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제목.
♥ 파란색, 하얀색, 그리고 맑은 하늘색.
♡ 남자 & 여자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남자의 별명은 청설모이고 여자의 별명은 애꿎게 무였다.
왜냐고?
남자는 대학 선배의 부친장례식장에 참석한 검정 정장 차림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고수머리 옆머리를 헤어스프레이로 바싹 붙여 머리카락을 위로 치솟게 한 그를 본 대학 동창의 일침!
“뭐야? 비 맞은 청설모야?”
동시에 동기들이 그곳이 장례식장임을 잊고 폭소로 뒤집어졌다.
그 후 그의 별명은 청설모가 됐고 그는 동기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여전히 재미의 소일거리가 됐다.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고집이 세며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나 자기주장을 하며 심지어 부모 친척 친구에게까지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되면 물러서지 않고 상대방의 진을 있는 대로 빼어놓는 그런 성격의 남자였다.
반면 여자의 별명은 무(無)이었다.
무라 하면 밭에서 쑥쑥 뽑아낸 무라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녀의 별명은 좀 더 깊은 철학적 요소가 숨어 있는데 그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그녀의 별명은 없을 무(無)였다.
무(無)!
좀 더 설명하면 그녀는 언제나 안개처럼 조용하게 물을 머금고 소리 없이 촉촉이 사방을 적신다고 하여 지어준 자칭 철학자였던 당시 대학 철학과 3학년이던 외삼촌이 그녀보다 열세 살 위인 초등학교 3년 때 지어준 별명이었다.
그녀에게 집안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움직이며 존재감을 마치 안개비처럼 촉촉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인다며 틀림없이 특별한 아이가 될 것이라며 지어준 별명이 무(無)이었었다.
물론 무라는 거창한 별명을 지어준 외삼촌은 정작 자기는 현재 경기도 외진 곳에서 역술인으로 카드로 점을 쳐주며 존재감 없이 살고 있지만 말이다.
여자의 성격은 꼭 이랬다.
회사에서는 한없이 편안했고 또한 어디에서나 쓰임이 있는 그런 존재였다.
특별히 존재감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언제나 결정적으로 가장 필요할 때는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냈다.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고 무난했으며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여자였다.
그러다 보니 회사의 궂은일은 모두 여자의 목이었지만 여자는 불평 한번 없이 처리했으며 그러고도 항상 편하게 웃는 그런 그녀이었다.
지금부터 그런 청설모와 무(無)의 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을 두 남녀가 어쩌다 보니 어찌어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가감 없이 말이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이런 이야기일수록 엔딩이 즐거워야 한다는 것이다.
눈물 찔끔, 콧물 찔끔을 기대했던 사람은 지금부터 아예 이 이야기에서 빠지라는 것이다.
원래 인생은 행복하게 살며 한 번쯤은 아름다운 사랑을 해야 하니까 말이다.
♡ 눈 내리는 흐린 하늘에 점 찍기.
여진호!
이것이 남자의 이름이고 나이는 올해 31세이다.
먼저 남자의 내력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출생 신분부터 밝혀야겠다.
남자는 요즘 툭하면 TV 드라마 소재거리가 되는 재벌가의 막내이다.
소위 말하는 강남의 귀공자 클럽에 들어갈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그런 집안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냉철한 성격에 사리 분별이 확실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똑소리 나게 처리하는 정확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다만 인간미가 조금 빠진다는 것이 다른 재벌가의 사람들과 비슷하다고나 할 정도였고 특히 특급 호텔 6개와 대형 백화점과 쇼핑몰 12개, 그리고 전국의 유명 관광지마다 콘도를 보유하고 있는 유니콘 그룹이 그의 집안이었다.
물론 유니콘 그룹은 아버지인 여공구 회장이 그의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아 평생을 경영한 그분의 소유였고 지금은 위로 두 형 중 큰형이 유니콘 그룹의 호텔과 백화점 대표를 각기 맡고 있고 둘째 형이 콘도와 건설 회사를 맡고 있었다.
진호는 두 형과 차이점이 나이가 현격히 차이가 크게 난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아버지 여공구 회장 탓이었다.
주책없이 50을 넘어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여진호를 막내로 낳았다.
사실 쪽팔리는 일이지만 그가 세상에 태어난 날에 두 형은 이미 성인이 되어 있었고 더구나 큰형은 장가를 들어서 형수가 이미 뱃속에 임신 5개월로 조카를 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태어난 지 정확히 5개월 후 나이는 같고 생년월일만 6개월 느린 조카 여성민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고 큰형이나 형수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주책스럽게 나이 육십에 발동이 걸린 아버지를 원망할 수밖에.
