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횡액막이. 나쁜 기운을 대신 받아주는 사람. 내가 너 대신 아파 죽을 거야. 흐흥. 신나. 진짜 총각귀신이 될 수 있어. 다 그쪽 덕분이야. 고맙다고. 흐흥.”

피습을 당해 몸을 숨길 곳을 찾는 세자 순, 제 목숨을 노리는 자들을 경계하며 순이 숨어든 곳은 귀신이 나온다는 외딴 폐가였다. 순은 폐가에서 자신을 총각귀신이라 칭하는 기묘한 아이, 장을 만나고 환궁하기 전까지 장의 폐가에서 목숨을 부지한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신세의 세자 순은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중전의 음모에 빠져 위기에 처하고, 장은 순을 돕기 위해 기꺼이 입궐한다. 세상 의지할 곳 없는 두 사람은 어느새 세상 누구보다도 서로를 의지하기 시작하는데……. 

“혼인식도 하고 놀러도 다니고. 내가 죽은 줄 알고 중전도 더는 나를 쫓지 않을 테니. 그리고 너 따위야 없어진들 뭐, 굳이 찾겠어? 한낱 횡액막이 따위.”

“한낱?”

“그래. 한낱.”

“…….”

“아주 아무것도 아닌 한낱.”

“다른 이들은 그냥 너를 한낱,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았으면 싶다. 아무도 마음에 담지 않기를 바라.”

2. 작가 소개

예요

http://blog.naver.com/merubi

▣ 출간작

변장 도령

천일야화 박하나 편

천일야화 이두나 편

환장 도령

3. 차례

#1. 으스스 밤나무골

#2. 폐가의 총각귀신

#3. 탈출

#4. 같은 처지

#5. 세자의 장례

4. 미리 보기

밤이 되자 함원전의 전각문이 모두 잠겼다. 사람들은 물러간 모양이다. 장이가 도둑고양이처럼 깨어 잠긴 방문을 끄덕거려 본다. 소리만 달깍거릴 뿐 문은 단단히 잠겨 있다.

‘문이 열리지 않아.’

장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순을 돌아다본다. 그러자 그는 무슨 방도가 있는 얼굴로 장이가 있는 문의 반대편 창으로 다가가 그 창문을 손으로 열었다. 장이는 놀란다. 혹, 다른 창도 열리는가 싶어 문마다 밀어대 보는데 다른 곳은 다 잠겼다. 분명히 잠겼다. 센 힘으로 밀어도 꿈쩍하지를 않는데 어찌 저것만 열리는가, 의아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데 순이 그런 것은 알 것 없다는 표정으로 장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고민일랑은 접어두고 놀러나 나가자, 그가 창을 넘어 방을 벗어난다. 그에게 이끌려 장이도 창을 넘었다. 복도로 나온 둘은 아무도 없는 함원전 뒷마루를 걸어 전각에서 발을 내린다. 신발은 없으니 맨발로. 버선을 신은 그 헛헛한 발걸음으로 마당을 내려선다. 뒤쪽 정원이 깔끔하다.

아무도 없는 달밤에 단둘이서만 함원전 뒤편 화계에 나와 섰다. 아름다운 궁궐의 정원, 그곳을 올려다보며 장이가 후우! 감탄을 한다. 전각 뒤편의 정원은 자리가 넓지 않았다. 그래서 좁은 공간을 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계단처럼 화단을 만들어놓았다. 층층으로 높이 지은 계단마다 아름다운 나무와 꽃들이 자란다. 그걸 목을 빼 바라보며 장이는 만족한다. 안에만 있었더니 좀이 쑤실 지경이다. 감옥이 따로 없었는데 이제야 숨이 좀 트인다. 많이.

“꽃이요.”

폐가에서는 꽃을 가꿀 수 없었다. 귀신이 나온다는 집을 꽃밭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눈앞에 살랑대는 긴 꽃대의 노란 꽃을 보고 장이가 손짓한다. 순은 당장에 그걸 몇 가닥 꺾어 장이 손에 쥐여줬다. 아름다운 꽃송이를 들고 장이가 환하게 웃는다.

“여인이 틀림없구나.”

순이 놀리듯 속삭인다. 장이는 그의 옆구리를 퍽 쳤다. 으으윽, 과한 소리를 내며 고꾸라진 순을 장이가 모르는 척 그냥 둔다. 혼자 하기 머쓱해진 순이 이내 허리를 폈다. 다시 제대로 서서는 장이의 등을 감싸 안고 화계를 바라본다.

이것은 둘만의 산책이다. 달밤의 신선한 산책. 좁은 뒷마당을 거닐다가 둘은 어느쯤에서 멈춰 섰다. 더는 갈 곳도 없는 함원전의 뒷마당에서 둘은 서로를 마주 본다. 달빛에 비쳐 보이는 것은 오직 서로의 모습뿐.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벅차올랐다. 그걸 먼저 말로 뱉은 것은 순이다.

“역시 밤귀신…….”

그는 장이 손에 들린 노란 꽃을 빼 들어 녀석의 머리에 꽂았다. 상투를 튼 검은 머리를 땅으로 노란 꽃이 자란다.

“밤에 보니 더…….”

