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단 소문도 있더라, 혹 정말 죽은 건 아닐까?”'무심하게 던진 한 여직원의 말에 모두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아니, 나도 언뜻 들은 것뿐이라고. 다 알다시피 워낙 둘 사이가 끔찍했잖아.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그렇지, 나 같아도 그분을 선택하겠는데…….”'뚫어질 듯 쳐다보는 수십 쌍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그녀는 다급히 뒷말을 흐리면서 주위를 힐끔거렸다.'“에이, 아무리 소문이라도 그렇지. 죽었다는 건 좀 그렇다. 원래 돌아다니는 소문이란 것이 무섭다고 하잖아.”'“뭐, 늘 변수가 생기는 것이 사람 일인데 그건 모르지. 아무리 좋았다가도 쉽게 변하는 것이 마음이고…… 뭐, 그동안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하거나…….”'“너 소설 쓰냐?”'“소설은 무슨…… 그냥 내 생각이라고.”'“사장님이 충분히 배신을 느낄 만도 하지. 얼마나 다민이한테 끔찍했는데?”'“저기…….”'한창 하준과 다민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여직원들은 갑자기 진혜가 끼어들자, 모두 화들짝 놀라면서 멀뚱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함부로 끼어들 생각은 애당초 없었지만 여직원들의 입에서 ‘한다민’이란 또렷한 세 글자가 불쑥 튀어나오자, 진혜는 가슴이 벌떡거려 더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진혜 씨도 한다민을 알아?”'여직원 중 한 명이 경계가 잔뜩 서린 눈으로 진혜에게 묻자, 그녀는 어설프게 웃으면서 말했다.'“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이름 같기도 하고 해서요. 그런데 그분이 나타나는 거랑 사장님이 얼굴 펴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아, 진혜 씨는 잘 모르는구나. 한다민이랑 사장님이랑 그런 사이였잖아. 다민이란 이름이 좀 흔하긴 하지. 네이버 검색만 해봐도 아마 몇 백 개는 나올걸.”'“다민이 걔, 꽤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지, 새침하기도 하고…… 아, 그런데 진혜 씨, 슬그머니 인기 있더라.”'“네?”'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되묻는 진혜에게 다른 여직원이 데꺽 그 말을 맞받았다.'“잘렸던 직원을 도로 회사로 복직시킨다거나 그런 일은 여태껏 단 한 번도 회사에서 없었거든. 진혜 씨 복직 때문에 다른 여직원 세 명이나 잘린 것 알고 있었어?”'진혜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회사로 다시 복직하니 전보다 업무가 훨씬 많아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원래 일본 쪽을 담당했던 여직원 셋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의문스러워 철웅에게 슬쩍 물은 적도 있었지만, 그의 대답은 그다지 시원하지 못했다. 어물어물하면서 늘 다른 말로 말머리를 돌리는 것이 자신에게 무언가 속이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 그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라 다시 캐묻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 진혜 씨 정말 몰랐어? 아무튼, 진혜 씨는 참 좋겠다. 얼음처럼 차가운 사장님한테도 그렇고, 아무 재미도 없는 딱딱한 엄 부장님한테도 그렇고 예쁨만 받잖아.”'새치름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 그 말이 진정 진심인지, 아니면 비웃는 건지 진혜는 언뜻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여직원의 말과 행동이 상당히 귀에 거슬렸다. 그러나 짐짓 태연한 척 진혜는 어색한 웃음을 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약간 뒤죽박죽이 된 머리로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진혜는 한동안 충격으로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했다. 그녀는 부랴부랴 컴퓨터를 부팅시키고 구글에 ‘한다민’이란 세 글자를 입력하다가 잠깐 멈추고 쓰게 웃었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거의 똑같거나, 비슷하게 생긴 사람도 존재하는데 하물며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야 존재하지 않을까? 그녀가 아는 한다민이랑 여직원들이 말했던 한다민이 동일인물은 아닐 것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또한, 세상에 이다지도 기막힌 우연은 없을 것이라 거의 확신에 가까운 판단을 내리면서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한다민, 언제 들어 봐도 참 예쁜 이름이야. 그런데 인생은 참 복잡했나 봐. 내가 아는 다민이도 그렇고, 직원들이 말하던 다민이도 그렇고. 얼음 같은 사장이 그리도 끔찍하리만치 아꼈다고 하던데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진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꽤 순탄한 인생을 살아왔던 진혜에겐 다른 사람의 복잡한 인생이 그다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인생은 참 복잡하고, 사랑은 참 벅차고 버거운 존재라고 여기면서, 그녀는 모니터로 다시금 눈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뜨고 부품사이트를 샅샅이 훑었다. 어찌 된 일이지 거의 차이나 반도체로 확정지었던 거래처를 다른 거래처로 바꾸라고 아침 조회가 끝난 후 철웅이 그녀에게 어두운 얼굴로 거듭 말했다. ‘왜 바꿔요?’라고 진혜가 묻는 말에도 철웅은 한숨만 내쉬었다. 그와 반면 진혜는 기뻤다. 