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렇게 됐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내 룸메이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이상 올라가 있었다. 전화기를 오른쪽 귀에서 왼쪽 귀로 옮기는 동안에도 그 목소리는 빠르고……시끄럽게 전화기 밖으로 울렸다. '“야반도주는 무슨, 진작 말하려고 했지, 근데 네가 바빴잖아 휴대전화 꺼 놓은 게 누군데?”'투덜거리는 내 말투에 그녀가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해해, 너 바쁜 거, 올림픽 방송 앞두고 바빠서 연락 안 되는 것도 다 안다고, 그러니깐 너도 내가 지금 말하는 거 이해해 줘.” '휴대전화를 왼쪽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워 넣고 가장 좋아하는 티셔츠를 대충 접어 내 몸뚱이도 족히 들어갈 커다란 트렁크에 넣으며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정식 기자라고, 인턴 따위가 아니라.”'전화기 속 목소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영국 기사가 얼마나 방송에 나오느냐가 문제지.]'나는 다시 활기차게 말했다. '“나 하기 나름이지 뭐, 연합뉴스니까 국외 뉴스도 꽤 많이 나와, 너희 방송 뉴스랑 다르지.”'[그래…… 그래……, 잘 되길 누구보다 바란다……. ]'“조금만 기다려, 특종 하나 잡아서, 올해의 기자산 탄 다음에…….”'[그래그래, 영국 기사가 우리나라에서 특종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중얼거리는 내 말을 딱 자른 그녀가 다시 걱정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애를 물가에 내놓은 심정이야 정말, 그냥 안 간다고 하지……, 네 꿈이 아나운서지 기자는 아니잖아.]'그녀는 보지 못할 것이지만 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자들이 아나운서가 되는 경우도 많다는 거 알아……, 심지어 기상캐스터가 아나운서가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기자 생활이 앞으로 네가 아나운서가 되었을 때 도움이 될 것도 알고.]'누가 아나운서 아니랄까 봐 신뢰감을 주는 차분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부드럽게 감겼다. '[애초에 약간 경험만 쌓으려 들어간 거 아니었어? 그냥 거기에서 뼈를 묻을 계획인거야? 혹시 포기한 건 아니지? KBS랑 MBC는 거의 최종까지 갔잖아, SBS도 카메라테스트는 통과했고, 그건 분명 가능성 있다는 소리야.]'“알아. 그리고 넌 통과했고 난 떨어졌지, 이가영 아나운서님…….”'시무룩한 내 목소리에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나긋해졌다. '[금방 돌아와서 시험 볼 거지?]'“응.”'전화기 너머로 만족스러운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 돌아가면 너 없겠네. ……집 되게 허전하겠다.]'“하……, 내 마음은 어떻겠니. ……영국이라니……, 영국이라니…….”'비통한 목소리에 가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밥 꼬박 꼬박 챙겨 먹고……, ]'“그래…….”'[시간 나면 놀러 갈게……, ]'“기대도 안 하네요……, 바쁘신 몸.”'전화기 너머로 다시 가영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머릿속은 아마 당사자인 나보다도 더 많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분명 예쁜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있겠지.'“야, 인상 쓰지 마 주름 생겨.”'[너 때문에 생긴 주름이니까 네가 보톡스 놔주겠지 뭐.]'“알겠어.”'우리는 잠시 웃었다. 난 괜히 찡해지려는 감정을 털어 버리며 활기차게 말했다. '“나 짐 싸야겠다.”'[그래……, 나도 자야지.]'끊겨진 전화기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나는 다시 분주히 집을 싸기 시작했다. 최소한 짐을 줄인다고 했지만 어느새 내 짐은 내 몸뚱이만 한 트렁크 하나를 꽉 채우고 막 두 번째 트렁크의 절반 가까이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한번 흔들고 다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네, 부장님 지금 막 도착했어요.”'복잡한 맨체스터 공항을 빠져나오며 양손으로는 짐을 들고, 오른쪽 어깨와 귀 사이에 휴대전화를 끼운 채 나는 힘겹게 전화를 받았다. 