그의 인생에서 첫 아픔은 어머니가 두 살 때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노산에 자궁암까지 생김으로 병원에서는 진호를 낳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으나 어머니는 끝까지 진호를 포기하지 않은 여파로 결국 54세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저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진호로서는 어머니의 생전이 기억나지 않은 두고두고 가슴 아픈 슬픈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러나 늦둥이로 태어난 여진호는 그야말로 집안의 금지옥엽이었다.
매사에 사리가 분명한 아버지 여회장이었지만 늦둥이 여진호에게는 맥을 추지 못할 정도로 맹목적인 사랑을 주기만 했다.
두 형 역시 여진호를 대하는 것이 마치 아들을 대하듯 했다.
특히 큰형인 여진철은 아들과 같은 나이의 여진호를 대하는 것이 마치 동생보다는 아들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더구나 그의 처지에서는 여진호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자신의 처인 형수의 젖을 먹고 자란 막냇동생이었다.
그러다 보니 진호는 집안에서는 불면 꺼질지 싶어 좌불안석하는 그런 존재였고 특히 직장에서도 자기 고집이 센 독불장군이었다.
미국 보스턴의 대형 설계사의 실무 팀장이긴 하지만 그는 여느 재벌가의 자식과는 매우 달랐다.
우선 쓸데없는 허례허식이나 사치는 몰랐고 함부로 상대를 무시하거나 험담하는 것을 극히 싫어했다.
사람과 잘 사귀지만 한번 고집을 피우면 끝까지 지지 않는 옹고집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딱히 단점이라 할 수 없었다.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유학을 마친 그는 나름대로 미국의 세계적인 건설 회사에 몸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불쑥 걸려온 팔순의 아버지 여공구 회장의 전화 한 통에 속아 잠시 귀국했다가 꼼짝 없이 유니콘 그룹의 기획 이사로 발령을 받게 된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토목건축을 전공한 그는 그동안 유니콘 그룹에 입사하는 것을 마다해 왔는데 연로하신 아버지 여 회장이 반공갈 협박에 못 이겨 결국은 귀국해 유니콘 그룹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그가 그동안 유니콘 그룹에 입사하는 것을 꺼린 것이 바로 그룹의 총괄기획 이사인 조카 여성민 때문이었다.
그룹의 다음 후계자로 여성민을 확고하게 새워야 한다는 일념에서였다.
그룹 후계자는 엄연히 맏조카인 성민이여야 하고 서기에는 절대로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이 진호의 생각이었다.
화지만 그와는 달리 아버지 여 회장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 문제였다.
조카가 삼촌보다 우위일 수는 없다는 것이 여 회장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면 나이가 같은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껄끄러운 사이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진호는 떨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조카인 성민을 사랑했기에 형제처럼 자라온 그들 사이에 쓸데없이 앙금이 생길까 두려워했다.
거기에는 유난히 자기 고집이 심했고 일에 대한 욕심 역시 남달랐던 성민에 대한 배려가 숨겨져 있었다.
그래서 진호는 귀국을 꺼렸어도 여 회장의 주치의와 짜고 그에게 귀국시키기 위해 술수를 자행한 아버지 여 회장에게는 당할 도리가 없었다.
여 회장에게 사주받은 주치의가 여 회장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공갈로 그를 사주하여 그를 끝내 강제로 귀국시키고야 만 것이다.
그래서 진호는 그야말로 본의 아니게 잘나가던 건설 회사를 그만두고 유니콘 그룹으로 입사하게 된 것이고 생명이 위태롭다던 여 회장은 여유롭게 골프채를 휘두르며 여전히 곱창전골에 두 병의 소주를 비워댔다.
주치의가 그토록 말리는 쿠바산 시가를 입에 물고 말이다.
진호는 쪽 팔린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구겨진 얼굴을 펴지 않은 채 애꿎게 어머니 같은 형수에게 투정만 부리고 있었다.
자신이 낳은 아들보다 시동생을 더 사랑하여 젖 먹이기를 마다하지 않고 키운 형수에게 말이다.
“형수! 도대체 어떻게 이래요? 어떻게 아버지가 다 죽어 간다며 아들을 속일 수 있어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호호! 안 되지요.”
“형수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어떻게 다른 것 아닌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쳐요? 내가 얼마나 황당는지 알아요? 비행기에서 줄곧 울면서 왔었는데 병실에 들어서니 글쎄 아버지가 시가 담배를 물고 골프 배팅 연습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는 저 보고 한 첫마디가 뭔지 아세요? 비행기에서 밥 먹었냐? 내 참 기가 막혀서! 사람 간 조이게 하고선 밥 먹었냐가 뭐에요? 안 그래요?”
