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지수 씨, 전화!”

뿌연 먼지가 낀 낡은 벽시계를 보자 어느새 11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누구지?

그녀의 직장 번호를 아는 사람은 조 원장님 외에 몇몇 지인이 전부였다.

슬쩍 곁눈질로 보니 의외로 최 사장의 얼굴이 평온했다. 평소 같으면 일하는 시간에 왜 개인 전화가 오냐고 피곤한 잔소리부터 할 위인이 말이다.

역시나 재헌의 영향 탓일까?

그러고 보면 그날 이후 잔소리는 둘째 치고 은근 챙겨 주기까지 하는 필만이었다.

쓴 미소를 지은 지수는 작업용 장갑을 벗으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서지수입니다.”

― 나야.

“재헌 씨?”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목소리에 지수는 잠시 당황했다.

― 왜? 나 말고 전화할 사람이 따로 있었나?

“아, 그렇다기보다…… 근데 왜 여기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요?”

― 급한 일은 무슨. 휴대폰이 꺼져 있기에 연락할 방법이 없잖아. 전원은 왜 꺼 놓은 건데?

“일부러 끈 게 아니라 충전하는 걸 깜박해서 배터리가 나간 거예요. 길게 통화 못 하니까 용건부터 말해요. 괜히 사장님 눈치 보다 잘리고 싶진 않으니까.”

― 잘리면 그만이지 무슨 걱정이야.

“네?”

― 당신만 원하면 그렇게 힘든 일 대신 편한 사무직 쪽으로 알아봐 줄 수도 있단 뜻이야. 말이 나온 김에 어때, 생각 있어?

처음엔 설마 했는데 이 남자,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 거다.

“이봐요, 강재헌 씨. 당신이 왜 그런 일을 알아보는데요? 지금까지도 내 힘으로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예요. 죽든 살든 내 앞가림은 내가 한다는 뜻이라고요. 알아들어요? 한 번만 더 그런 소릴 했다간…….”

― 워워. 가볍게 던진 말에 뭘 그렇게 죽자 사자 달려드나. 알았어, 알았다고, 내 생각이 짧았어.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하지.

본인 딴에는 나름 그녀를 생각해서 한 말인지 몰라도 그가 오버한 것은 사실이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러니 그가 섭섭해도 어쩔 수 없다. 제삼자에게 괜한 오해를 받거나 새삼스레 돈 많은 남자의 도움으로 편하게 산다는 터무니없는 구설수에 오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어요. 할 말이 그게 다예요? 그런 난 이만…….”

― 점심이나 함께 하지. 12시 반까지 김 대리가 갈 거야.

“점심? 아, 그게…….”

― 왜? 설마 당신 사장이 점심도 못 먹게 하며 부려 먹는 건가?

“미안하지만 오늘은 안 돼요. 이미 선약이 있어서.”

― …….

의외의 긴 침묵이 이어졌다.

지수는 절로 침을 삼키며 숨을 죽였다. 자신이 왜 이렇게 긴장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그에게 큰 죄를 지은 양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괜히 수화기 너머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아무래도 그 약속의 당사자가 재헌의 동생, 재신이기 때문이겠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 남자?

“네?”

― 오늘 점심 먹는 상대가 남자냐고?

“이 사람이 점점, 남자든 여자든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라고…….”

― 대답해. 남자야?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전화기를 놓지 않을 기세였다.

그냥 확 속을 뒤집어 볼까, 하는 유혹이 들기도 잠시 역시나 그의 성질 건드려서 좋을 건 없었다. 지난밤 동생에 대한 질문에도 꽤나 민감하게 반응하던 그가 아니던가.

그래, 좋은 게 좋다고 괜한 분란을 만들 필요 없다. 무엇보다 그 대상이 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절대 조용히 넘어갈 재헌이 아니었다. 괜히 일이 커져 나중에 후회하기 전에 이쯤에서 대충 말을 둘러대는 편이 서로를 위해 좋았다.

지수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