뭐가 좋은지 장이는 푸흐흐, 웃는다. 이 웃음을, 이 해맑은 웃음을 지켜주고 싶다, 생각이 들었지만 제겐 힘이 없다. 그런 서글픈 마음들이 순을 괴롭힌다. 고작 병자 행세나 하며 목숨을 연명하는 제게 장이와 함께할 미래 같은 게 있을 수 있나. 바보 같은 물음이다. 그럼에도 순은 장이를 안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턱, 아이를 잡아끌어 또 자신의 품에 가둔다. 이리 심장을 맞대고 있어야 숨이 쉬어지니. 아직 죽지 않았구나, 안심이 되느니. 순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말했다.

“우리가 어쩌다 이리되었누.”

“…….”

함원전의 화계는 아름다웠지만 지금 자신들의 처지는 그렇지 못하다. 장이는 손에 들린 노란 꽃들을 바닥에 그냥 놓았다. 손에서 빠져나간 꽃들이 두 사람의 발치 아래 머문다. 괜히 꽃을 꺾었다. 그냥 자라게 둘걸. 괜히…….

“어리석은 짓이었다.”

“…….”

두 사람이 서 있는 이곳에서 바로 보이는 문 하나를 두고 바로 저쪽이 중전의 침소인 교태전이다. 그리 지척이다. 위험이 이리 가까이 있는데 둘은 세월 좋게 끌어안고 정을 나눈다. 사랑놀음이 목숨보다 중하더냐. 순은 품을 파고드는 장이를 억지로 떼어냈다. 훨씬 단단해진 순의 얼굴에 장이가 잠깐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뭔가가 서늘해. 그리 생각하고 있는 사이 순은 장이를 화원 계단으로 밀어 올린다. 깜짝 놀라 장이가 싫다 한다. 하지만 죽밖에 못 먹은 사람이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단숨에 와락, 장이를 원하는 곳으로 이끌었다. 그는 버티는 장이를 끌고 화계 담벼락 앞까지 순식간에 몸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장이를 그 담벼락으로 밀어 올리려 한다. 장이는 진짜 정말로 온 힘을 다해 버텼다. 죽을 듯 힘을 써두고 순을 다그친다.

“왜에!”

“가, 가라고.”

순은 침착했다. 그가 그러면 그럴수록 장이는 흥분했다. 알겠다. 뭔지 다 알겠는데 싫다! 장이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비명횡사가 목표이냐? 개죽음이 바람이야?”

그는 소리쳤다. 야심한 시각이지만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 지척이 교태전이다. 거기서 누군가 소리를 듣고 뛰쳐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았던 화가 폭발해 그는 무섭게 성을 냈다. 그의 바뀐 모습에 장이가 울먹거린다. 서럽다. 지난 동안 얼마나 달달하게 저를 대했는지 모른다. 눈만 마주치면 입을 대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횡액막이가 아니더라도 일이 끝나면 저들은 널 살려두지 않아!”

“알아! 안다고! 그래도 안 가. 안 간다고!”

“담장 너머 진이가 기다리고 있다. 너를 받아줄 것이야. 저쪽은 아미산이다. 그 길로 도망쳐!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으응, 싫어!”

“이 바보!”

짝, 싫다고 매달리는 장이의 뺨을 내려쳤다. 말로 해서 안 통할 듯하여 순은 마음먹고 세게 때렸다. 그 뺨을 후려쳐 놓고 순이 눈동자를 파르르 떤다. 맞은 볼을 붙잡고 장이가 울음을 터트린다. 머리에 꽂힌 노란 꽃이 힘없이 떨어져버렸다.

“에잇!”

순은 또 손을 쳐들었다. 두들겨 패서라도 담장에 올려 보내고 말 테다. 그의 결심이 확고하다. 매일 난다 긴다 하는 무녀들이 들어 주술을 외운다. 온갖 나쁜 것들을 장이의 몸에 붙이려 술수를 부린다. 유학자로서 자란 순은 그런 것은 믿지 않지만 그래도 두려웠다. 바늘구멍만큼은 두려웠다. 바늘구멍만큼, 모래알만큼, 그게 먹히면 어째. 장이에게 횡액이 들러붙어 아프거나 죽어버린다면. 그러면 어째. 바늘구멍만큼, 모래알만큼의 가능성. 그게 싫다. 이미 이 여인을 사랑해버리고 말았으니. 순은 두 번째 팔을 휘둘렀다. 이 아이가 얼마나 쇠고집인지는 알고 있다. 아주 독하고 미련하고 특이하고 지랄 같고.

“은애해!”

“…….”

와락, 매를 맞기 싫어서인지, 눈치 빠른 장이가 순을 한 번에 안아왔다. 그의 몸통을 붙들고 계속 은애한다, 중얼거렸다. 순은 그대로 정지했다. 머릿속이 멈춰버렸다. 제가 생각했던 것을 저쪽의 입을 통해 먼저 들었다. 은애하누나, 그런 말. 제가 해보고 싶었던 말.

“장아…….”

“은애해. 은애하니까 나버리지 마. 나 안 가. 안 갈래. 안 가다고. 은애해. 은애…….”

“…….”

순은 쳐들었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 툭툭, 뺨을 때렸다. 장이가 놀라 고개를 쳐든다. 눈물이 흥건히 흐른 얼굴로 순을 바라본다. 그는 자신의 볼을 스스로 때리고 있었다. 찰싹, 찰싹, 아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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