진호는 마치 엄마에게 조는 아이처럼 형수에게 어리광하고 있었다.
형수인 김현숙은 잔잔히 웃으며 그 어리광을 받아주고 있었다.
박채연!
이것은 여자의 이름이고 올해 29세이다.
그녀가 세 살 때 부모가 한날한시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버려 그녀는 졸지에 할머니에게서 컸다.
그래서 그일 이후 그녀는 말이 없는 성격이 됐다.
특별히 잘 나서지도 않았고 또한 누구를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29세의 그녀는 아직 옛날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할머니께서 여자 나이 삼십이 되기 전에 시집을 가야 한다며 안달을 내며 주변에 조금만 인연이 있어도 그녀의 프로필을 건네며 중신들 서라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녀 역시 처음에는 할머니의 뜻대로 적당한 사람이 나타나면 두말하지 않고 시집을 가려고 이미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남자는커녕 동네 수캐조차도 얼씬하지 않는 것이다.
님을 봐야 뽕을 따지!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에겐 그 흔한 중매조차도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지지리도 운이 없는 건지 여자 나이 30이 다 되도록 연애다운 연애 한 번 못 해봤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녀는 지금까지 누구와도 단 한 번의 연애도 안 해봤다.
아니 연애가 아니라 남자와 손목 한 번도 잡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그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인물이 빠지면 그래서라고 하겠지만 그녀는 기준보다는 썩 예쁜 얼굴인 것은 분명했다.
적당히 수수했고 키 역시 165cm정도면 그리 나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누구도 그녀에게 접근해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임을 봐야 뽕을 딴다고 누군가가 돌진해 와야 뽕을 따든 뿌리를 뽑아 버리든지 할 것인데 처음부터 꽉 막혀버리니 그녀로서도 별수가 없었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응시한 회사가 바로 유니콘 그룹이었다.
대학 전공이 경영학이었던 그녀는 처음 입사 때에는 그룹 기획실에 근무했었고 다음 해에 발령된 곳은 그녀는 전공과는 달리 임원 부속실로 발령이 났다.
한마디로 임원 부속실은 그룹 임원비서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임원실로 배정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차분하고 조용한 그녀 성격대로 임원 부속실에는 금세 적응하여 곧 업무에 차질 없이 적응하게 됐다.
그저 임원들에게 커피나 나르는 비서가 아니라 회의 자료를 규합하여 임원들의 스케줄을 미리 짜서 시간을 맞추고 또한 전문적인 업무를 분석하여 임원들의 업무에 보탬이 되도록 했다.
솔직히 말하면 임원이라는 작자들은 하나같지는 않지마는 가끔 도가 지나치게 농담하거나 추파를 던지는 작자가 없진 않았지만 솔직히 지금처럼 취직하기 힘들 때 괜한 객기를 부려 퇴사되면 자신만 손해라는 얄팍한 속셈에 참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매달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고 복지 혜택 일환으로 호텔 피트니스센터 사용까지 공짜기 때문이다.
임원 부속실에서의 그녀의 역할은 한마디로 땡이었다.
경영 전문가로서 경영의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할 때는 임원들은 항상 그녀를 배제하지 않았고 간단한 서류 정리나 임원들 약속 스케줄과 같은 일은 다른 비서들이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부속실 안에서도 자연히 그녀는 경영관리 전문인으로 취급되어 경영실적 자료나 세금 등 머리 아픈 자료들은 모두 그녀 목이 되었다.
몸이 아파 하루 정도 결근을 하려 해도 임원들은 그녀가 없다는 것은 두고 보지 못하고 찾아댔다.
그만큼 그녀의 존재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자신도 모르게 부속실의 유명인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회사에서 모두에게 평범치 않은 여자가 되었다.
특별하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일을 시키기도 부담스러운 그야말로 그녀는 독보적인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마디도 일에 대한 불평이 없었다.
임원들이 늦은 시간까지 회의에 참석시켜도 항상 웃는 얼굴이었고 얼굴을 찌푸리거나 싫은 내 나타내는 그녀는 무였다.
안개 낀 비 오는 날! 없을 무(無)!
♡
채연은 오늘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시계의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났다.
항상 변함없는 그녀는 일상처럼 부스스 눈을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18평의 작은 아파트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어서인지 그녀의 움직임은 항시 가장 먼저 할머니에게 포착이 되곤 했다.
