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말로 설명하기 힘든 날씨였다. 아침에는 한여름처럼 청명하기 짝이 없었는데 점심이 지나고는 느닷없이 안개가 몰려오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금방 지나가는 소나기라 여긴 비는 더욱 거세졌고 천둥 번개까지 번쩍번쩍 모습을 드러냈다. 일기예보와 달리 변덕을 부리는 날씨에 사무실 사람들의 볼멘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퇴근하고 친구 만나기로 했는데 날씨가 이래서야…….”

“저도요. 모처럼 봄 같은 날씨라 걸어서 퇴근하려고 했는데.”

“자기들, 아직도 기상청 말을 믿어? 기상청 말을 믿느니 동네 개 짖는 소리를 믿지.”

성빈의 말에 나란히 앉아있던 직원들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오전에 비해 차가워진 사무실 공기에 커피마저 덧없이 식어버렸다. 거의 빈 종이컵에 입술을 대고 호록호록 소리를 내던 직원들의 귀가 돌연 쫑긋 일어섰다.

“부장님이다, 부장님.”

“얼른 자리로.”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가래 섞인 기침 소리에 모두가 제자리로 달려갔다. 언제 쉬었냐는 듯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진지해졌다. 녹말 이쑤시개로 앞니를 후비적대며 들어오던 김 부장은 걸음을 멈추더니 허리에 손을 척 얹었다. 가느다란 눈매 사이로 움직이는 눈동자가 아주 매서웠다.

“이거 봐. 이거 봐. 또 업무 시간에 노가리 깠지!”

그는 사무실 중앙 테이블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그 위에 놓인 빈 종이컵과 과자봉지를 가리켰다. 미처 치우지 못한 수다의 잔해를 보고 직원들이 탄식을 쏟아내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질 불호령에 다들 놀란 거북이처럼 목을 잔뜩 움츠렸다.

“프로젝트 구상하라니까 노상 주둥이나 털고 말이야. 기획안 다 짰어? 어? 이사님께 올릴 기획안들 다 짰냐고!”

“어유. 또 시작이다.”

성빈은 눈썹을 잔뜩 구기고 옆자리 민아에게 속삭였다.

“내가 속이 문드러진다. 문드러져. 이것들 데리고 일하려니.”

김 부장은 부러진 이쑤시개를 쓰레기통으로 던지고 개인 사무실로 들어갔다. 직원들은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고 김 부장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김 부장이 의자에 기대앉는 것을 확인한 성빈은 몸을 낮추고 후다닥 테이블로 달려가 쓰레기들을 치웠다. 꽉 차오른 쓰레기통을 들어 올린 성빈은 부장실을 향해 무언의 욕을 날리고 나가버렸다.

다시금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조금 전 수다에도 끼지 않고 기획안을 써내려가던 재인이 두 팔을 쭉 들어 올렸다. 한 자세로 오랜 시간 키보드를 두드렸더니 목부터 어깨까지 뻐근했다. 작은 하품을 토하며 어깨와 팔을 빙글빙글 돌리던 그녀는 아영과 눈이 마주치자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 대리도 쉬면서 해.”

“네.”

“회사 안에 안 좋은 소문이 파다해서 그런지 부장님도 예민하시네.”

아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게실 갈 건데 같이 가서 커피 한 잔?”

잠깐 망설이던 재인은 아영의 제안에 미소를 지으며 따라나섰다. 휴게실로 들어온 두 사람은 각자의 취향대로 커피를 타고는 마주 보고 앉았다. 손바닥 전체로 퍼지는 온기에 피로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는 아영을 향해 재인이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소문이요?”

재인의 질문에 의외라는 듯 아영이 피식 웃으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궁금해? 이 대리는 이런 거에 관심 없잖아.”

“그렇긴 한데……. 혹시나 해서요.”

자신에게도 영향이 미치는 소문일 수 있으니 확인은 하고 싶었다. 사내 정치에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상한 흐름에 휩쓸려 일찍 퇴사하고 싶은 마음 역시 없었다.

“별 건 아니고. 관리자들이 대폭 바뀐다는 말이 있더라고.”

“아…….”

“자기랑은 관련 없지. 아, 물론 우리 부장이 바뀌면 말이 달라지지만.”

“그래서 부장님이 예민하셨군요.”

“그렇지.”

재인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휴게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배병수 차장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 대리. 나도 커피 한 잔 타주라. 이상하게 내가 타는 건 맛이 별로더라고.”

“네?”

“여자의 손길이 닿아야 맛이 있다는 말이야.”

배 차장은 쟁반 위에 뒤집어진 자신의 머그잔을 콕콕 가리키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재인이 거절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에 아영이 헛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