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욱은 호텔로 출근하는 즉시 아버지께 전화를 넣었다. '“아버지, 접니다. 일어나셨어요?”'-오냐. 일어났다. 미세스 황이 내가 이 시간까지 자도록 둘 위인이더냐?'수화기 너머로 미세스 황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강욱은 그 소리에 모처럼 긴장을 풀고 기분 좋게 웃었다. 미세스 황은 아버지의 비서였다. 현재 49세였고, 20세 초반에 미망인이 되어 그 후로 쭉 아버지를 보필하고 있었다. '“몸은 괜찮으세요?”'-그놈의 괜찮나 소리, 지겹지도 않냐? 괜찮다고 해도 매번 똑같이 물어.'“걱정되니까 그렇죠.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녀석도 참!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아무렇지 않다. 그러니 내 걱정일랑 말고 중요한 일 앞두고 있는 네 컨디션이나 챙겨. 그나저나 나이아스는 어떠냐? 잘 지내?'“네. 패션쇼 준비로 많이 바쁘기는 해도 별 탈 없이 잘 지냈어요. 그런데 아버지?”'강욱은 미간을 좁히며 조심스레 아버지를 불렀다.'“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절대 실수하시면 안 됩니다.”'-무슨 실수를 말하는 게냐?'“나희를 실수로라도 나이아스라고 부르시면 안 된다고요. 나희는 우리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데……. 알고 계시겠지만, 진희정 사장님은 나아아스라는 꼬맹이 적 이름을 행여 나희가 기억할까 봐 일부러 비슷한 어감이 나도록 이름을 지으실 만큼 많이 조심스러워 하셨어요.”'-오냐. 무슨 말인지 알겠다. 조심하마.'강욱은 애잔함이 느껴지는 아버지의 음성에 가슴이 아렸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나이아스를, 아니 나희를 마음껏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조금 속상하고 서운하더라도 꾹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는.'-그 아이는 언제 만날 수 있냐?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데.'“휴…….” '-오늘따라 한숨이 긴 걸 보니 나이아스와 첫 대면하는 날이라고 긴장한 모양이구나?'“네. 사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어쩌다 깜박 잠이 들었다가도 금세 헤니가 나타나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꿈을 꾸는 통에 놀라서 깨곤 했거든요. 저 정말 바보 같죠?”'강욱은 불안함을 감추지 않았다. 아버지라면 이런 자신을 이해해 주리라 믿었다. '-헤니 그놈은 널 꿈에서까지 괴롭히나 보구나. 내 아들이지만 정말 고약한 놈이야! 행여 또다시 꿈에 나타나서 괴롭히걸랑 아주 죽을 만치 때려 주거라. 그놈은 흠씬 두들겨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것 같으니까. 내가 조금만 기운이 있어도 그럴 텐데, 에이!'강욱은 맞장구를 치는 아버지의 말에 피식 웃으며, 아버지만 믿고 다음에는 꼭 그러겠다고 말했다. '-아무튼 네가 고생이 많구나. 미안하다. 따지고 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이인데, 모조리 다 너한테 미루기만 하는 것 같아.'강욱은 풀이 죽은 아버지의 음성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버지가 갈 곳 없던 저희 모자를 따뜻하게 받아 주셨던 그 순간부터, 아버지 일이 곧 제 일이었어요. 더구나 나이아스와 관련된 일이라면 절대 아버지 일이기만 한 건 아니고요.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오히려 전 아버지께 감사해요. 저를 내켜하지 않던 진희정 사장님께서 생각을 바꾸신 건 순전히 아버지 덕분입니다.”'-내 덕 같으냐? 아니. 내 덕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지키고 간직해 온 네 녀석의 순한 사랑을 그 사람이 믿었기 때문이었어. 그러니 힘을 내. 다 잘될 테니까.'“네. 그럴게요.”'강욱은 아버지와 이야기를 마친 후 미세스 황과도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 식사는 잘하세요?”'-조금밖에 안 드시지. 그렇다고 걱정할 건 없어. 원래 입이 까다로우시잖아.'“알아서 하시겠지만, 아버지 잘 부탁드려요.”'-염려 붙들어 매!'미세스 황은 시원스런 성격에 걸맞는 시원한 대답으로 그의 불안한 마음을 떨쳐 주었다.'-나도 말 나온 김에 이 도령한테 부탁할 게 있어.'“말씀하세요.”'-나이아스하고 꼭 잘돼야 해! 회장님이나 이 도령을 위해서도 그래야 하지만, 나이아스를 위해서도 꼭 그래야 해. 혼자라서 많이 외롭고 힘들 텐데, 이럴 때일수록 가족이 있어야 한다고. 사정이야 어쨌든 회장님과 나이아스는 가족이야. 가족은 함께 있을 때 행복한 거고. 알지?'“네.”'-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은 전적으로 이 도령한테 달렸어.