주방에서 아침상을 준비하고 있던 할머니가 부지런히 화장실로 향하는 채연에게 볼멘소리했다.
“꼴 하고는! 계집애가 잠자리에서도 곱게 몸단장하고 자야지 머리는 산발해서 그 꼴이 뭐냐?”
그러나 채연은 항시 듣는 할머니의 잔소리를 무시하고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먼저 변기에 걸터앉아 밤새 채워두었던 배설물을 쏟아냈다.
벽에 걸린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본 채연은 배시시 웃음 지었다.
머리는 하늘로 치솟아 있었고 눈꺼풀에는 아직 눈곱이 끼어 그녀 자신이 봐도 보기가 흉했다.
어제 늦게 끝난 임원 회의 탓에 대충 얼굴을 닦고 죽음처럼 잠든 탓이었다.
대충 볼일을 보고 그녀는 잠옷 바지를 치켜올리고는 세면대에서 세수부터 했다.
아직 출근 시간에 여유가 있어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화장실에서 나왔다.
할머니가 벌써 식탁에 아침밥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와! 맛있겠다. 북엇국이네!”
채연은 입맛을 다시며 식탁에 앉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입을 삐죽이며 한 소리를 해댔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고 있을 거야? 한 달 후면 벌써 나이가 삼십이야. 이것아!”
그러나 채연은 할머니 말을 뒷전으로 하고 수저를 들고 북엇국을 휘젓고 있었다.
매일 듣는 말에 이골이 난 표정이었다.
할머니가 한숨을 쉬며 채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휴! 할미 나이가 벌써 팔순을 바라보고 있어. 네가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편하게 사는 것을 봐야 곱게 눈을 감을 수 있지 않겠니? 제발 이 할미 소원 좀 풀어줄 수 없겠니?”
채연이 국에 밥을 말아 입으로 퍼 넣고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시집을 혼자가? 상대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저 눈 코 입만 바로 박힌 놈이면 아무나 데리고 오란 말이야. 어떻게 된 년이 새내 놈 하나 꼬시지 못하는 거야?”
“픽!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돼? 아무리 냄새를 피워도 파리가 꼬이지 않는데 어떻게 해?”
채연이 아무렇지 않는 표정으로 밥을 퍼 넣으며 말했다.
할머니 눈초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리곤 곧 측은한 표정으로 창밖을 봤다.
“어유! 밖은 저렇게 온통 눈으로 덮여 있는데 저런 눈 오는 거리를 팔짱 끼고 돌아다닐 상대도 한 명 없다니! 쯧쯧!”
채연의 눈이 그제야 창밖으로 향했다.
“꺅! 정말 눈 오네! 세상에! 몰랐네!”
채연이 밥숟가락을 내던지고 창가로 달려갔다.
밖은 밤새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얀 눈 세상이 되어 있었다.
“와! 첫눈 치곤 많이도 왔네! 멋지다!”
할머니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미친년! 남들은 이런 날이면 쌍쌍이 데이트를 잡느라 정신없을 텐데 혼자 포켓에 손 넣고 다리 조아리며 걸을 것을 뭐가 그리 멋지냐? 그러니까 할미 말 좀 들어! 당장 결혼 상담손지 소개소 인지에다가 등록하자니까! 그러면 거기서 자기들이 알아서 너에게 딱 맞는 신랑감을 구해준다지 않니? 응?”
“글쎄 거긴 안 된다니까? 거기는 사람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무조건 짝을 이뤄지게 하는 것이 목표란 말이야. 그런 곳에서 소개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어?”
채연이 다시 식탁에 앉아 바쁘게 수저을 놀리며 말했다.
“뭐야? 이년아! 지금 네가 찬밥 더운밥을 가리게 됐어? 아무튼 네가 뭐라고 하던 오늘 결혼상담소에 등록할 거야. 그렇게 알아!”
할머니가 발끈해서 소리는 냅다 질렀다.
그러나 채연은 태평스럽게 밥그릇을 뚝딱 비우고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걱정하지 마. 할머니는 내가 보기엔 백 살도 넘어 살 거야.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들딸 많이 나을 테니 걱정하지 마! 히힛!”
채연이 할머니 등 뒤로 돌아가 가볍게 할머니를 껴안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금세 얼굴이 풀렸다.
“미친년! 저 좋아지라고 말하면 꼭 딴말하고 그래?”
할머니의 핀잔일 뒤로 하고 채연은 얼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의 긴 한숨이 그녀의 방까지 들렸다.
채연은 죄스러워 공연히 덜거덕거리며 화장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죄스럽고 미안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할머니에게는 그녀가 세상 전부였다.
