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누구에게도 공평한 것이어서 매섭던 그해 겨울도 쏜살같이 지나갔다. 따스한 봄이 왔을 때 환국의 화려한 궁궐은 오만 가지 빛깔로 물들었고, 화련은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인세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잘 닦인 예쁜 돌길을 감싸듯이 가득 피어난 연분홍의 벚꽃들은 동풍이 불어올 적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그 때문에 수백의 내시들이 세 시각 간격으로 길 위에 떨어진 꽃잎들을 치워야 했지만 그 수고로움을 감안하더라도 그 길을 걷고 있으면 정말 선계로 떨어진 환몽(幻夢)을 꾸는 기분을 느끼게 하였다.'그리고 그보다 더욱 화련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적령호의 풍경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들이 모인 듯 알록달록 호수를 뒤덮은 꽃들과 호수 가장자리에는 어김없이 물에 떠서 살랑거리는 예쁜 연꽃들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잠시나마 물에 대한 무섬증도 잊고 호수가로 걸어가 가까이서 구경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물 냄새를 맡자마자 금세 그 생각은 속으로 다시 쏙 들어갔지만.'여름은 궁에 생명력이 절정을 이루는 계절이었다. 색색의 화려함에 더해 초록빛이 피어나 온 세상에 생명의 향기를 퍼뜨렸다. 여름날 밤이 되면 수만의 풀벌레 소리만으로 어느 악단 못지않게 훌륭한 음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비록 더위에는 약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일할 의욕이 솟아나는 시기였다.'가을은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여무는 계절이었다. 높은 하늘은 온 세상을 편안하게 안아 주었고, 나뭇잎들은 화려함을 벗고 겸손한 빛깔로 물들었다. 어쩐지 가을에는 여름보다 한껏 여유로운 분위기가 되었고 그 때문에 화련도 시원한 가을바람을 흠뻑 맞으며 휴식을 취했다. 그 휴식이란 것이 대부분 대금을 부는 것이었지만 이제 그 정자는 가지 않았다. 그 정자의 주인이 태자의 것이라는 사실을 안 뒤로부터는 감히 그곳에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허나 아직까지 그곳에서 본 맑고 고요한 겨울밤 적령호의 풍경은 잊지 못하였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한 번이라도 더 기회가 된다면 그곳에 앉아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대금을 불어 보고 싶었다. 물결에 어른거리는 푸른 달만큼은 언제나 말없이 노래를 들어 주는 가장 좋은 친구였으니까. 물론 그것은 이제 평생 이루지 못할 작은 소망일지도 모른다.'또다시 궁에도 겨울이 찾아왔고 화련은 한 해 전보다 더 성숙한 모습으로 일을 하였다. 동소주방에서 다른 처소로 배속된 후로 양진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이제는 마음껏 사람들을 사귀며 나름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비록 여전히 일은 고되었지만 음식은 언제나 맛있었고 처소는 겨울에는 따스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였다.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은 여전히 아득하기만 하여도 화련은 길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다시 네 번의 바람이 바뀌었고, 또 바뀌었다. 세월은 바람처럼 흘러 오 년이 지나 화련이 십오 세가 될 무렵. 마침내 화련과 동무들은 처소를 배정받게 되었다. 일주일 후면 견습 기간이 끝나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만약 세월이 흘러 정식 나인이 된다면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 생각시 시절 배정된 처소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즉, 그곳은 집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그 사이 특별한 일이 몇 가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하늘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영락(永樂)년에서 건평(乾平)년으로 넘어가니, 한 해 전 상황(上皇)이 승하하고 태자가 무사히 황위를 양도받았다. 하늘이 바뀌니 그 아래 있던 많은 사람이 궁에서 나가고 또 그만큼 많은 사람이 궁으로 들어왔다. 아직 나이가 젊어 정정한 황후는 태후가 되어 태후전인 무화궁(無禍宮)에 들어갔고, 태자비는 황후로 승격되어 중궁의 주인이 되었다. 황제에게는 그동안 한 명의 후궁이 더 들어와 총 둘의 후궁이 있었는데, 황태자 시절 맞이한 은국의 공주였던 숙원(淑媛) 민(閔)씨는 자연스레 황후 바로 밑의 무품계 최고 후궁인 귀비(貴妃)가 되었고, 나머지 한 명의 후궁은 재빈(才嬪) 이(理)씨로 환국 최고 상단인 금와(金蛙) 상단 대방의 딸이었다. 그것은 황제가 황위를 받으면서 결정한 일로, 중인도 아닌 상민인 이씨를 후궁에 앉히는 파격적인 일을 감행하여 처음부터 대신들의 수많은 반발을 받기도 하였다. 허나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으니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재빈 이씨에게 홀려 그런 일을 했다고 볼지도 몰랐다. 허나 가례도 치르지 않고 그 후에도 재빈 이씨의 처소를 거의 찾지 않는 것을 보면 그것과는 사정이 달라 보였다.'황후 정씨는 국모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찬밥 신세였다. 밭이 있어도 씨를 뿌려야 자라는 법, 당연하게도 여전히 그 밑에 소생은 없었고, 다만 귀비 민씨에게서 공주가 하나 태어나 올해로 네 살이 되었다. 