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일까?''아까보다 훨씬 더 빗줄기가 굵어졌다. 더욱 요란해진 빗소리에 어린 서현은 벽에 붙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간간이 치는 번개와 천둥이 무서워 열 살 먹은 여자 아이의 작고 가녀린 몸은 자기가 만든 작은 집 안에 숨어드는 달팽이처럼 저절로 웅크려졌다. 무지막지하게 달려드는 공포를 덜기 위해 등이란 등은 모두 켜놓아 거실은 대낮같이 환했지만 상대적으로 유리창 너머의 세상은 더욱 짙은 어둠에 묻혀있었다. 넓은 정원에 있는 하얀 칠을 한 나무그네도, 원형테이블과 의자들도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마치 암실과 같은 집밖에서는 세찬 바람소리만이 들려왔다. ''서현은 천둥번개를 병적으로 무서워했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이면 혼자 있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부모님은 비 오는 날이면 하나밖에 없는 딸을 절대로 혼자 두지 않았다. 잠도 꼭 같이 자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달랐다. 이토록 포악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현에게 혼자 집에 있으라고 했다. 꼭 갈 곳이 있어서, 오늘 가지 않으면 안 된다며 집을 나섰다.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너무나도 단호해서 차마 더 매달릴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서현은 홀로 남겨졌다.''서현은 커다란 집에 혼자 있으려니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두워질수록 점점 옥죄어오는 공포를 조금이라도 덜고 싶은 마음에 내내 주먹을 쥐고 있었다. 서현은 갈수록 더해지는 두려움만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에 힘이 가해졌다. 꽉 쥔 주먹 사이로 뭔가 흘러내리는 것 같아 손을 펴보니 손톱이 박혔던 자리가 빨갛게 패여 핏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손바닥에 고인 피를 보던 서현은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것을 느끼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울지 않아. 울지 않고 얌전히 기다릴 거라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절대로 눈물 같은 건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거야.”''울지 않겠다고 부모에게 약속했으니 울어선 안 된다. 약속한 것만큼은 꼭 지키는 서현이었다. 게다가 부모님과의 약속이 아닌가. 아마도 자신의 눈가에 울음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부모님은 마음 아파하실 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혼자 두고 나가는 뒷모습이 얼마나 쓸쓸했었는지, 그녀를 바라보며 안녕을 말할 때의 눈빛이 얼마나 불안했었는지를 기억해내며 서현은 이를 악 물었다. ''기다림, 공포, 두려움, 불안. ''반복되는 감정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무디어지는지 졸음이 밀려왔다. 어느새 눈꺼풀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고 했던가? 서현은 어제 영빈이와 풀었던 수수께끼를 떠올리며 눈을 부릅떴다.''‘힘이 어마어마한 삼손이란 장사가 눈꺼풀만큼은 들어올리지 못했대.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들었다가 들릴라라는 여자한테 머리카락을 잘려서 힘을 다 잃었대. 잠든 사이에 가장 소중한 걸 잃어버린 거야.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게 눈꺼풀이래.’''서현은 벌떡 일어났다. 잠이 들면 자신도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불안했다. 세수라도 해서 잠을 떨칠 요량으로 욕실로 향했다. 그때, 초인종이 연거푸 울렸다.''띵동 띵동 띵동띵동띵동. ''서현은 반가운 마음이 앞서 우산을 챙길 새도 없이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현관을 나와 대문으로 향하는 동안, 짧은 순간이었지만 폭우로 인해 온 몸이 흠뻑 젖었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턱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더 이상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와 기쁨이 추위쯤은 거뜬히 이겨낼 수 있게 해주었다. 서현은 환하게 웃으며 대문을 활짝 열었다. ''“엄마! 아빠!”''대문밖에 서있는 사람을 본 서현의 눈이 커졌다. 마치 옷을 입고 수영을 한 사람처럼 온 몸이 젖은 채 동갑내기 친구인 영빈이 헉헉거리며 서있었다.''“영빈아?”''