채연은 서둘러 화장을 끝내고 부지런히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가 눈길 위를 걷고 싶어서였다.
아직도 뚱한 할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그녀는 아파트를 나왔다.
온통 하얀 눈이 덮인 아파트 광장을 그녀는 뽀드득 소리를 내며 걸어봤다.
발끝에서 전해지는 야릇한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광장을 가로질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시계를 보니 아직도 출근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길 위에는 차량이 엉금엉금 기며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랜만에 정말 상쾌하게 여유를 부리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남들처럼 종종 걸음을 하며 서두르는 것은 지금의 그녀로선 허용할 수 없었다.
큰길에는 이미 염화칼슘을 뿌려 눈이 질퍽한 진흙탕이 되어 있었으나 길옆 가로수에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채연은 눈을 손으로 쓸기도 하며 어린아이처럼 한껏 기분이 들떴다.
그리고 건널목에 섰다.
지하철역으로 가려면 건널목을 건너야 하기 때문이었다.
건널목에는 그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고 채연은 습관처럼 인도에 내려 건널목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불과 서너 발짝 걸었을 때였다.
갑자기 옆에서 걷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급히 걸음을 멈추는 것을 봤었다.
동시에 채연의 고개가 돌려져 옆을 봤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눈길에 미끄러져 정지하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며 다가오는 차를 발견했다.
“스, 스톱!”
채연이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채연은 그만 급히 몸을 뒤로 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허리를 숙이고 말았다.
엉덩이를 차로 향하고 말이다.
너무 다른 곳에 정신을 쏟고 있다가 보니 사물을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진 탓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엉덩이에 무거운 물체가 부딪치는 느낌이 전해졌다.
엉덩이의 충격으로 그녀는 마치 엄마 자궁 속의 아기처럼 엉덩이를 내밀고 곱게 두손을 모은 자세로 공중 부양을 하며 허공에 날았고 순간 자신이 공중을 날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생생히 기억났고 그녀의 공중 부양 시간은 슬로비디오로 보는 것과 같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아직 흙탕물이 가득한 미처 녹지 않은 염화칼슘이 가득한 눈 속에 얼굴을 처박고 거꾸로 로켓처럼 꼽히고 말았다.
흰색 바지의 엉덩이에 선명한 자동차 번호 자국을 찍으면서 말이다.
“꺅! 어, 어떻게 해! 어떻게 해!”
같이 지나가던 여자 한 명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순간 희한하게도 그녀에게는 자신이 차에 부딪혔다는 사실보다 여자의 비명 소리가 더 뇌리를 자극했다.
차에 부딪혔다는 공포보다는 하필이면 이상한 자세로 떨어진 것이 더 마음에 쓰인 것이다.
“괘 괜찮아요? 이, 이봐요! 괜찮아요?”
누군가 급히 달려와 그녀에게 물었다.
그때 그녀는 순간적으로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미친놈이 괜찮을 것이냐고 오히려 되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절대로 괜찮은 상황이 아니었다.
옆에서 사람들이 웅성대며 소리쳤다.
“빨리 병원으로 옮겨요! 어서요!”
그러자 그제야 그녀는 사정없이 떨고 있는 남자의 손을 느꼈다.
그녀를 친 운전자의 떨리는 손이었다.
순간 그녀는 빨리 이 순간을 모면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괘, 괜찮아요. 다친 데가 없는 것 같아요.”
채연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이미 옷이고 머리는 온통 구정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남자가 기겁하며 외쳤다.
“아, 안 돼요! 우선 병원부터 갑시다! 어서요!”
숨넘어가는 소리로 남자가 외쳤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피! 엉덩이에 피가!”
순간 모두의 눈이 그녀의 엉덩이로 쏠렸다.
피가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하얀 바지에 자동차 번호판이 찍힌 부분의 아래에 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아, 안되겠어! 빨리 병원으로! 병원으로 가야겠어요!”
남자가 그리고는 다짜고짜 채연을 번쩍 들어 안았다.
남자의 완력에 그녀는 너무 쉽게 번쩍 들려 버렸다.
그녀 자신이 그렇게 가벼웠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그녀는 가볍게 들려 차에 실려져 버렸다.
남자가 허겁지겁 차에 올랐다.
남자는 너무 놀라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고 손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채연이 보기에 오히려 측은할 정도였다.
“미, 미안 합니다! 첫 출근이라 너무 서두르다 보니 그만.......”
남자가 사과하며 급히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차는 너무 빨리 엑셀을 밟아서 계속 헛바퀴가 돌기만 했다.
