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혁은 허무한 얼굴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오늘도 허탕이다. 겨울을 찾을 수 없었다. 신혁은 차에 오르기 전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겨울이 없었던 1년의 시간동안 신혁은 그녀만 찾아 헤맸다. 자신의 품을 떠난 겨울이 미아가 되어 어딘가에서 울고 있을 것만 같아 늘 초조하고 불안했다.'“언제쯤이면 내 앞에 나타나 줄래?”'신혁이 물고 있던 담배의 매캐한 향이 허공으로 흩어졌다.'예전엔 어떻게 겨울 없이 살았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겨울이 없는 지금은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고통스러운데 말이다. 신혁은 다 타버린 담배를 버리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는 액셀을 밟으며 정신병원을 벗어났다.'1년 내내, 겨울에 대한 단서하나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낄 때쯤, 한 회장 집안에서 일하던 유모가 정보를 알아냈다. 그것은 겨울이 정신병원에 감금당해있다는 이야기였다.'새벽녘 떨리는 어조로 자신에게 전화한 유모의 말을 되새기며 신혁은 아스팔트 도로 위를 거침없이 달렸다.'「사모님께서 회장님과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뭐라고 하던가요?」'「겨울 아가씨. 잘 지내냐고 묻고 있었어요. 어느 정신병원이냐고, 만나보고 싶다고 그렇게 사모님께서 묻고 계셨어요.」'「정신병원이요?」'「네…….」'한성훈 회장.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죽이고 싶은 행동만 한다. 자신의 딸을 방에 감금시킨 것도 모자라, 아예 정신병원에 가둬버렸다. 끔찍한 사람.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다.'“개자식!”'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성훈은 자신의 손으로 처리 할 것이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한 회장을 떠올린 신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 시간 형우는 공장 안에서 괴로움에 입을 막고 있었다. 눈앞에서 불에 태워지는 시체를 보며 형우는 토기가 올라왔다. 이 짓도 꽤나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적응되질 않았다.'“도련님, 괜찮으세요? 많이 힘드시면 밖에 나가 계세요.”'“미안해요. 잠시만 나가 있을 게요.”'조직원들을 자신을 챙기는 것이 불편한 형우는 입을 틀어막고 자리를 옮겼다.'“웩. 웁……웨웩.”'거부감이 들었는지 공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참지 못하고 속에서 토기가 올라왔다. 형우는 심호흡을 하며 공기를 들어 마쉬고는 새삼스레 신혁의 얼굴을 떠올렸다.'열네 살. 그토록 어린나이에 신혁은 어떻게 이곳에서 버틸 수 있었을까? 부모도 잃고, 어린 나이라 혼란스럽고 방황도 많이 할 시기였는데.'“하여튼 여러모로 존경스러운 인간이라니깐.”'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비바람이 내려 날씨가 꽤 쌀쌀했다. 형우는 팔뚝을 비비며 추위를 녹였다.'벌써 내 첫사랑이 사라져 버린 지 1년이 지났다. 하지만 신혁의 시간은 멈춰있었다. 겨울이 없어진 그날부터 그의 시간은 얼음처럼 꽁 하고 얼어버렸다. 그런 신혁을 옆에서 지켜볼 때마다 언젠가 무너져버릴 거 같아 무섭고 걱정됐다. 저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만큼, 아슬아슬하고 안쓰러운 신혁이다.'“도련님, 나와 계셨네요.”'“오셨어요. 고 변호사님.”'“또 그러신다. 그런 호칭으로 부른다고 해서 어른스럽지 않다니까요?”'“누가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부른 거랬어요?”'“큭. 일은 잘 하고 계신 거죠?”'“네, 네. 태우다 못해, 뼈까지 잘 갈고 있습니다.”'“열여덟이 말하는 거 치곤 무척이나 섬뜩한데요?”'준기의 말에 형우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 행동을 보며 준기가 피식 웃자, 형우는 눈을 흘기며 라이터를 꺼냈다.'“도련님.”'“왜요.”'