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학교에서 받아쓰기 백점을 맞고 부모님께 자랑을 하고 싶었지만, 올해 중학교에 올라가 부반장을 하고 머리도 똑똑한 자신의 오빠 경훈에게 오늘도 두 번째로 밀려버렸다. 그 이유는 중간고사 기간에 채점을 했을 땐, 전교 1등은 확정이라고 생각하며 어머니에게 자랑을 했던 경훈이었지만 성적표가 나온 결과에서는 전교 2등을 했기 때문이었다. 열네 살이나 먹고 어머니 품에서 우는 경훈을 보며 겨울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몸을 틀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2층으로 걸어 올라온 겨울은 힘없이 문고리를 돌려 방문을 열었다. 'TV 속에서 나오는 보통 아이들처럼 엄마, 아빠 품에서 어리광도 부리고 싶고 한번쯤은 함께 같은 방에서 자고도 싶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엄마의 손이 아닌 유모의 손에서 커버린 겨울이기에 이 꿈을 실현 시킬 수 없었다.'밝은 웃음소리가 어울릴법한 겨울의 입에선 한숨이 나왔다. 받아쓰기 백점 맞은 공책을 덮어 책상위에 올려두며 겨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랜만에 백점도 맞았으니 칭찬은 꼭 듣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부모들에게 그런 소릴 들을 수는 없을 것이고 유모에게 보여준다면 ‘아가씨 잘했어요.’ 라며 간단하게 말을 끝내 버릴게 분명했다. 이왕이면 제대로 기쁘게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겨울은 누군가를 떠올리고 이제야 밝게 웃었다.'시계를 본 겨울은 학원갈 시간이 다되었다는걸 느끼고 가방 안으로 공책을 넣었다. 아까 전 올라 올 때와는 다르게 사뭇 가벼운 발걸음으로 1층으로 내려온 겨울이다. 아직까지도 어머니의 토닥거림을 받고 있는 경훈을 빤히 쳐다보던 겨울의 시선을 읽었는지 겨울의 어머니, 민 여사는 아들을 토닥이던 손을 잠시 멈추고 겨울을 힐긋 바라봤다.'“학원가니?”'“네.”'“조심히 잘 다녀오렴.”'“응 엄……, 아니, 어머니!”'겨울은 ‘엄마.’라고 부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어린애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 여사는 호칭이 ‘엄마.’에서 ‘어머니.’로 바뀌었는지도 모르며 겨울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틀어 다시 우울해 하는 경훈을 달래었다.'겨울은 그런 어머니의 행동에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 문을 열고 터벅터벅 걸어 집을 나 온 겨울은 애써 밝게 웃어보였다.'겨울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 급하게 따라 붙은 유모가 아이의 자그마한 손을 잡고 학교에 있었던 일을 물으며 정원에 이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크고 웅장한 대문에서 문을 열고 그 앞에 멈춰진 고급 승용차를 보며 유모는 겨울을 차에 태웠다.'“다녀오세요. 아가씨.”'“응. 유모.”'힘없이 대답하는 겨울을 보며 유모는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는 조심히 차문을 닫았다. 겨울을 태운 검은 차가 넓은 주택가를 빠져나가는 것을 유모는 딱하게 지켜보았다.'“쯧, 불쌍한 우리 아가씨.”'누군가 지금 이 상황을 본다면 겨울이 왜 불쌍하냐며 어이없어 했겠지만, 자신의 손에서 자란 겨울은 한 없이 불쌍하기만 했다.'어려서부터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재벌가 집안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며, 장남인 경훈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다. 그것은 겨울의 어머니인 민하현. 그녀의 탓도 컸다.'민 여사는 당연히 자신의 아들인 경훈이 집안의 재산과 기업의 일 등 모든 것을 물려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오로지 경훈에게만 정성을 쏟았다. 사내대장부를 거칠기보단 곱게 키워냈으며 경훈이 간혹 바보 같은 행동을 보여도 오냐오냐하며 응석을 다 받아주었다.'경훈이 태어난 뒤 시간이 지나 동생인 겨울이 태어났다. 물론 민 여사도 겨울을 낳았을 때 기뻐했다. 하지만 그 속엔 감춰진 비밀이 있었다. 겨울을 임신했던 이유는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 한성훈 회장 때문이었다.'