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침대에서 쉬고 나니 몸은 거의 회복되었다. 두껍고 무겁고 심지어 매우 더럽기까지 한 옷을 벗어 버린 것처럼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복잡했던 머릿속 생각도 함께 떨어져 나간 것처럼 마음 역시 한결 차분해졌다. 화장대 앞에 앉은 나는 조심히 이마에 손을 올려 보았다. 서늘하고 매끈한 감촉이 손에 전해졌다. 그리고 난 내 이성 역시 그렇게 차분하게 식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지독한 혼란스러움 속에서 두 가지 갈림길 중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난 여러 번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벌써 열댓 번은 생각해 보았지만 내 선택의 결과를 생각할 때마다 명치가 답답하고 쓰려왔다. 지금 당장은 쓰리지만 곧 이 감정도 무뎌질 거다. 감정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건 그다지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며 가슴 한복판을 찌르는 고통을 애써 무시했다. 차를 운전해 나오면서 난 일부러 준영의 집을 쳐다보지 않았다. 쳐다보면 분명 그의 얼굴이 떠오를 것 같았다. 슬픈 그의 눈도, 지나치게 매력적인 그의 목소리도.' 오늘 방송 역시 순조롭게 끝났다. 요즘 들어 거의 매일 내리는 비가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스태프들이 모두 퇴근할 때까지 난 내 자리에 앉아 빗물이 창문에 부서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밖에 멋있는 남자라도 있나?”'난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창문에 비친 수현의 모습을 발견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정말요?”'“네.”'난 그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계속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현이 내 시선과 자신의 시선을 맞추느라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요?”'“저기요.”'난 어둠 속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가 안경을 살짝 올리며 주의 깊게 그쪽을 주시했다. '“어디요? 난 안 보이는데, 눈도 좋네.”'“저기 있는데? 되게 잘생긴 사람.”'그가 내 쪽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통에 우리의 볼이 살짝 맞닿았다. 나와 그는 동시에 놀라 몸을 뗐고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지만 난 그냥 피식 웃기만 했다. 그가 의자를 끌어와 내 앞에 앉아 내 시선을 가렸다. '“너무한 것 아니냐고요.”'“제가 뭘요.”'그의 얼굴엔 내가 좋아하는 편안한 미소가 가득했다. '“됐어요, 몸은 좀 괜찮아요?”'그가 눈을 굴리며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푹 쉬니까 괜찮아졌어요.”'“어디가 아팠던 거예요?”'“그냥, 몸살이요.”'걱정스럽게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눈물 나도록 친절한 목소리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가슴 깊이 감사했지만 내 심장은 그 이상을 말하지 않았다. 그전에 느낀 작은 떨림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돼 버린 것처럼 내 마음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어떤 존재였던 걸까? 그는 여전히 나한테 좋은 사람이지만 내 마음은 뭔가 이전과 달랐다. 그리고 난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너무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해는 잘 되지 않지만 어쨌든 난 달라졌다. 내 마음이 나도 잘 이해되지 않지만 어쨌든 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준영의 고백으로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모든 것이 변했다. '“괜찮아요?”'그의 물음에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난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다시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수현 씨.”'난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네.”'그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난 그를 향해 겨우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그의 얼굴에 살짝 긴장하는 기색이 돌았다. 그는 참 좋은 사람이다. 언제나 자상하고, 배려심이 깊다.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난 그의 지식에 감탄하고 그것들에 대한 그의 생각에 감동 받곤 했다. 사실 박학다식한 것이라면 누구 못지않은 나지만, 다방면에 걸친 그의 지식엔 일찌감치 두 손을 든 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것들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이전 삶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도, 난 그가 꽤 좋은 부모 밑에서 훌륭하게 양육 받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는 적어도 나보다 지혜롭고 나보다 성숙했다. 아마 그와 함께 사는 여자는 정말 행복할 것이다. 그와 함께하는 내 모습을 상상할 때면 난 내가 그려왔던 이상적인 가정을 그려 볼 수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들이 좋았다. 그가 좋아서 그와 함께 있는 시간도 좋았다. 그와 함께 있을 때 전해지는 편안함과 약간의 떨림이 좋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나의 가장 큰 착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일종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를 좋아했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 느꼈던 매력을 난 그렇게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그 두 가지가 정확히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본다면 난 사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지금 무슨 말 하려는지 알 것 같아요.”'그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런 내 감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 그도 나에게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그 두 가지가 정확히 어떻게 다르냐고. 친구를 좋아하지만 그게 남녀 간의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내 마음도 그렇다고 말하면 조금 설명이 될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통하고, 함께 있는 것이 즐겁고, 함께 어울리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상대가 동성이 아니라 너무 근사한 남자였기 때문에 난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때문에 그의 고백이 낯설었고, 어색했다. 그리고 준영의 고백이 그 모든 것을 분명하게 만들었다. '“괜찮으니까 말해요, 나 들을 준비 됐어요.”'난 그가 이 순간에도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 우스꽝스럽게 심호흡을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대로 그와 만나게 되면 언젠간 난 그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흐트러진 내 마음을 쉬게 해줄 것이고, 내 마음이 온전히 그에게 향하게 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줄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된다면 그의 나이와 내 나이를 미루어 보았을 때 우린 어쩌면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생활이 불규칙하고 바쁜 나에게 같은 직업을 가진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 완벽한 파트너가 될 것이다. 난 결단을 내려야 했다. 명치가 다시 따끔거렸다. '“고마워요, 용기 내줘서, 나도 수현 씨가 참 좋아요.”'어떤 의미에서는 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현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내가 생각하는 의미와 다를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에 난 괴로움을 느꼈다. 내 자신이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지만, 난 내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였다.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수현 씨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난 참 부족한 사람이구요.”'수현의 표정이 긴장에서 기대감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감히 내가 뭐라고 이 멋진 남자의 마음을 멋대로 들었다 놓았다 하는지, 난 내 자신이 우습고 역겨웠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여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의 마음을 속이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일생 중에 처음으로 내 행복을 위해 누군가의 마음을 이용하는 순간이었다. 난 영원히 지금이 순간에 내가 느낀 감정들을, 그리고 이 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난 더 큰 괴로움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 스스로 준영을 배신하는 순간 역시 내 머릿속 깊은 곳에 새겨질 고통일 것이다. 난 한숨을 한번 내쉬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우리 연애 할래요?”'눈을 질끈 감아 버렸기 때문에 수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큼큼거리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그건 내가 물어본 말이잖아요.”'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난 조심히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보라 씨는 네, 아니오, 로 대답하면 되는데.”'난 그저 눈을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큼, 어쨌든 물어보니 답할게요. 난 당연히 ‘예스.’에요.”'“고……마워요.”'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바보 같은 말을 중얼거린 날 보며 그가 큰소리로 웃었다. 그가 조심이 내 손을 잡고 날 일으켰다. '“집에 데려다 줄게요.”'그가 말을 덧붙였다. '“이제 ‘집에 데려다 줘도 되요?’ 나 ‘집에 같이 갈래요?’라고 물어보지 않아도 되죠?”'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일단은 이 따뜻함으로 내 마음을 다독일 수 있을 거다. 일단은 이것으로 족하다. 차를 향해 걸어가던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 차는 팔아 버릴까요? 요즘 들어 별로 쓸모가 없는 것 같네요.”'난 그의 말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걱정스럽게 날 쳐다보았다. '“기분이 안 좋아요?”'난 당황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괜찮아요.”'솔직히 말하면 물론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어디 갈까요? '“어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