차이나 반도체 여 실장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라, 그녀로 놓고 말해선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이 시원하고 기분이 유쾌했다. 로또에 당첨된 것보다 더 기뻤고 오랫동안 앓아온 덧니를 뽑아 버린 것처럼 마냥 시원했다. 까짓것 얼마든지 차이나 반도체보다 더 좋은 업체를 찾아낼 것이란 굳은 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비록 단종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세상에 어디 쉬운 일이 있겠느냐만 어쨌든 차이나 반도체랑 거래하지 않은 일이 그녀에겐 천만다행으로 생각되었다. 한국에서 꽤 유망하다는 부품사이트도 그렇고, 홍콩B2B 사이트도 그렇고, 심지어 중국의 부품사이트까지 검색하는 중이지만 첫째로는 단종 된 부품이고 둘째로는 가격이 꽤 비싼 부품이라 재고가 있는 업체를 찾아내는 것이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후 한 업체 한 업체씩 전화했다. ‘재고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업체가 부지기수였다. 가끔씩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업체도 있었지만, 결국은 다시 확인해 보면 재고는 가지고 있지 않은 업체였고 대개가 외국의 OEM으로 가지고 있는 업체였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업체는 찾았어?’ 중간에 철웅이 몇 번이나 진혜에게 물었지만 진혜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철웅의 얼굴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당연히 그럴 만도 하였다. 코앞으로 다가오는 납기를 두고 아직도 재고를 가지고 있는 업체는 여태껏 찾지 못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힘없이 돌아서는 철웅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다시 부품사이트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올파트, 아이씨 파츠, 아이씨 파트너, 홍콩 벨콤, 블로크 포럼, 부품 사이트는 참 많았지만, 그곳에 올라온 정보는 거의 가짜거나, 정확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겨우 찾아낸 업체가 한 곳이 있었는데 홍콩에 있는 업체였다. 담당자는 남자였는데 목소리는 상냥했고 태도는 친절했다. 담당자는 재고를 가지고 있다고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부품번호와 데이트 코드, 로트 번호까지 상세히 있는 부품 사진을 요청하는 그녀의 청에도 담당자는 전혀 번거로워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 사진이 오고 갔고 그다음으로 견적이 오고 갔다. 그래도 믿어지지 않아 진혜는 아날로그 사이트를 통해 LOT NO까지 추적하였다. '“그러니까, 재고도 가지고 있고, 정품이 확실하단 얘기지?”'“네, 부장님. LOT NO까지 추적했습니다. 틀림없습니다.”'“최진혜 씨, 이건 단지 정품이냐, 가짜이냐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만약, 혹시라도 말이야. 짝퉁이거나 이상 있는 부품일 경우엔 반품과 환불 처리로 그냥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 업체는 홍콩에 있고, 우리가 딱히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Trade Reference도 요청해 둔 상황입니다.”'“흠…….”'가느다란 한숨이 철웅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진혜의 대답이 지극히 긍정적이라고 하지만 철웅은 여전히 의심을 풀 수 없었다. 가격이 꽤 세고, 희박한 부품 중의 하나였다. 게다가 업체는 홍콩에 있다고 하였다. 철웅은 한동안 주춤거리다가 이윽고 지나서야 하준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진행하여 주세요.”'“네에?”'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단정한 목소리였다. 철웅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준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순순한 대답이었다. 평소 같으면 사진과 업체의 상세한 프로필까지, 어떤 땐 그것도 모자라서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한 Trade Reference까지 보자고 했을 터였다. 철웅은 멍한 얼굴로 하준을 봤다.'“아직 하실 말씀이 남았습니까?”'“정말, 이대로 진행하셔도 괜찮은지 해서요?”'“무엇이 걱정된다는 거죠? 사진도 받고, 로트 번호 추적까지 다 했다면서요?”'“그렇습니다만, 워낙 금액이 상당히 큰 부품이라서…….”'철웅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흐지부지한 하준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알았다고 대답하면서 등을 돌렸다. 'Trade Reference로 알아본 홍콩 업체의 신용은 좋았다. 여태껏 짝퉁이거나, T/T를 받고 물건을 보내지 않았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던 터라, (주)에로스 코리아에서는 100% T/T로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래도 진혜는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 송금이 끝난 후엔 부품을 발송하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고, 부품을 이미 발송하였다는 비엘을 받고 나서도 부품이 정확히 자신의 손에 들어올 때까지 근심은 계속되었다. 부품은 그 다음 날 에로스에 도착하였고, 정확히 삼 일 후 LG 산업으로 넘어갔다. '“진혜 씨, 수고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