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놀란 양이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와 있던 건지, 해준이 양과 엎어져 있는 혜단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양의 눈이 번뜩였다. 양이 벌떡 일어나 해준에게 다가섰다.

“해준 씨!”

이토록 자신을 반기는 양의 음성은 처음 들었다. 집으로 가던 길에 보이는 포장마차 안에 앉아 있던 익숙한 뒷모습.

해준은 그 익숙한 뒷모습을 향해 다가섰고, 곧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 엎어져있는 누군가. 바로 혜단이었다.

도대체 혜단과 양이 지금 이 포장마차에 왜 둘이 같이 있었던 걸까.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해준이었다.

“도대체 왜 두 사람이……?”

“해준 씨.”

그의 말을 끊어 버리고 덥석 해준의 팔을 잡은 양의 간절한 목소리로 인해 해준은 뒷말을 끝맺지 못한 채 어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좀 도와줘요.”

양의 눈망울이 이렇게 부담스럽기는 처음이었다.

“뭘…….”

“저 여자 좀 데려다주지 않을래요.”

두 손을 부여잡으며 말하는 양의 얼굴이 너무나도 간절해 보였다. 해준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양의 눈망울에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일단 혜단을 부축했다. 비틀거리는 혜단을 부여잡고는 이 상황이 도대체 뭔지 다시금 양에게 물었다.

“아니, 근데 왜 두 사람이 같이…….”

“그건…… 내 죄죠. 내 죄.”

죄라니?

“네?”

“못 알아들었으면 말아요. 그럼 부탁할게요. 미안해요, 정말.”

말과 동시에 미련 없이 사라지는 양을 얼빠진 얼굴로 지켜보던 해준이 미간을 팍 찌푸리고 말았다.

“도대체가 말이야.”

해준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후회했다. 왜 양의 단골 포장마차를 서성인 걸까. 왜 그때 양의 뒷모습을 알아챘던 것일까. 왜 양의 간절한 그 눈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을까.

왜 손이 저절로 혜단을 부축했을까.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며 자신의 품에 기댄 채 이젠 아예 정신 줄을 놓은 듯한 혜단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그녀를 보듯 다시금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곧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해준의 머릿속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도대체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두 사람이 왜? 그것도 왜 이 포장마차에서 술을?”

***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가 같이 술을 마시는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

갑자기 찾아온 해준. 안 그래도 예운의 말이 신경이 쓰여 조만간 해준을 보러 갈 참이었다.

그런데 이 자식 헛소리를 지껄이러 온 건가.

다 늦은 저녁 갑자기 들이닥친 해준은 마치 자신의 집처럼 익숙하게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들었다. 그런 그를 어이없게 바라보던 사륜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는 소파에 앉았다. 곧 해준이 맥주를 들이켜며 사륜의 곁에 앉았다. 사륜이 다리를 꼬며 팔짱을 끼었다. 해준을 응시하는 사륜의 눈빛이 못마땅했다.

한참을 말없이 맥주만 들이켜던 녀석이 한다는 소리가 헛소리인지라 사륜의 눈이 점점 살벌해졌다. 그런 사륜의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는 다시 되묻는 해준이었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한 약혼녀와 다른 여자가 같이 포장마차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걸 어떻게 생각하냐고.”

“뭔 미친 소리를…… 뭐야, 설마.”

눈썹을 꿈틀거리며 살벌한 표정을 짓던 사륜이 기대있던 몸을 갑자기 일으켰다.

“그래, 그 설마. 양이 씨랑 혜단이. 도대체 그 두 사람은 뭐냐. 난 여기가 아메리칸 줄 알았잖아. 완전 쿨해서.”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는 해준의 얼굴을 응시하던 사륜의 눈빛이 점점 매서워졌다. 혜단이 또 그녀를 찾아간 것인가.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 건 자신이건만 도대체 그녀를 찾아가서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안 그래도 도망가려고 하는 그녀를 애써 잡았는데 또다시 마음을 들쑤셔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점점 불안해졌다.

“혜단이랑 같이 있었단 말이지.”

“어, 얼마나 죽어라 마셨는지 혜단이는 이미 가버렸더라고. 도대체 그 두 사람은 뭐야? 이제 좀 말해 주지.”

“양이 씬?”

“양이 씨? 양이 씨야 뭐 멀쩡했지. 근데 약혼녀 걱정 안 하고 다른 여자를 걱정하고 있어?”

해준을 응시하던 사륜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약혼 안 해, 혜단이랑. 그리고 양이 씨 다른 여자 아니야. 내 여자야.”

순식간에 던져진 폭탄에 해준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머금고 있던 맥주가 그대로 줄줄 흘러내렸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사륜을 바라보던 해준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너!”

“너한텐 미안하다. 그런데 그 여자 내 여자야. 그러니까…….”

“진작 포기했거든.”

어이없다는 듯 사륜을 내려다보던 해준이 풀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해준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양의 눈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사륜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다만 그녀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까 걱정이었다. 그런데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해준아.”

해준은 미안하다는 듯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륜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어차피 양이 씨 마음이 이미 다른 남자한테 가 있던데 뭘 어쩌겠어. 난 나 좋다는 여자가 좋다. 그런데 그 고집쟁이는 어떻게 포기시켰냐.”

“아직 정리된 건 아니야. 조만간 이 의원님 뵈어야겠지.”

담담히 내뱉는 사륜의 말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해준은 이미 결정을 내린 사륜의 말에서 느껴지는 힘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