보다 못한 채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천천히 해요. 많이 다치지는 않은 것 같으니까 서두를 것 없어요.”
“그, 그래도 차에 부딪혔고 또 그만큼 높이 치솟았는데 괜찮을 리가 없어요! 그, 그리고 피! 피가 나니까 빨리 병원에서 지,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남자가 겨우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남자가 당황한 표정을 하며 물었다.
“벼, 병원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난 몇 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도통 지리를 몰라서........”
그 순간에 채연은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웃어야 할 상황이 아닌데도 남자의 허둥대는 모습이 너무도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채연이 손짓으로 가리켰다.
“사거리를 지나 우회전 하세요. 거기에 병원이 있을 거예요.”
“그, 그래요? 알겠습니다!”
남자가 땀까지 흘리며 앞으로 튕겨 나갔다.
사거리를 지나자 곧 조그만 동네 병원이 나타났다.
남자가 허둥대며 병원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저, 저기요! 여기 교통사고 환자가 있어요! 어서! 엉덩이에 피, 피가 선명하게……속히 치료를! 어서요!”
그러자 곧 병원 간호사들이 급하게 응급 침대를 끌고 달려왔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채연은 혼자 차에서 내려 태연히 병원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피가 튀고 뼈가 부서졌으리라고 생각한 병원 간호사들은 다소 실망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고는 호들갑을 떤 뭐 이런 사람이 있냐는 표정으로 봤다.
채연은 얼굴과 옷에 온통 흙탕물 범벅이 되어 걸어 병원 응급실로 들어갔다.
달려온 의사가 그녀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 아픈데 없어요? 심하게 부딪쳤다면서요?”
의사의 말에 채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요. 분명히 심하게 부딪치기는 했는데 아픈 곳은 하나도 없네요. 엉덩이가 좀 얼얼하고 피가 나기는 하는데 그것 외에는........”
“엉덩이가요? 어디 봅시다!”
의사가 억지도 아픈 곳을 찾았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픽 웃었다.
“어, 엉덩이에 차 번호판이 찍혔네요! 만약 차가 뺑소니를 쳤으면 영락없이 잡히겠는데요! 흐흐!”
채연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엉덩이를 쳐다봤다.
정말 또렷하게 차 번호가 찍혀 있었다.
“어머! 정말이네! 호호! 웃긴다!”
그녀는 자기 일일 것도 잊고 그만 그만 깔깔대고 웃고 말았다.
지켜보던 남자가 그제야 굳어진 얼굴이 풀리는 듯했다.
의사가 대뜸 채연에게 말했다.
“바지를 내리세요.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피가 나니 어디 진찰해 봅시다.”
그리곤 당연하다는 얼굴로 채연이 바지를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여, 여기 서요? 어떻게 남자들 앞에 바지를........”
그러나 의사가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자라니요? 여기 남자가 어디 있습니까? 의사가 있을 뿐입니다!”
채연이 손가락으로 지켜보고 있던 남자를 가리켰다.
그제야 의사가 뒤를 돌아보며 남자에게 말했다.
“뭘 보고 있어요? 아가씨가 옷을 벗어야 한단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 잠시 나가 계십시오!”
“네? 그, 그래요? 나가겠습니다!”
그제야 남자가 민망한지 고개를 돌리고는 응급실을 나갔다.
의사가 침대 옆의 커튼을 치고는 다시 채연에게 독촉을 했다.
채연이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바지를 아래로 끌어 내렸다.
의사가 태연히 엉덩이를 주물렀다.
채연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오히려 바지를 벗고 있는 현실이 차에 부딪힌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녀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러나 의사는 관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태연히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여기는 어때요? 아프지 않아요?”
“네. 괘, 괜찮아요.”
“그래요? 여기는요?”
“괘, 괜찮아요.”
“그래요? 거 이상하네! 피가 나기는 하는데 상처가 난 것 같지는 않고........아무래도 팬티를 내려야겠습니다!”
“네? 패, 팬티를요?”
채연이 핏기가 없는 얼굴로 외쳤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꼼짝 없이 팬티를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눈을 꽉 감고는 조심스럽게 팬티를 아래로 내렸다.
의사의 손길이 특정 부분을 주물렀다.
순간 그녀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얏! 아, 아파요!”
“그래요? 아파요? 이런!”
“왜? 왜 그러세요?”
그러자 의사가 혀를 끌끌 찼다.
“아가씨! 치질 있었어요?”
“치, 치질이요? 쪼끔! 아주 쪼끔 있기는 했는데........”
“에이! 조금이 아니구먼! 떨어지면서 치질이 터졌어! 아주 결딴이 났구먼!”