“헉, 헉.”''걸어서 십 분, 뛰면 오 분 거리에 살고 있는 영빈이 죽어라 뛰어온 사람처럼 숨만 헐떡였다. 흠뻑 젖은 영빈의 몸에서 열기와 함께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우산이라도 쓰고 오지. 다 젖었잖아.”''“허억, 허억.”''벅찬 숨이 괴로운지 영빈이 인상을 찡그리며 입만 벙긋거렸다. 서현은 거센 비바람을 뚫고 달려온 영빈을 보며 걱정이 앞섰다. 영빈의 안색이 심상치 않아보였다.''“왜? 너희 집에 무슨 일 있어? 우리 엄마랑 아빤 아직 안 오셨는데, 무슨 일이야?”''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서현을 뚫어질 듯 바라보던 영빈의 입이 열렸다. ''“이제부터 내가 널 지켜줄 거야!”''그 해, 마지막 태풍이 휘몰아치던 밤이었다. ''''''1. 서현 : 난 이미 변했다고 하면 너도 변할 수 있니?''''''‘그린 파라다이스’''자신과 영빈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는 카페다. 두 사람에겐 너무나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말 그대로 그린 파라다이스였다. ''영빈의 전화를 받자마자 부리나케 외출준비를 하고 나와 택시를 잡았다. 기사에게 서둘러달라고 반 애원하다시피 부탁했건만 퇴근길이라 길이 많이 막혔다. 택시에서 내린 서현은 다행히 약속했던 시간보다 많이 늦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모임에 가기 전에 잠깐 얼굴을 보자고 했으니 더 늦으면 그와 함께 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서현은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다 급한 마음에 입구를 향해 뛰었다. 그녀가 입은 얇은 실크 스커트가 바람에 나풀나풀 날았다.''“여기야.”''문을 열고 들어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아 있던 영빈이 손을 들었다. 자신을 보면 항상 웃어주는 그답게, 영빈은 웃고 있었지만 서현은 그의 웃음 뒤에 숨겨진 그늘을 보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쳤을 테지만, 서현은 영빈과 관련된 것이라면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극도의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모임에 간다더니, 그것 때문인가?’ ''영빈의 안색을 살피며 자리에 앉은 서현은 다가온 종업원에게 카푸치노를 시켰다.''“저녁에 무슨 커피야? 아직 저녁 먹을 시간은 아니고, 우유로 바꿔줄까?”''“아니. 커피 마실래. 내일 아침까지 원고 보내야 해.”''“바보.”''“응?”''“진작 얘기하지. 그랬으면 안 불러냈잖아.”''영빈의 후회하는 말투에 서현은 방긋 웃었다. 그랬을 것이다. 만약 원고 마감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말을 했다면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서현을 불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서현에게는 항상 최대의 배려를 해주는 그였다.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서현은 원고마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왜? 그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고, 비록 짧은 시간일지라도 그가 보고 싶었다.''“괜찮아. 너도 모임에 가야한다면서, 뭐.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또 아니? 네 얼굴 보고 들어가서 휠 잔뜩 받아 겁나게 써내려갈지. 무지무지 강력한 글발신이 내려서 소머즈처럼 휘리릭 금방 다 써버릴 지도 모르잖아. 너 소머즈 알지? 육백만 달러의 사나이 애인.”''“알지, 그럼. 후후. 말이라도 고맙네.”''“정말인데?”''“그 말 들으니 힘난다. 잘 됐네. 나도 너한테 힘 받아서 육백만 달러의 사나이가 되지 뭐. 알지? 소머즈의 애인.”''자신의 말을 흉내 내며 미소 짓는 영빈을 보던 서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회사 일을 하기 전에는 동문 모임에 가는 그의 모습에서 환한 빛이 났었다. 진로를 바꾸고도 동문 모임에 될 수 있으면 꼬박꼬박 참석하는 그의 마음을 짐작하니 마음이 아팠다. 모임에 가기 전에 그녀를 불러낸 것만 보아도 그의 기분이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힘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같이 가줄까?”''“뭐어?”''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랐는지 영빈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서현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으로 인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당혹스러워 얼른 고개를 숙였다. 