“변호사 앞에서 미성년자가 당당하게 담배피우시면 안되죠. 지금당장 경찰서 끌려가고 싶으세요?”'“그래서 나 잡아가려고요?”'“못 할 거야 없죠.”'“쳇, 웃기는 아저씨야. 변호사가 조폭 뒤나 돕고 있으면서. 왜 갑자기 바람직한 척이람?”'“훗, 담배는 압수. 들어가서 일이나 하세요. 도련님.”'형우가 물고 있는 담배를 낚아채는 준기다. 기분 상한 형우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틀어 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풍기는 악취에 형우는 또다시 입을 막아버렸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른 형우는 시체 태우기 작업이 끝난 곳을 향해 걸어갔다.'“도련님. 속은 괜찮아 지셨어요?”'“네, 뭐 그렇죠. 자리 비워서 죄송해요.”'“아닙니다. 이제 뼈만 갈면 작업이 끝나니깐, 조금만 참으세요. 도련님.”'“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뭘요.”'형우는 코를 막고 다 태워진 시체를 허무하게 바라보았다. 흔적이라고는 태워지지 못 한 뼈들뿐이었다. 사람이 몰래 죽어나가 사라져 버리는데도, 세상은 참 잘 돌아간다. 신기하지만 무섭고 잔인하다.''* * *''지혜는 새로 사귄 대학생 애인과 함께 백화점으로 와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고3 내내 수험생이라는 타이틀에 맞춰 쇼핑보다는 공부를 위해 1년을 보냈던 그녀였기에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풀려는 듯 카드를 열심히 긁어댔다. 애인의 지친 기색을 살피지 못 한 채 말이다.'“지혜야, 우리 좀 쉬자. 응?”'“한 바퀴만 더 돌자. 나 아직 다 못 샀단 말이야.”'“이만큼 사고 또 산다고?”'“뭐가 이만큼이야? 다섯 벌밖에 못 샀는데!”'“넌 집에 옷도 많잖아.”'“그건 다 고딩 때나 입었던 거지. 나 이제 대학 들어가면 그런 옷들은 안 입을 거거든? 잔 말 말고 빨리 따라와.”'한숨을 폭폭 내쉬며 지혜를 뒤따라가는 애인의 모습이 사뭇 처량했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지혜를 따라다니는 남자의 모습은 애인보다 짐꾼 같이 보였다.'결국 지혜의 말대로 애인은 백화점을 한 바퀴 더 돌고 나서야 배를 채우기 위해 피자가게로 들어 올 수 있었다. 지혜의 애인은 헥헥거리며 테이블에 머리를 눕혔다. 지혜가 메뉴를 주문하고 피자가 나올 때까지 휴식을 취하던 애인은 피자 조각을 집어 먹으며 지혜를 향해 실실 웃었다.'지혜는 지친 얼굴로 웃고 있는 애인을 흘겨보았다. 비실비실한 것이 가뜩이나 마음에 안 들었는데 체력까지 저질이니 최악이다. 그래도 자신한테 잘해주는 편이니 좀 더 두고 봐야겠다. 스트로로 콜라를 마시며 지혜는 문득 겨울을 떠올렸다. 백화점 쇼핑은 친구와 함께 했을 때가 제일 좋았다.'투덜거리면서도 항상 같이 다녀주던 너. 지친 기색으로 힘들다며 카페로 도망쳐서 사람을 황당하게 하던 너. 오늘 같은 날은 네가 아주 많이 생각나 겨울아. 스무 살을 며칠 앞둔 너는 얼마나 예쁘게 컸을까?'지혜는 스트로에서 입을 떼고 애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왜 그렇게 바라봐?”'“아니야…….”'“지혜야, 우리 오늘은 쇼핑 그만하고 영화보자. 응?”'“알았어.”'“아이고 예쁜 것! 자, 아 해봐.”'피자조각을 잘게 썰어 자신의 입에 넣어주는 애인을 보며 지혜는 살포시 웃음 지었다. 우물우물 피자를 씹으며 지혜는 애인이 건네주는 피클도 날름 받아먹었다.'“영화 뭐 볼래?”'“글쎄, 뭐 볼까?”'“친구가 추천해 준 영화 있는데 그거 보자. 재미있데.”'“그래, 그럼. 그러자.”'자신의 앞에서 휴대폰을 꺼내 영화시간을 알아보는 애인을 보며 지혜는 다시 스트로를 입에 물었다.'소중한 친구가 곁에 없는지 벌써 2년 하고도 반이나 흘렀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을 펌프질 했던 남자도 자퇴해서 연락이 끊겨 버린 지 2년이 되었다.'“지혜야. 우리 빨리 먹고 영화 보러 가자.”'“예매 끝냈어?”'“응. 자, 이거 빨리 먹자.”'1학년 겨울, 돌연 자퇴해버린 형우는 연락조차 없었다. 그와 연락하고 지낼 만큼 깊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내심 섭섭한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나도 손 있어! 오빠나 좀 빨리 먹어.”'“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