“네? 치, 치질이요? 서, 설마!”
그러나 의사는 여전히 그녀의 엉덩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네! 아가씨는 워낙 엉덩이가 탄력이 있어 이 정도였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아마도 뼈까지 으스러졌을 겁니다. 어쨌든 정확한 검사를 위해 M.R.I 검사를 해야겠습니다.”
의사가 태연한 얼굴로 말하고는 그녀의 팬티를 위로 올려 주었다.
채연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 어떻게요? 교통사고로 치질이 터졌다니요? 지나가는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인데.......”
“그렇게 평소에 관리를 잘했어야지! 보아하니 변비도 심했지요?”
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인제 어쩌지요? 선생님?”
“어쩌기는요? 이참에 찢어진 치질을 때어내는 말끔하게 수술해야지요.”
“아, 안 되는데.......회사에 출근도 해야 하고.......우리 할머니가 아시면 난리가 날 텐데.......”
“그래도 해야 합니다! 그대로 두면 더 큰 일이 일어납니다.”
그제야 채연이 의사를 붙들고 조그만 소리로 사정했다.
“말씀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부탁인데요. 창피하니까 치질이 터졌다는 말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데.......특히 저기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알았어요. 우리도 그 정도 프라이버시는 지켜줍니다. 걱정 말고 검사가 끝나는 대로 수술합시다!”
그리고는 의사가 더 볼 것 없다는 듯 일어나며 간호사에게 말했다.
“이 환자 즉시 M.R.I 검사 준비해요. 교통사고 환자니까 혹시 다른 곳에도 이상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전신 검사를 하도록 해요.”
그리고는 의사가 나가버렸다.
의사가 밖으로 나오자 남자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어떻습니까? 괜찮습니까?”
“네! 큰 문제는 없습니다. 치료하면 곧 완치가 될 겁니다.”
“그래요? 그런데 피는 왜 난 겁니까? 상처가 생긴 겁니까?”
“상처요? 그럼요! 상처도 아주 큰 상처가 났지요. 어험!”
그리고는 의사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채연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러나 갑자기 당한 사고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출근해야 하는 문제가 당장 봉착된 것이다.
졸지에 울상이 된 채연은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급한 대로 우선 회사의 같은 부서에 연락해야 하겠다 싶어 핸드폰을 찾았다.
그러나 들고 있던 핸드백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사고가 났을 당시에 핸드백을 챙기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어머! 어떡해! 내 핸드폰! 그리고 지갑도 거기 다 들어 있는데!”
채연은 급히 밖에서 기웃거리고 있던 남자에게 외쳤다.
“저, 저기요! 혹시 내 핸드백 못 봤어요? 핸드백이 없네요!”
그러자 남자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모, 못 봤는데요! 나도 정신이 없어서 미처 챙기지를 못했는데 어쩌지요?”
“뭐요? 어머! 큰일 났네! 거기 내 지갑일랑 카드랑 전부 들어있는데!”
“그, 그래요? 그럼 지금 당장 다시 가볼까요? 아직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니까!”
남자가 허둥대며 나가려 했다.
채연이 급히 남자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우선 핸드폰 좀 빌려주세요. 회사에 아직 알리지도 않았단 말에요.”
남자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밀었다.
채연이 회사의 번호를 눌렀다.
곧 부속실의 미스 김이 전화를 받았다.
“미스 김! 난데 나 아무래도 오늘 회사에 출근하지 못하겠어. 교통사고가 났지 뭐야.”
그러자 미스 김의 목소리가 높아져 물었다.
“뭐야? 교통사고? 마, 많이 다친 거야? 어쩌다가?”
“아, 아니야. 의사 말로는 엉덩이에 금이 갔데. 자세한 것은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별일 아닌 것 같아. 너무 걱정하지 마.”
채연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치질이 터졌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였다.
“그래? 어쩌다가 그랬어? 하여간 내가 실장님에게 말해 놓을게. 어느 병원이야?”
“동네 병원이야. 그리고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전화되지 않을 거야. 곧 병원 번호를 알아서 다시 전화할게.”
그리고 채연은 전화를 끊었다.
교통사고의 미스 김의 반응은 매우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녀가 출근하지 않으면 당장 회사 업무가 마비되고 마는 것이다.
채연은 당황한 표정을 짓고는 핸드폰을 남자에게 돌려줬다.
남자도 생각이 났는지 말했다.
“저도 정신이 없어 회사에 연락하지 못했네요. 오늘 첫 출근이라 모두 기다리고 있을 텐데......... 늦겠다고 연락해야겠습니다.”