때마침 종업원이 다가왔다. 서현은 종업원이 찻잔을 내려놓는 틈을 이용해 얼른 눈을 깜빡여 물기를 지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얼굴을 들었다. 테이블 위에 카푸치노와 블랙커피를 내려놓은 종업원이 다른 테이블 쪽으로 가자 영빈이 서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현의 제안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정말이야?”''“우리가 둘도 없는 친구라는 거 모르는 사람 있어?”''“물론, 없지.”''영빈의 말 뒤끝에 쓸쓸함이 묻어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일까? 서현은 갑자기 심장이 조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영빈의 표정을 보니 다행히도 자신의 표정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서현은 좁혀진 미간을 서둘러 폈다.''“네 덕분에 네가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 나도 알고 지내는 사이인데 뭐. 설마 내가 간다고 쫓아내기야 하겠어?”''“바보.”''“왜 또?”''“또? 뭐가?”''“아까도 너, 나한테 바보라고 했어. 친구한테 자꾸 바보라고 하면 그 친구가 어떻게 할 것 같아?”''“흠. 너도 바보라고 해. 그리고.”''“그리고, 뭐?”''“친구라고 강조 안 해도 우리가 친구라는 거 알아. 그러니까.”''“그러니까?”''“친구라고 너무 강조하지 말라고.”''“피이.”''서현은 입술을 내밀어 삐죽거리고는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니? 혹시, 내 생각과 같은 건 아니지? 그래, 그럴 리가 없어. 영빈아, 너 그거 아니? 넌 나를 너무나 잘 아는데, 네가 모르는 부분도 있다는 걸. 너와 내가 친구라는 걸 모두 다 알고 있으니까 너무 강조하지 말라는 말, 그 말이 날 아프게 한다는 걸 넌 꿈에도 모르지? 당연히 모르겠지. 안다면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 넌. 그런데, 그런데 영빈아. 나, 참 힘들다.’''고개를 숙여 찻잔을 보던 서현은 영빈이 별 의미 없이 한 말에도 민감하게 다른 의미를 찾으려 애쓰고, 상처받는 자신을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영빈의 말이 맞았다. 친구라고 강조하지 않아도 자신과 그는 친구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항상 그랬다. 뭔가 다른 의미를 찾으려 애를 써 봐도 결국 결론은 변함이 없었다. 팽이처럼 빙빙 돌다가도 언제나 그 결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항상 영빈과 자신을 묶는 끈은 친구라는 단어였다. ''“휴.”''서현은 낮은 한숨을 토해내며 시선을 들었다. 허공을 가르던 서현의 시선이 영빈의 강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서현은 자기도 모르게 흡, 숨을 들이마셨다. 자신을 보는 영빈의 눈빛이 달랐다. 갑자기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의 진동처럼 서현의 심장이 요동쳤다.''각자 엄마의 뱃속에 생명체로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전생, 그 이전의 전생부터 서로 만나도록 정해진 운명이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생각할 만큼 서현은 영빈을 잘 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영빈의 눈빛은 여태까지 보았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생소했다. 낯선 그의 눈빛에 서현은 당혹스러운 나머지 얼굴이 달아올랐다.'''''''2. 영빈 : 이런 기분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면 어쩌지?''3. 서현 : 더 이상은 숨길 자신이 없는데 나 이제 어떻게 하지? ''4. 영빈 : 내 안에 너 아닌 누가 감히 들어올 수 있겠니?''5. 서현 : 사랑이 지나가지 않게 도와주는 게 운명 아닐까?''6. 영빈 : 우리 지금 비법 찾는 연습할까? ''7. 서현 :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랑이었어?''8. 영빈 : 너한테 내가 누구니?''9. 서현 : 너는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있어도 웃을 수 있니?''10. 영빈 : 사랑이란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뭐가 있냐고?''11. 서현 : 한 번 변한 마음이 또 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니?''12. 영빈 :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 그런 사랑이 있나?''13. 서현 : 너, 그렇게 시시한 남자였니?''14. 영빈 : 나는 너한테 뭔데?''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