장시간 비행으로 내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인형처럼 생긴 금발의 사내아이가 나를 가리키며 까르르 웃었다. '[경유해서 가느라 힘들었지?]'“네, 근데 왜 맨체스터에요?”'그래, 왜 런던이 아니라 맨체스터란 말인가!'불만이 가득 담긴 내 목소리를 그가 알아주길 바라면서 나는 흘러내리는 짐을 다시 추슬렀다. '[그건……, 자네가 강준영 전속 기자이기 때문이지.]'손에 있던 짐이 털썩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부장님, 전 사회부 기잔데요.”'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번에 스포츠 신문 지면기사 보니까 잘 쓰던데 뭐.]'괜한 욕심에 동기 인턴 일까지 끌어다 한 게 화근이었던 걸까……, '“그건, 말만 스포츠 기사지 누가 이적한다는 내용의 평범한 기사였습니다. 전 경험이 없어요.”'[걱정 마, 도와줄 사람 많이 있을 거니까.]'난 이제 이를 악물고 말하기 시작했다. '“부장님, 저는 정식 기자로서, 사회적 이슈를 취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떠날 땐 이런 말씀 없으셨지 않습니까.”'딱딱한 내 말투에도 빌어먹을 부장님의 목소리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내가 지켜봤는데, 자네 싹수가 보여, 자네가 물어 온 사건들 보고, 자네가 인턴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지, 그래서 내가 정식기자로 승급시켜 줬단 말이지.] '싹수가 보인다는 말에 내 단순한 기분이 어느새 노곤해지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난 다시 투덜거렸다. '“감사합니다만, 요점을 벗어나신 것 같은데요.”'[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지, 이번에 우리 UTN에서 축구 관련 프로그램을 하나 편성할 계획이야 월드컵이 몇 개월 안 남은 데다, 강준영이 때문에 여자들까지 밤늦게 클럽축구를 본단 말이야.]'“제가 알기로, 우리 연합뉴스는 그 어떤 언론사보다 많은 특파원을 해외로 파견한 상태고, 영국에도 상당수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축구 관련 뉴스는 그들이 써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평소 때 같으면 조용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경청했을 거다. 난 그를 존경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데다 내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는지 나는 계속 그에게 버릇없이 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부장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인물이 없어 인물이, 그 코너를 진행하기에 적합한 인물이.]'“그래도 저는 싫습니다. 운동선수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려고 온 게 아닙니다. 정치부나 사회부로 보내 주…….”'나는 문득 말을 멈추고 그의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부장님 방금……, 코너……라고…….”'이 대화에서의 승리를 예견하는 듯 부장의 말이 한층 더 느긋하게 변했다. '[아, 난 정말 젊고 모험적인 부장이란 말이지.]'그의 실없는 소리는 분명 맞는 것이긴 했다. '[이번에 편성하는 축구 관련 프로그램은, 그날그날 경기예상, 분석, 축구 선수들 인터뷰, 구단소식, 그밖에 가십거리들을 기자가 전해 주는 식으로 간단하게 만들어질 거야, 반응이 좋으면 시간을 좀 늘릴 수도 있고……, 아! 특히 강준영이 위주로 말이야.]'“그……, 그럼 아나운서들을 시키시지요, 왜 저 같은 인턴 기자를…….”'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말했잖아, 싹수가 보인다고, 앉아서 기사만 달달 외워 전달하라는 거 아니야, 그런 거였으면 정말 아나운서를 시켰겠지, 돌아다니면서 가십거리들 열심히 물어 날라 봐, 아, 그리고 이 프로그램 진행하는데 자네 외모도 썩 어울리고 말이야, 젊고, 발랄한 느낌, 목소리도 적당하고, 너무 무겁지 않고 경쾌하달까?]'지금껏 그런 나의 특징들이 다른 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에서 번번이 낙방한 이유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오늘부터 내 목소리와 외모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말이 기자지, 아나운서 같은 역할이잖아 아나운서 해보고 싶다며?]'“네?”'[저번에 회식 때 울먹거리는 것 들었어.]'“아…….”'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