공주라 할지라도 유일하게 황제의 용종(龍種)을 잉태하고 무사히 그 아기씨를 출산한 몸으로서 귀비는 자신의 숙부인 걸윤(傑倫)과 함께 황후조차 넘보지 못할 권세를 쥐게 되었다. 귀비의 밑으로 옛 서언 일파와 북언 일파에서 축출당한 자들이 모여 중언(中言) 세력을 형성하니 이제는 북언 세력과 거의 대등할 정도로 세가 급속히 확장되었다. 그것을 보면 너무 세가 커진 북언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황제가 일부러 귀비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라는 소문도 결코 허황된 것만은 아닌 듯 보였다.'그러한 급격한 황실의 변화와 상관없이 다섯 해 전 겨울 궁에 들어온 아이들에겐 그저 이제 자신의 집이 될 처소가 어디가 될 것인가, 그것만이 가장 중대한 관심사였다. 원래 나이가 많았던 아이들은 벌써 스무 살이 가까워 이미 완전히 성인이 되었고, 애기처럼 어리던 아이들도 이제 피어오르는 나이가 되어 대부분 성년인 십오 세를 넘겼다. 다들 물이 올라 이제 남녀의 깊은 정을 알 만한 나이가 되었던 것이다.'그로 인해 한 가지 재밌는 모습이 보였다. 비록 궁녀의 기본적인 소양인 삼덕사행에는 안 들어가지만 궁녀에겐 어쩌면 가장 중요하면서도 또 어찌 보면 전혀 필요 없는 한 가지 소양이 요구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미색이었다. 궁녀는 기본적으로 황제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을 수 있는 여인들이었으므로 수천 명 가운데 단연 눈에 띄기 위해서는 응연(應然) 그 미태가 뛰어나야 했다. 물론 그 가능성이 지나가다가 벼락을 맞을 만큼 희박하여 사실은 전혀 필요 없기도 하였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궁 안의 것은 무엇이든 곱고 아름다울수록 좋으니 상궁들도 그것을 장려하였다. 그래서인지 궁녀들은 마치 풍습처럼 누구든 항상 자신을 곱게 꾸미고 다녔다. 아이들 역시 대부분 이제 자신의 연지분을 갖고 곱게 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몇은 특히 눈에 띄었는데 그중 하나는 영화였다. 원래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희어 전형적인 미인상이었는데, 점점 자랄수록 더 여물어 가더니 이제 누가 보아도 화용월태 한 떨기의 완연한 미화(美花)가 되었다. 그 미태가 무척 뛰어나 또래 아이들 중에서는 거의 독보적이었다.'허나 어디든 예외가 있어, 아이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어서 그중에는 황제의 눈에 드는 것을 아예 포기한 것인지 그다지 꾸미지 않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사이에 바로 화련과 신제가 끼어 있었다. 일단 좋은 연지분을 살 만한 형편도 안 되었고, 그런 것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히 요새는 정 상궁의 처소에 매일같이 들락거리며 배우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바로 오라비에게 끝내 배우지 못한 삼경(三經)이었다.'여기서 재밌는 것을 한 가지 찾을 수 있는데 웃기게도 아이들 중 가장 독보적인 미색은 한껏 꾸미고 다니는 영화가 아닌 전혀 꾸미지 않고 다니는 화련이라는 사실이었다. 한때 환국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었던 친모를 쏙 빼닮은 화련은 해가 갈수록 그 숨어 있던 꽃봉오리가 점점 피어났다. 피부는 여전히 백옥처럼 고왔고 조그마한 얼굴 안에는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맺혀 있었다. 마치 꽃이 피어나듯 입술은 해가 갈수록 더욱 붉은빛을 띠어 해당화처럼 매혹적이었고, 코는 올곧게 솟아 수려한 맵시를 자랑하였다. 매끄러운 선으로 뻗은 넓은 이마 밑에는 선량한 기운을 풍기는 고운 아미가 좌우로 수놓아져 있었고, 그 밑으로 첩모(睫毛, 속눈썹)가 나비를 유혹하듯 길게 솟아 있었다. 그리고 보석이 박힌 것 같은 맑은 눈동자는 고운 빛깔로 언제나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앞을 향했다. 그 모습이 단순히 보기만 좋은 것이 아니라 왠지 모를 향기를 갖고 있어서인지 얼핏 보기에도 수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바로 눈에 띄었고 다들 한 번 보면 쉬이 잊지 못했다. 어느새 그에 관한 풍문까지 은근히 궁에 퍼지고 있었다. 보통 아무리 고운 아이가 있어도 궁녀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은 거의 내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기에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화련의 옆에는 여전히 신제가 붙어 다녔다. 신제는 여전히 댕그라니 커다란 눈이 특징이었다. 볼살도 여전히 통통하였고, 전체적으로 아직 곱다기보다는 아이처럼 귀여운 모습이었다. 키도 상당히 큰 편인 화련과는 달리 오 척(약 150cm)이 될까 말까 하여 그런 얼굴과 잘 어울렸다. 오히려 그런 개성적인 모습 때문에 화련과 같이 다녀도 별로 이상하지 않게 보였다. 얼핏 보면 고운 선녀가 자신의 애완동물 비슷한 것을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신제는 화련의 말이라면 해가 서쪽에 뜬다 하여도 믿고 따르니 어찌 보면 정말 그와 별로 다르지 않은 관계라고 봐도 무방했다.'그리고 또 다른 동무인 위홍은 다른 방향으로 대단하게 자라났다. 다른 건 모르지만 적어도 키에서만큼은 나인들 중 따를 자게 없었던 것이다. 육 척(약 180cm)이 조금 못 되는 체고(體高)는 웬만한 사내들보다 클 정도였고, 상당히 큰 편인 화련에 비해서도 머리 반만큼은 더 올라갈 정도였다. 게다가 홍의 성격도 그에 맞게 워낙 강한 덕분에 같이 다니면 다들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고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