남자는 결혼을 해도 바람을 핀다. 당연한 소리였다. 뒷거래를 통해 연예계 스폰서를 하며 한 회장은 연예인부터 고급 사창가의 여인들 혹은 바의 마담까지. 수많은 여자들과 잠자리를 가졌다. 민 여사는 한 회장의 바람기 때문에 혹시라도 나중에 경훈에게 해가 될 아이가 태어날까 두려워, 그의 뒤를 조사해 잠자리한 여자들을 조용히 짓밟고 처리했다. 그러고서도 불안한 마음이 깊게 남아있던 민 여사는 한 회장과 의무적인 잠자리를 통해 겨울을 가졌던 것이었다.'그런 비밀 속에 태어난 겨울이었지만, 한 회장은 생각보다 겨울이 태어난 것을 좋아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업을 물려받을 아들도 있지만 자신의 운영에 문제가 있을 상황을 대비해서 내보낼 딸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부모라는 마음보다 이용을 위한 도구수단으로 태어난 겨울이기에, 아이는 진실 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더욱 불쌍한 것은 겨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 어린나이에 말이다.'유모는 길었던 생각을 멈추고 한숨을 내리쉬며 대문을 밀어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겨울은 상가 안에 있는 학원으로 들어와 자신이 수업을 받는 강의실 안에 가방을 올려놓고는 공책을 꺼내 펼쳤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겨울은 공책을 품 안에 감싸 안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건물 안에 있는 엘리베이터 타고 3층에 도착한 겨울은 미소를 머금고 안이 훤히 다 보이는 태권도장 내부를 바라보았다.'“신혁 오빠!”'도장에 울려 퍼지는 밝고 씩씩한 목소리에 훈련을 받던 사람들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겨울을 확인하며 미소를 지었다.'“우리 예쁜 공주님 오셨네!”'“안녕하세요. 사범님.”'꾸벅거리며 겨울이 씩씩하게 인사하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사범이다.'“신혁아, 네 공주님 왔다.”'신혁은 타월로 땀을 닦아 내며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겨울에게 다가갔다. 신혁은 다리를 접고 주저앉아 겨울과 눈높이를 맞추곤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우리 공주님 왔어? 근데 지금 수업시간 아니야?”'“아직 아니야. 오빠! 나 오늘 받아쓰기 봤어!”'“그래? 몇 점 받았어. 설마 빵점 받은 건 아니지?”'“아니야! 나 백점 맞았는걸!”'“에이, 거짓말.”'“정말이야! 자, 이것 봐!”'품에 소중히 안고 있던 공책을 꺼낸 겨울은 종이를 펼치며 당당한 얼굴로 신혁에게 보여주었다. 겨울이 조그마한 손가락을 펴, 빨간 색연필로 써진 점수를 가리키자 신혁이 웃으며 공책을 건네받았다.'“우리 겨울이 똑똑하네. 진짜로 다 맞았잖아? 글씨도 예쁘게 잘 쓰네.”'“정말? 글씨도 잘 썼어?”'“응! 우리 공주님. 너무 예뻐서 상 줘야겠다.”'“상? 뭐 줄 건데! 사탕? 초콜릿?”'“흠……. 뭐 줄까? 사탕이나 초콜릿 말고 또 먹고 싶은 거 있어?”'“아이스크림!”'“아이스크림? 그럼 우리 겨울이 수업 끝나고 오빠랑 데이트할까?”'“늦는다고 유모한테 혼날 텐데…….”'“오빠가 유모한테 전화 해둘게.”'정말이냐며 눈을 반짝이는 겨울을 보며 신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혁이 손을 뻗어 겨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잘했다고 아낌없이 칭찬해주었다. 겨울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신혁의 손길이 좋아, 활짝 웃어보였다. 예쁜 겨울의 미소를 확인한 신혁은 머리를 쓸어주던 손을 떼어내고 수업 늦는다며 걱정서린 목소리와 함께 겨울의 손을 잡았다.'신혁이 겨울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다 주며 한 시간 뒤에 보자고 손을 흔들었다. 그런 신혁의 모습에 엘리베이터가 닫칠 때까지 열심히 양 손을 흔드는 겨울이었다.'“저렇게 예쁜데, 너 때문에…….”'신혁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친구라기 보단 라이벌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경훈을 떠올리며 무미건조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