채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머! 오늘이 첫 출근이세요? 그럼 안 되지요! 여긴 걱정 말고 빨리 가보세요. 첫 출근부터 상사에게 잘못 보이면 어떡해요?”
그러나 남자는 느긋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후후! 괜찮아요. 차라리 자르라고 하세요. 오히려 바라는 바니까요.”
그러고는 휴대폰을 들고 번호를 눌렀다.
“성민이냐? 삼촌인데 아무래도 출근이 늦겠다. 눈길에 그만 사고가 났지 뭐냐?”
“사고? 교통사고가 났단 말이야? 삼촌! 어디 다쳤어?”
성민이 화들짝 놀라 음성이 커졌다.
“아니야. 내가 다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다치게 했어. 여기 병원이니까 수속을 밝고 곧 갈게.”
“큰 사고야? 많이 다치게 한 거야?”
“아직은 몰라. 하지만 가볍지는 않은 것 같아. 걱정하지 마. 할아버지나 아버지에게는 아무 말 하지 마. 알겠지?”
“알았어. 필요하면 연락해. 회사 고문 변호사를 보내서 수습하도록 할게.”
“아니야. 그럴 필요까진 없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는 진호가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채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가보세요. 들으니 집안 어른들도 큰 걱정을 하시겠는데 여긴 제가 알아서 치료받도록 할 테니 가셔도 돼요.”
“그렇지만 아픈 사람을 두고 어떻게 갑니까? M.R.I 결과라도 보고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진호는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채연은 솔직히 남자에게 자신의 치질에 이상이 생겨 피가 났었고 곧 수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귀에 들어갈까 조바심이 났다.
“전 괜찮아요. 어차피 보험 회사에서 사고 수습을 할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혹시 모르니까 명함이나 두고 가세요.”
채연은 남자를 빨리 쫒고 싶었다.
그러나 이 눈치도 없는 남자는 머뭇거리며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
“명함이요? 전 아직 명함이 없는데.......이제 막 발령을 받아서 미쳐 명함을 새길 시간이 없어서........”
그때 간호사가 들어와 채연이 누워있는 침대를 밀며 말했다.
“M.R.I 검사실로 갈 거예요.”
그러자 채연이 재빨리 간호사에게 물었다.
“얼마나 걸리지요? 이분이 바쁘셔서 오래 걸리면 그만 가시라고 해야겠는데........”
“전신 검사니까 검사하고 결과가 나오는 데는 세 시간은 족히 걸릴 거예요.”
“세 시간이나요?”
채연이 놀란 표정을 짓고는 진호에게 말했다.
“안 되겠어요! 너무 오래 걸리니까 여긴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세요. 어서요.”
진호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제 휴대폰 번호를 적어 드리겠습니다. 우선 잠시만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바쁘신데 이제 안 오셔도 돼요. 서로 운이 없어 일어난 일인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나 진호는 급히 메모지에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적었다.
그리고는 침대를 밀고 가는 간호사를 따라오며 채연의 손에 메모지를 잡아줬다.
침대가 M.R.I 검사실로 들어갔다.
채연과 함께 말이다.
혼자만 덩그러니 남은 진호는 잠시 채연이 사라진 검사실을 들여다보다가는 전화벨 소리에 핸드폰을 받았다.
성민이었다.
“삼촌! 어떻게 됐어? 할아버지께서는 빨리 회장실로 올라 오라시는데 어떻게 해?”
“아버지가? 알았어. 곧장 가도록 할게.”
진호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걱정스런 얼굴로 검사실을 기웃거리고는 병원을 빠져나갔다.
원형 모향의 M.R.I 기계에 오른 채연은 진호가 건네준 메모를 들여다봤다.
전화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 진호? 희귀성이네? 우리 회장님도 여 씬데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 또 있네.”
채연은 픽 웃고는 메모지를 머리 아래에 넣었다.
그러자 간호사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며 베게 아래의 메모지를 꺼냈다.
“M.R.I 사진에 메모 내용이 모두 나오게 하려는 거예요? 내가 보관하고 있을 게요.”
채연은 피식 웃고는 그대로 둥근 원형 모향의 기계에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할머니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도 않고 있었다.
하긴 놀라 괜히 눈길을 달려오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싶어 천천히 알리는 것이 오히려 났겠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없다는 것이 조금은 허전하기도 했다.
누군가 옆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위로되고 힘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여진호? 어째 이름이 낯설지가 않네. 우리 회장님이랑 성이 같아서인가?’
채연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백지장처럼 하얗게 부들부들 떨고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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