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화려한 공항의 불빛이 서글프게 빛나는 밤이었다.
이제 방금 떠오른 비행기의 빛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이 날카롭지만 아련함은 어쩔 수 없는 정일 것이다.
이렇게 정리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의 집안에 오점을 남길 수는 없었다.
(우리 떠날게요. 아버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냥 둘만 살게요.)
철부지아들의 애원에 그의 마음은 더 굳어지고 있었다.
그냥 평범한 아이라면 어떻게든 숨겨서 데리고 있겠지만 그 아이는 평범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의 집안 발목을 잡을 약점이 될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싹이 트기 전에 잘라야했다.

“집으로.”

비행기가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그는 아이도 그들의 인생에서 사라지기만을 바랄뿐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대로 진행할까요?”

비서의 말이 떨리는 것에 그가 웃고 말았다.

“그냥 지켜보라고 해. 확실하게 선을 긋지는 말고.”

아주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지만 지금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의 판단이 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몰라도 완전히 발을 빼는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도 가능했다.

“여자는?”
“강릉으로 보냈습니다.”
“녀석에게는 들키지 않았고?”
“네. 그런데 경호팀을 닦달하고 계시 답니다.”
“놔둬. 일시적인 감정이야. 그렇지 않다면 자르면 되고.”

비서의 눈빛이 일순 굳었다.
의원의 아들이 저지르는 일들을 처리하는 것은 이골이 났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상처받은 아이에게 난도질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도 만만찮았다.
감정이 사라진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보며 고개를 흔들 때는 돌 지난 아이가 있는 그도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더 빨리 처리를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자를 그 차가운 집에 두고 올 때는 솔직히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그보다 더 무거운 짐을 사람들에게 맡기고 또 정리될 때까지 그는 잠이 제대로 오지 않았다.
그 또렷한 눈빛을 보지만 않았어도.
그의 아이와 같은 맑은 눈빛으로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지 울지도 않고 두리번거릴 때는 솔직히 미안하기도 했다.
미안하다.
아이의 친척들을 대신해 모든 일을 처리해야했던 그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하늘을 향해 사죄를 가슴에 품었다.
부디 그곳에서는 편안하게 살아라.



“자 여러분, 이분은 이번 드라마의 의학부분의 감수를 맡게 될 한주종합병원 외과의사십니다. 신 선생님 인사하시지요.”
“정확하게는 프리랜서 일뿐이지만, 신이수입니다.”

계약이 끝나가는 마당에 할 일없는 의사를 처분하기에는 딱 좋은 자리임이 분명했다. 이수는 병원장의 태도변화를 떠올리며 비틀린 웃음을 삼켰다.

“안녕하세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인사에 이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닥하며 그녀가 여기에 오게 된 원인을 지워버렸다.
그녀의 의향과는 전혀 다른 전개에 굳이 정신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평상시와 같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어디를 가든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는 그녀였기에 단지 장소가 바뀌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되었다.
하지만 병원장과는 달리 그녀를 좋게 보았던 사무장은 환한 웃음으로 그녀의 다음 일을 일러주었다.

‘이번 드라마의 화려한 배역진을 보면 이수씨도 좋아할 겁니다.’

그 말을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본에서 드러난 현실은 훨씬 더 잔혹했다.
비현실적인 줄거리에 가상적인 달달한 로맨스, 거기다가 극단적인 사이코패스 솔직히 그녀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세계였다.
좋아한다고? 내가?
저 멍청한 짓을 계속 지켜보면서 뭘 확인하고 조언을 해주라는 건지?
그녀의 답답한 머릿속을 모르는 감독은 출연진 개개인을 그녀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이분이 주연인 김기준씨 그리고 한서연씨 그리고 여기 팀장역의 최윤환씨입니다. 이 세 분 외에 네 분이 더 있으시지만 오늘은 각자 스케줄에 의해 오시지 못했습니다.”

