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즐겨 찾는 부산대 카페 '뭉게뭉게 구름 같은, 포근한 커피가 좋은 부산대 ‘구름 나무 커피’에 온두라스 스트롱으로 한 끼를 채우고 나면, 하루의 피로를 마음껏 풀 수 있는 듯한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이 카페의 단골이었다. 기분이 좋을 때나,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변함없이 이곳을 찾아오기도 하였다.'‘구름 나무 커피’만의 차가운 외관과 묘한 느낌이 드는 따뜻한 실내, 거기에 아무리 들어도 지치지 않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 하지만 오늘은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사치처럼 느껴졌다. 식은땀이 벌써 삐질 나기 시작했고, 이름 모를 두려움과 긴장함에 그녀는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힐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녀의 떨림은 더욱더 커졌다. 한참 동안 울리던 또각또각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갑자기 멈추어지더니 중년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일찍 왔구나!”'의자가 삐걱 움직여지면서 중년 부인이 자리에 앉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그녀는 여전히 머리를 쳐들 수가 없었다.'“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야?”'쿵쿵! 심장이 미친년 날뛰기라도 하듯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녀의 가슴을 세차게 짓누르고 있었다. '“얘, 난 시간이 너처럼 한가한 사람 아니다. 불러냈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니니?” '“어머니!”'꿈틀! 중년 부인의 몸이 아주 잠깐 흠칫했다. '“어머니!”'애틋한 목소리, 간절한 눈빛으로 중년 부인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금세라도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전, 그이 곁을 떠날 수 없어요. 어머니, 저희 결혼 허락해 주세요. 저 정말 잘할 수 있어요. 어머니, 기회를 주세요.” '“결혼?” '중년 부인의 입가가 비뚜름하게 올라가더니 쓰게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앳되게 보이는 여자를 한동안 차갑게 쳐다보았다. '“제가 많이 부족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잘해서 어머니의 며느리로.” '“우리 둘 사이엔 얘기가 끝난 것으로 알고 있다. 왜 끝난 얘기를 하고 또 하고 그러니? 넌 평생 다시 하준을 보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내게서 돈을 받는 것으로 합의를 보지 않았느냐?”'“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돈도 싫습니다. 아무것도 싫습니다. 오직, 이하준 그 남자만…….” '“미련하구나!”'이번에도 중년 부인은 그녀의 말을 뭉텅 잘랐다.'“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하준을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얘야, 사랑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것이 아니란다. 네가 만나야 하는 임자는 하준이 아니란 말이다. 하준을 잊어라. 내가 너에게 주겠다는 돈으로 얼마든지 새롭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사랑한다는 마음만 변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다 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한다민, 나만 믿고 따라올 수 있겠지?’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지금 이렇게 묻고 있다. 하준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심지어 부모조차도 없는 천애고아였다. 자신이 하준에 비하면 엄청나게 부족한 것이 많다는 것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정신적 지주는 되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또한, 그녀에게는 지금 이 순간, 아니 앞으로도 쭉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자신의 배 속에 있는 애만큼은 그녀와 똑같은 불행한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준을 사랑한 것이 죄라면 배 속의 아기는 아무런 죄가 없다. 배 속의 생명은 축복을 받아야 할 권리가 있고,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다. '“아이를 가졌어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쿵! 중년 부인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불쑥 튀어나온 말치고는 전혀 거짓말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6주가 넘었어요. 아들이라고 하더군요.”'또 한 번 쿵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충격을 받은 소리였다. 중년 부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애써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면서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였다.'“그래도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어머니의 손주예요.”'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중년 부인은 아무런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가소롭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는 중년 부인의 눈빛은 경멸과 비웃음으로만 가득 차올랐다.'눈앞의 여자가 얼마나 욕심이 많고 사악한 여자라는 것을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자신과 하준의 관계는 축복과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도 전혀 상관이 없다고, 오직 하준만 그녀를 사랑하면 상관없다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지내왔다. 돈과 권력을 너무 사랑하는 여자,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사악한 짓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다는 여자가 바로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중년 부인인 권영란 여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어머니가 아무리 우리를 떼어 놓아도 천륜만큼은 끊어 놓을 수 없을 겁니다. 이제 24주만 더 지나면 아이는 태어날 것이고. 저는 이 아이를 행복한 가정 속에서 아무것도 부럽지 않은 그런 아이로 키울 겁니다. 할머니께 인정받지 못하는 거 상관없어요. 아빠와 엄마만 있으면 되니까요.” '“발칙한 것!”'영란이 코웃음을 쳤다. 금방까지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던 아이답지 않게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그녀의 행동이 몹시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떠나거라! 하준을 떠나고 한국을 떠나거라! 내가 주는 돈이면 너 혼자 살기엔 얼마든지 충분할 것이다!” '영란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날카로움과 차가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영란은 다민을 싸늘하게 쳐다보고는 등을 보이면서 카페를 나섰다. '영란의 모습이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다민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비실비실 웃기만 하였다. '“권영란 여사님, 당신이 아무리 사악하고 지독해도, 당신의 손주만은 절대로 해칠 수 없을 거야!”'그러나 그녀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또 자신이 얼마나 권영란 여사를 과소평가 한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