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지금 윙크를 하는 건가?

벙어리 냉가슴 앓듯, 답답한 마음에 도훈은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벙어리 냉가슴에 때 아닌 망치를 휘두른 선우만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가은이 누나 좋아해요?

설마 선우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좋아하다니? 설마. 먹물을 뿜은 여자를!

물론 가은이 다른 여자들과 다른 건 인정했다. 그녀가 다른 여자들처럼 유기체로 보이진 않았다. 너구리나 낙타, 아메바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가은이 사과 꽃의 소희는 될 수 없었다. 도훈에게 소희는 아주 많은 의미였다. 그중 하나는 사랑이었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었다.

그 날은 포슬포슬 눈이 내리기 시작하던 날이었다. 꽤나 추운 날이었지만, 춥다고 느끼지 못했다. 종종걸음으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친구들이 히히거리며 뒤따라오고 있었지만, 그 길은 오로지 혼자만의 마이웨이였다. 멀리서 털모자를 쓰고 있던 소희를 보았을 때였다. 콩닥콩닥거리던 심장 소리가 쿵쿵 소리로 변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온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크게 들렸다. 그리고 함박눈처럼 환하게 웃던 소희를 보는 순간 터질 듯한 심장박동에 두 주먹을 얼마큼 세게 감아쥐었는지 쥐가 날 정도였다.

그게 버그가 걸려버린 사과 꽃 사랑이었다.

하얀 눈이 내리던 첫사랑은.

터질 듯이 빠르게 뛰는 심장, 온통 하얀 세상, 그 속에 유일한 한 사람.

바로 그거였다.

하지만, 가은을 보고 그날처럼 심장이 뛰어본 적 없다. 게다가 소담하게 핀 사과 꽃과는 달리 활짝 피어난 붉은 꽃은 이를 드러내는 변종이었다.

뭐랄까?!

너무 전투적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그날처럼 터질 듯한 심장은 고사하더라도, 심쿵까지도 바라지 않더라도, 콩닥콩닥 정도는 뛰어줘야 하는 건 아닌가!

그래도 남녀 사이인데 말이다.

하지만, 콩닥콩닥은커녕 자꾸만 먹물을 내뿜은 장면만이 압도적으로 떠올라 절로 눈살이 찌뿌려졌다.

“호감이라니. 말도 안 되지. 호기심 정도가 적당하겠군.”

가은이 다른 여자들처럼 유기체로 보이진 않는 걸 관심 혹은 호기심 그 이상의 감정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도훈은 낮 동안에도 내리지 못한 알 수 없었던 자신의 감정을 호기심으로 결정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갈증이 일었다.

시원한 게 필요했다. 도훈은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 시간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던 가은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주했다.

“세상에 얼굴이 너무 많이 푸석거리네. 애들 생각해서 최소한만 발랐더니 그런가. 어디 오래간만에 팩이나 한번 해볼까.”

가은은 진주 팩을 꺼내 들었다. 성미가 남자 친구랑 홍콩 여행 후 선물한 팩은 수분감이 아주 풍부해 다음날이면 나 완전 촉촉해요, 라며 자체발광 아우라를 뿜어냈다.

가은은 팩을 뜯어 검은 진주 팩을 꺼내 들었다. 거울을 보고 팩을 이목구비에 맞춰 붙였다. 한쪽으로 살짝 기우는 건 같아 다시 떼어 정확히 눈을 중심으로 붙였다. 얼굴은 온전하게 검은색의 팩으로 뒤덮였다.

“아차차.”

팩을 다 붙인 가은은 그제야 욕실에 빨아 놓고 나온 속옷이 생각났다. 다른 건 그냥 세탁기로 하면 되지만, 속옷만큼은 남에게 맡기기가 어색했다. 그래서 매일 속옷을 빨아 방에 말리곤 했다.

“정신머리하고는.”

가은은 하는 수 없이 검은 팩을 얼굴에 붙인 채 방을 나섰다. 시간은 늦었고, 모두 잠들었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히끅꾹.”

어둠 속 성난 코뿔소처럼 눈을 부릅뜬 채 서 있는 도훈의 등장에 가은은 너무 놀라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뭐야, 이 시간에?

검은 얼굴은 뭐지!

병이 더 악화된 건가?

내가 왜 이 시간에 검은 얼굴을 보고 있는 거지!

지난밤 그 기상천외한 쇼가 소용이 없었나?

호감은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