깍듯한 감독의 말에 기준은 입매를 굳혔다.
평소 저 감독의 횡포는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여자에게 그것도 깍듯하게 존칭어를 서가며 설명을 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서연도 윤환도 서로를 쳐다보며 할 말을 잃은 듯이 멍하니 이수와 감독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복잡한 심경은 그녀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굳이 촬영현장에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그때 전화로 연락하면 좋겠는데…….”

본인의 의사만 전하는 방식에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탁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하라는 뜻이 분명한 이수의 말에 기준은 감독을 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일그러진 얼굴이 저 여자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드러내주고 있었다.

“현장을 보지 않고는 저희들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촬영이 끝날 때까지 함께 부탁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염려하는 그의 생각과는 달리 감독은 끝까지 저자세였다.
아무래도 대단한 여자가 픽업된 모양이었다.

(드디어 감독이 미쳤나봐.)
(평소에 그렇게 사람들을 잡아대더니 결국 어디서 발목이 잡혔나?)
(웬만한 감수들은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는 사람이.)

놀람이 지나치면 감정이 결여되는 모양이었다. 서로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지금까지의 놀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감독의 당황한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며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김기준이라고 합니다. 전직이 의사인 형사역입니다.”
“네.”

흥미조차도 없다는 표정의 이수에게 기준의 입술이 살짝 찌푸려지다가 금방 풀렸다.
그 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이 여자는 환자이외에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워커홀릭이 분명했다.

“한서연입니다.”
“신이수입니다.”
“최윤환입니다. 의사선생님으로만 계시기에는 너무 미인이신데요? 그런 말 많이 들으시죠?”
“신이수입니다. 다른 장소였다면 성추행으로 고소당할 소지가 다분한 위험한 발언이라는 것 아시죠?”
“아이참, 선생님도. 미인을 미인이라고 하는 게 무슨?”
“미인은 황금비율을 제대로 갖춘 사람한테 쓰이는 단어랍니다. 전 그 황금비율의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하고요.”

윤환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선생님을 미인이 아니라고 해서 상처받으신가봅니다. 다음에 저한테 데려오십시오. 미인의 기준에 대해서 재교육시켜 선생님께 사과하게 하겠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럼 꼭 녀석을 데려오죠.”

자연스럽게 웃음을 보여주는 이수를 보며 윤환은 이 여자의 내면이 무척 순수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 여자의 냉정한 태도가 자신을 보호하기위한 갑옷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럼 편집실로 가실까요? 작가선생님은 다음 주는 돼야 인사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수는 윤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감독의 뒤를 따랐다.
사라지는 이수를 보며 기준이 윤환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십니까?”
“왜 상당히 순수하던데.”
“그래요?”

기준은 이수가 사라진 쪽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윤환의 눈에 즐거움이 스며들었다.
기준이 흥미를 보였다.
그것도 처음 보는 여자에게.
기준의 연애사는 잘 알지만, 보이는 것과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은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상당히 신중한 기준의 여성상에 부합되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데 몇 마디 나누지도 않은 여자에게 기준의 미간이 움직였다. 본인은 모를지라도 산전수전 백전노장인 윤환으로서는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다.
가상적인 드라마와는 다른 현실적인 드라마를 보여주게 될지도 모를 이수와 기준을 보는 그의 눈빛에 즐거움이 스미다가 사라졌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작업들부터 처리해야하는 현실이 떠올라서였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드라마보다는 지금 드라마를 먼저 정리해야했다.

“우리도 가지. 한 컷이라도 제대로 찍어둬야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기지.”
“네.”

윤환과 나란히 걸으며 기준은 다시 한 번 의사 선생이 사라진 곳을 보았다.
윤환이 그런 기준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새로운 드라마는 조금 기복이 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 속에 휘말릴 기준이 어떤 식으로 풀어나갈지 궁금해지는 그였다.
하지만 당장은 현실의 드라마가 중요했다.
촬영장에 들어서는 그의 눈빛에서 조금 전의 느물거리던 표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론 기준과 서연 또한 그들의 역에 부합되는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 들어섰다.

현대 로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