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직 치마 위에 남색 더블 코트를 입은 짧은 단발머리 여학생이 서둘러 지하철 신촌역 출구를 빠져나갔다. 도로 위로 올라서자마자 매서운 겨울바람이 코트 위로 둘러맨 체크무늬 목도리 사이로 파고든다. 목도리 하나만으로는 칼바람을 막아내지 못했지만, 장갑을 잊고 나오는 바람에 빨갛게 얼어있는 두 손에 비하면 감추어진 목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지하철역에서 한참 걸었다. 교차로를 건너고, 대학 정문을 지나쳐서 학부 사무실이 있다는 건물까지는 중앙도서관을 앞에 두고도 더 올라가야 하는 것 같았다.

“저, 실례합니다. 말씀 좀 여쭐게요. 대학본부를 찾고 있는데요,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살이 에이는 추위를 이기지 못한 여울이 눈이 소복하게 쌓인 보도블록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지나가던 여대생에게 물었다.

“아, 대학본부요? 도서관 옆에 있는 바로 저 건물이에요.”

“감사합니다.”

안내해 준 이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한껏 들뜬 마음으로 돌아섰다.

코트 아래 떨어져 있던 두 손을 모아 몇 번이고 따뜻한 입김을 불어보았지만, 손끝이 아린 느낌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계단을 총총히 뛰어올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 여울이 벽에 붙어있는 안내문을 따라 복도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에 들어온 것만으로는 뼛속까지 스며든 냉기를 참아내기 어려워 걸으면서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오늘은,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임이 틀림없다.

자신보다 먼저 합격증을 받으러 온 학생들 뒤에 줄을 선 여울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천천히 살폈다. 실내 리모델링 공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하얗게 도색된 벽에서 페인트 냄새가 느껴진다. 익숙한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던 순간 한 남자의 시선이 여울과 부딪혔다.

쌍꺼풀이 지지 않은 긴 눈매와 날렵한 콧날을 가진 남자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지만, 큰 키 때문에 주변의 관심 어린 시선을 받고 있었다. 조금은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을 피해 먼저 고개를 돌린 여울이 앞뒤를 살폈다. 저 사람이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가 싶어서.

여울 앞에 줄 서 있는 남학생 중 한 명은 휴대전화 게임에 빠져 있고, 다른 이는 벽에 어깨를 기댄 채 책을 읽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결국 저 남자의 시선을 끌고 있는 이가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여울은 얼굴을 붉혔다. 그런 여울의 행동이 재미있다는 듯 남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보인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다시 그와 눈이 마주친 여울이 시선을 피하고자 일부러 코트 소매 끝을 걷어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겨울 동안 빛을 보지 못한 손목에는 빛이 바랜 손목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낡은 갈색 가죽 끈에 매달려 있는 원형 배젤 안의 바늘은 ‘오전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여울이 고개를 들어 자신 앞에 남아있는 학생들의 수를 다시 세어 보았다. 점심은 되돌아가는 길에 기차 안에서 김밥이나 빵으로 때워야 하겠지만, 서두르면 오후 아르바이트 시간에 늦지 않고 춘천까지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대학처럼 인터넷으로 합격증을 출력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곳은 본인이 직접 수령을 하러 와야 한다는 방침에 대학본부 안은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학생들로 붐볐다.

추운 곳에 오래 있다가 갑자기 따뜻한 곳에 들어와서 그런지 얼었던 손끝이 서서히 녹으면서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여울은 손가락을 조물조물하며 건조한 입술을 혀끝으로 적시고는 몇 번이고 오물거렸다. 앞으로 줄어드는 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의 귓가에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많이 기다렸지?”

맑은 목소리만큼 인형같이 예쁘게 생긴 여학생이 대학 로고가 선명한 봉투를 손에 든 채 벽에 기대서 있던 남자의 팔에 서슴없이 매달렸다.

“합격, 축하한다.”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여울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팔에 매달려 있는 여학생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는 남자의 눈가에 옅은 주름이 생겼다.

‘둘 다 예쁘네!’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여울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고, 그 순간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한 듯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마주친 눈빛에 움찔 놀란 여울이 남자를 향해 늘름거린 후 앞사람을 따라 재빠르게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갑자기 들려온 남자의 웃음소리에 여울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신분증 좀 주시겠어요?”라는 교직원의 목소리에 여울의 귓가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웃음소리가 서서히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