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는 사람한테 나까지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지만, 믿을 사람이 이 도령뿐이라서 말이야.'“네. 잘 압니다.”'강욱은 이미 다져질 대로 다져진 가슴속에다 또다시 굳은 다짐을 채워 넣었다. 그 누구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도록, 그 누구도 후회하지 않도록, 그래서 모두가 행복해지도록 최선을 다 하리라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나희의 사랑을 반드시 가져야 해!’'강욱이 전화를 끊자마자 강 비서가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송지애 씨가 오늘 오전 중으로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강욱은 그러라고 지시한 뒤 책상 위에 있는 서류들을 결제하기 시작했다. ''강욱은 지애의 안색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희정의 작업실에서 맞닥뜨렸던 날에 비하면 살도 많이 빠진 듯 보였다. 짐작컨대 기찬과의 갈등으로 마음고생이 심한 탓이었다.'“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이 사장님.”'“아닙니다. 그렇잖아도 기다렸습니다.”'“그러셨어요?”'“네. 그럼, 저와 했던 약속은 어떻게…… 지키실 수 있겠습니까?”'“그럼요!”'강욱은 지애의 대답을 듣고서야 얇은 봉투 하나를 꺼내놓았다. '“이번 쇼를 펑크 낼 경우 지애 씨가 물어야 하는 위약금과 제가 개인적으로 약속했던 사례금의 절반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최기찬 씨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지애는 봉투를 벌려 수표를 확인했다. 그녀가 생각했던 액수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이 정도라면 온라인 쇼핑몰을 창업하는 건 문제없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봉투를 핸드백에 넣었다. '“기찬 씨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 사장님이 원하시던 대로 할 테니까요.”'“그래요?”'기찬은 진 패션의 수석디자이너였다. 그는 연인이었던 지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희에게 사랑을 느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희가 인턴사원으로 진 패션에 들어올 당시만 하더라도, 기찬은 나희를 그저 귀여운 여동생쯤으로 여겼다. 그래서 때로는 다정한 오빠가 되어 다독이고 때로는 무서운 상사가 되어 나무라며 나희와 허물없이 지냈다. 그러다 얼마 안 가 나희를 여자로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만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희 역시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기찬은 지애에게 일방적으로 결별을 통보하면서 나희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다. 그런 그가 지애의 엄포가 겁이 나서 나희를 순순히 포기할 리는 없었다. 지애를 설득하든, 아니면 나희를 구워삶든 해서라도 계획대로 약혼하고 말 사람이었다. '“지금 최기찬 씨는 어디 있습니까?”'“리허설 하고 있어요. 나희 씨가 눈치 채면 안 되니까, 마지막까지 할 건 해야 한다고 제가 시켰거든요.”'“그럼……!”'혹시나 하는 기대에 찬 강욱의 눈을 보며 지애가 고개를 끄덕였다.'“정말입니까? 이거 참, 의외군요! 쉽게 포기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오늘 아침까지도 완강했어요. 하지만 저한테 잡힌 결정적인 꼬투리 때문에, 하늘이 두 쪽 나도 나희 씨와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결국 포기했어요.”'강욱은 지애가 말하는 결정적인 꼬투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그런데 그가 묻기도 전에 지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저, 임신했어요.”'임신! 강욱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라셨죠?”'강욱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지애가 임신했다면 아기 아버지는 보나마나 기찬일 것이다. 강욱의 입장에선 자신의 짐작이 맞는지 지애에게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곤란하시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기 아버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