 내고 결국 효령은 비실비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폰으로 손에 커다란 종이가방을 들고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손님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그녀는 금세 얼어 버렸다. 당황한 그녀는 팔짱을 끼고 화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때 TV에서 쇼핑 호스트가 크게 외쳤다.
- 5천 원 추가 할인 혜택을 드리는 단 60분의 기회. 놓치지 마시고 지금 바로 전화 주세요.
휴대전화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누가 전화하는 것인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미 인터폰을 통해 규진이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고 있는지 다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효령은 결국 현관문을 살짝 열고 얼굴을 빠끔 내민 채 늦은 밤의 방문자를 쳐다보았다. 한때 호랑당말코 넘버 원, 넘버 제로로 불렸지만 이제는 그렇게 부르기가 아주 민망한 남자가 앞에 서 있었다.
아침에 그녀가 골라 준 감색 스트라이프 슈트는 그대로였지만, 넥타이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데다 늘 목 끝까지 단단히 채워져 있던 와이셔츠 역시 단추 두 개가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사람과 세상에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 같던 차가운 금테 안경도 없었다. 표정마저도 야외 꽃놀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가볍고 홀가분하기 그지없었다.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정작 문제의 장본인을 마주한 순간 효령은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지금 이 시간이 꿈인지 생시인지 제대로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 시간에 여,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여자 입에서 조심스러운 존댓말이 튀어나오자마자 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불만으로 입술이 쀼루퉁하게 나왔다.
사람을 권역별로 알아보는 그녀의 시력이 자기를 모르는 척 내몰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문이 열리는 즉시 반가워하며 화색이 돌 그녀에게 소박하게 가벼운 뿌우우 뽀뽀로 인사를 대신할까 아니면 출근길에 헤어지면서 못다 한 진한 키스로 대신할까 고민했던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못한 채 효령은 눈만 깜빡였다. 머스크 향과 어우러진, 이제는 눈물 나게 반가운 남자의 은은한 체취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아침녘까지 그의 품에 안겨 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녀를 회사 근처까지 바래다준 후 차 안에서 함께 나눴던 달콤한 키스까지도.
마음속에서 뻗어 나오는 열기에, 주인 마음을 좀처럼 몰라주는 얼굴과 귀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 모습에 예고 없이 들이닥친 손님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인을 슬쩍 밀어내고 재빨리 현관에 들어선 후 문을 철컥 잠가 버렸다.
“뭐, 뭐야? 남의 집에 왜 허락도 안 받고 들어오는 건데?”
당황한 효령이 목소리를 높여 항의했다. 하지만 그녀의 반말에 금세 기분이 풀려 버린 규진은 빙긋 웃었다.
“들어가도 돼?”
멋대로 들어와 놓고 들어가도 되냐니. 효령은 그녀만의 주거공간에 강제로 침입한 남자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일자로 굳게 닫힌 입에 힘을 주자 보조개가 기분 나쁘다는 티를 내며 움푹 들어갔다. 아무리 좋게 봐 주려 해도 이것은 의식주를 보장받아야 할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 인권을 침해당한 사례임이 명명백백했다. 하지만 이 문제로 사법부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장난하냐, 미쳤냐, 그런 소리 듣기에 딱 알맞지.’
효령은 실랑이를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무언의 허락에 입이 귀에 걸린 규진이 안으로 들어섰다.
“밥 먹었어? 난 아직인데.”
순간 효령은 화가 치밀었다. 하루 종일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찾아와 하는 말이 고작 밥 타령이라니. 게다가 규진의 말은 가족을 위해 열두 시간 넘게 몸 바쳐 일하고 돌아온 남편이 아내를 향해 시장하니 밥 차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먹었건 말건, 굶어 죽건 말건 내가 무슨 상관이야?”
그녀가 느닷없이 소리를 빽 지르자 규진은 얼굴을 찌푸렸다.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서운함과 섭섭함 때문이었다.
저녁에 단 1분이라도 일찍 퇴근하기 위해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미친 듯이 일했던 그였다. 차를 타자마자 상계동으로 내달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한번 갔다 하면 최소 30분은 헤매고야 마는 곳까지 들러서 왔는데. 그걸 몰라주는 효령이 너무 야속했다.
“왜 그래, 효령아. 왜 그러는데?”
찡그린 남자의 표정을 화내는 것으로 오인한 효령은 얼굴을 확 돌려 버렸다.
‘왜 자기가 성질을 내? 뭘 잘했다고?’
그녀는 자기 분에 못 이겨 혼자 씩씩거렸다. 아직도 남자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여자와 그녀에 대해 아는 것보다 궁금한 것이 더 많지만 세상 사람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지낸 터라 제대로 표현할 방법을 잘 모르는 남자 사이에 침묵이 드리워졌다. 한참 후 효령이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루 종일 연락도 안 주고. 갑자기 대뜸 집에 들이닥쳐선.”
그제야 효령이 왜 심통을 부리는지 알아차린 규진은 마음이 확 풀려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준비해 온 것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등을 돌리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껴안았다.
등에 와 닿는 남자의 온기와 허리를 단단히 감싼 팔 힘에 그녀는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
“놔, 놔. 안 놔?”
효령이 고개를 돌려 소리치려는 순간, 규진의 입술이 살짝 포개졌다 떨어졌다. 반항하던 그녀의 몸짓이 거짓말처럼 멈춰 버렸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여자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되풀이하며 여자의 삐친 마음을 풀어 주려 애썼다. 감질나는 키스가 이어지자 그녀의 얼굴에 불만이 어렸다.
“누구 약 올려?”
퉁명스러운 여자의 말에 규진은 또 한 번 이마를 찌푸렸다. 자기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여자를 달래 주고 싶은 마음에 급박하게 기획한 작전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스스로의 역량 부족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효령의 다음 말이 떨어졌다.
“하려면 제대로 하든가. 뭐야, 이게. 장난해?”
계속 더 두고 보거나 기다릴 상황이 아니었다. 규진은 여자를 돌려세운 후 있는 힘을 다해 껴안았다. 맥동하는 여자의 보드라운 입술을 향해 질주했다.
- 어머, 이를 어째? 혀에 닿기만 했는데 그냥…… 아주 그냥 사르르 녹아 버렸어요.
TV에서 쇼핑 호스트가 감격한 어조로 외쳤다. 또 다른 쇼핑 호스트가 외쳤다.
- 그렇죠?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입니다.
그 소리는 두 남녀의 귀에 단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당장 주문하지 않으면 하늘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불고기의 맛과 저렴한 가격을 주장하는 두 여자의 외침을 무시한 채 효령과 규진은 키스에만 열중했다. 깊게 포개진 입술 너머로 반환점을 돈 마라토너처럼 가쁜 숨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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