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색 스니커즈의 고무바닥이 규칙적으로 작은 소음을 만들었다. 정면을 주시하며 걷는 기은의 자세는 교과서에 나오는 그것처럼 단정하다 못해 딱딱했다. '기은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흘끔 보고 조금 더 속도를 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각이었다. 가을을 맞아 오늘부터 여름 제품이 대폭 세일에 들어갔고 신제품도 출시를 앞두고 있어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어머니의 집요한 전화를 피하는 것이 수월했지만 귀가도 그만큼 늦어졌다. '깨끗하게 정돈된 화단을 돌아 지하 주차장 입구에 선 기은은 익숙하게 사방을 살폈다. 지상 주차장이 워낙에 넉넉한 아파트인지라 지하 주차장까지 붐비는 일은 드물었다. 어깨 아래로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기은은 조용히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따라오는 것은 바람 한 줄기에 묻은 달빛 정도였지만 기은은 한번 더 주변을 훑어보았다. 공연히 순찰을 도는 경비 아저씨라도 마주치면 여러모로 곤란할 테니까.'“휴.”'마침내 주황색 등이 켜진 주차장 구석에 다다른 기은은 숨을 몰아쉬며 커다란 가방을 열었다. 지금쯤 인기척을 알아들은 녀석이 가까이서 식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적당한 양을 고심하던 기은은 가지고 온 전부를 접시 위에 쏟아냈다. 종일 굶었을 녀석을 상대로 일일 적정 섭취 칼로리를 계산할 수는 없었다. '늦은 밤, 인적 드문 주차장 급식은 한 마리 고양이를 위한 것이었다. 머리통에 하트 모양으로 생긴 점과 하얀 양말을 신은 것 같은 발을 제외하고는 온통 노란색 털을 가진 고양이. 녀석과의 인연은 두 해 전 슬그머니 시작되었다.' '햇살이 따스했던 어느 날, 사과 박스 속에 담겨진 두 마리의 아기 고양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방치되어 있었다. 한 마리는 노랑이였고 또 한 마리는 짙은 색의 삼색 줄무늬를 가진 장난꾸러기였다. 녀석들은 아파트 관리 사무소 앞에서 며칠간 자리를 차지하고 따스한 보금자리를 기다렸다.'“야옹.”'어린 고양이들은 버림받았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천진난만한 소리로 존재를 알리곤 했다. 덕분에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기은은 괜스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목구멍에 뭔가가 걸린 것처럼 개운치 않은 기분, 그럼에도 기은은 끝내 고양이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동물이라면 질색하는 어머니 때문이기도 했고, 스스로도 살아 있는 생명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다행히 얼마 후 누군가가 키우겠다고 데려가면서 아기 고양이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일 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고양이들은 처음보다 큰 상자에 담겨 그 자리에 또다시 버려졌다. 녀석들은 예전보다 부쩍 자라 있었지만 바짝 말라 있었고 더는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두 녀석은 상자를 뛰쳐나가 아파트 주변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고, 과거와 달리 사람을 철저하게 피해 다녔다.'지난 해 겨울, 유난히 바람이 매서운 밤, 지하 주차장 구석에서 가느다랗게 우는 모습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기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잊고 지냈다. '“냐아아아.”'주차장에 들어선 기은을 본 고양이가 낯선 사람을 경계하며 낮게 울었다. 노란색 털을 가진 녀석은 평소처럼 황급하게 몸을 숨겼지만, 이상하게도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멈추어 섰다. 기운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녀석이라 도망칠 힘도 없었던 걸까. 얼핏 본 노랑이는 훌쭉하게 마른 몸뚱이에 윤기를 잃고 거칠어진 털을 가지고 있었다.'“미안.”'기은은 고단한 녀석의 휴식을 느닷없이 방해한 것 같아 짧게 사과를 하고 걸음을 옮기려 했다. 가만, 흰색 하트를 가진 노랑이라면 분명 항상 함께 다니던 친구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서야 기은은 자신의 발소리에 움찔거리면서도 자리를 뜨지 않는 노랑이를 지나쳐 꼼짝도 하지 않는 삼색 고양이를 발견했다. 삼색이는 온기가 남은 차 밑에서 모로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아…….”'그랬구나. '짧은 탄식이 뽀얀 입김과 함께 터져 나왔다. 비로소 삼색이가 죽었음을 눈치 챈 기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기은의 시선이 노랑이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영롱한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저편에 아득하게 가라앉은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외로움.'붙박이처럼 앉아 있는 노랑이는 거울 속에서 마주하던 누군가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몇 번이나 노랑이와 삼색이를 번갈아 보던 기은은 마침내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듯 무릎을 숙였다. 며칠 전 구입한 짙은 녹색 머플러가 차가운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은은 도톰하고 따스한 천을 꼭 움켜쥐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너, 배 안 고파?”'그것이 노랑이와의 시작이었다.''그때부터 기은은 거의 매일, 지하 주차장 한구석에 노랑이를 위한 물과 사료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경계심이 대단한 녀석은 아직도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기은의 말간 얼굴 어디에도 실망감은 없었다. '버려진 개는 유기견.'버려진 고양이는 유기묘.'버려진 사람은 유기은.'자신 역시 같은 상처를 겪었기에 적당한 거리가 주는 안도감을 이해했다. 버림받고 싶지 않아 다가오지 못하는 망설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갈게.”'서로가 길들여질 만큼은 가까워지지 않는 관계. 그런 것에는 이미 익숙했다. 기은은 어둠 속에 비치는 그림자에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를 떴다.''태진은 미등도 켜지 않고 주차된 차 속에 앉아 있었다. 뚜렷한 윤곽을 가진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반듯한 선을 자랑했다. 팔짱을 느슨하게 엮은 태진은 가죽 시트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며칠 전 이사한 아파트는 조금 오래되긴 했지만 깨끗하고 조용해서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다. 특히나 한적하고 커다란 주차장은 복잡한 상념을 정리하기 좋았다. 오늘도 네모진 공간에는 그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었다. 불과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태진의 시선이 황색 등 아래의 여자에게로 향했다. 단순한 티셔츠에 짙은 색의 청바지를 입은 여자는 큰 백팩을 메고 있었다. 여자는 주차장을 가볍게 훑어보더니 망설임 없이 가방을 열었다. '차에 일수 전단지라도 붙일 셈인가. 무심한 표정으로 시선으로 돌리려던 태진의 시선이 붙잡혀 버린 것은 그때였다.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린 여자의 얼굴이주차장 벽의 주황색 등 아래 또렷하게 드러났다.'그 여자다.'“후우.”'태진은 저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맹세코 의도치 않은 목격이었다. 이사 오는 날 보았던 장면을 지워내려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도리어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말았다.''이사를 마치고 필요한 몇 가지를 구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평소라면 시간 절약을 위해 당연히 엘리베이터를 이용했을 테지만 그날따라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그래서 태진은 운동을 겸해 10층이 넘는 아파트 계단을 가볍게 뛰어 올라가기로 했다.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오르던 그는 8층과 9층 사이에서 잠시 멈추었다. 느슨해진 운동화 끈을 다시 매기 위해서였다. 막 허리를 굽히려는데 서너 층 아래 계단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하는 거 ……니?”'“……고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