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좋아했었어. 아니, 처음엔 좋아했다가 나중에 사랑하게 되었어.”'“예에?”'잔뜩 긴장하던 보미는 피시식 바람 빠지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경욱의 말에 할 말을 잃고 곧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진지한 그의 눈빛에 입가에 웃음을 지웠다. 보미가 말도 안 된다는 말투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선생님, 장난치지 마세요.”'“사랑해.”'놀란 얼굴이 굳어지며 눈이 커졌다. '숨이 막혔다. 현실이 아닌 건 같았다. 장난이야. 놀리는 거야.'경욱의 표정은 진지해보였다. 오히려 지나치게 착실했다. 애절하고 목마른 듯한 괴로움도 보였다. '“선생님,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첫눈에 반했었어. 학생 상담 때. 그런 내가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없어서 정말 많이 고통스러웠어.”'그렇게 놀라운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는 매우 담담했다. 그리고 그 뒤의 내용은 파격에 파격을 더했다.'“넌 상상도 못 할 거야. 선생이, 학생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그 이후 너를 대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를 볼 때마다 매번 사랑을 느끼는 내가 얼마나 싫었는지. 학생을 두고 그것도 미성년자를 보며 흔들리고 힘들었던 고통을 너는 절대 이해 못해.”'“저…….”'보미의 눈이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손이 하얘질 만큼 꼭 두 손을 움켜쥐었지만 진정이 되질 않았다. 뭐라 할 말도 없었다.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경욱은 팔꿈치를 테이블에 꼭 지지하고 두 손을 꼭 쥔 후 이마에 대었다.'“나는 성적으로 이상한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건전하고 상식도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고. 너를 힘들게 해서 미안했지만 패륜을 저지르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나를 네가 이해할 수나 있어?”'“선생님!”'“선생님이라 부르지 마!”'머리를 감싸 안고 괴로워하는 그를 보자 보미는 멍해졌다.'“네가 나를 받아 준다면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나를 받아달라고 하고 싶어.”'“……이건 아니에요. 정말 잘못된 거예요. 저를 모르시잖아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시면서 그렇게 절대적으로 끌린다는 사실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가능해. 가능하더라고.”'“말도 안 돼요!”'혼란스러워 머리가 띵 울리고 심장이 요동쳤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얼굴이 씰룩댔다.'“왜 안 돼? 나는 나를 냉정하게 평가했어. 저 애를 어떻게 하고 싶어서 너 그러는 거니? 단순히 갖고 싶은 거니? 똑바로 봐.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잘 못하고 행동들도 허술하기 짝이 없어. 성격도 좋은 편이 아니었어. 하지만 난 그런 너의 모습도 좋았다. 무작정 사랑스러웠어. 선하고 착해 보이는 눈이 좋았어. 넌 항상 단발머리에 머리띠를 하고 다녔고 난 네 둥글고 예쁜 이마가 좋았어. 넌 졸 때면 왼쪽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며 졸았었어. 네 실내화는 항상 깨끗했어. 너는 교복치마 밑단이 떨어진 것도 모르고 한 달이나 그러고 다닌 적도 있었어. 넌 피곤하면 목운동을 하고 어깨마사지를 했었어.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입술을 한일자로 다물고 사정없이 일그러뜨렸었어.”'“그…… 그만요!”'이상했다.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보미는 경욱을 노려보았다.'“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요. 저는 남자로서도 선생님으로서도 선생님이 싫습니다.”'경욱은 한참을 괴로운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가슴이 큰 폭으로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는 오른 손으로 심장근처를 강하게 지압하고 나서 심호흡을 했다.'“……이유를 말해주고 싶었어. 너희를 마지막으로 나 고등학교 교사 그만 뒀어. 운명처럼 끌렸던 여자가 학생이었다는 게 싫었고 내가 혐오스러웠었어. 우리는 잘못 만났을 뿐이야. 선생과 학생으로.”'“……제가 이렇게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보세요?”'“미안했고, 미안하다. 그런데, 마음이 아프다. 너를 못 본 지 꽤 되었는데도 아직 마음이 변하지 않았거든. 일단, 너를 미워한 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어. 그리고 진실을 고백했으니 나도 마음이 좀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잊을 수 있을 거야. 괜찮아 지겠지. 나도 이제 다른 사람도 만나볼 생각이야. 부담 줘서 미안하다. 너를 힘들게 하면 그건 더 견딜 수 없을 거야.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거다.”'“…….”'경욱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려 눈에 고인 눈물을 닦기 위해 안경 밑으로 긴 손가락을 넣어 눈물을 살짝 훔쳐냈다.'“알겠니? 왜 그렇게 냉정하게 굴 수밖에 없었는지? 너를 향해 웃으면 온 세상이 내 마음을 알 것 같고, 손가락질 당할 것 같았어. 네가 선생자격이 있는 사람이냐, 네가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학생에게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느냐 하면서. 그것보다 내 사랑에 혹시 네가 힘들어질 것을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었어. 차라리 그냥 나를 이상한 선생으로 알고 지내게 하는 게 낫겠구나 하고 생각 했어.”'경욱이 어깨를 쭉 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후 뭔가 결심한 듯 보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물었다.'“사제지간에도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 보미야, 나랑 만나보지 않을래?”'“…….”'혼란. 당황. 혼돈.'“선생님 저…….”'“만나기 위해 생각을 했었어. 집 앞에서 우연히 만나볼까, 연락을 직접 해볼까. 우연을 가장해서 다가갈 수도 있었겠지만 너는 이미 나에게 안 좋은 감정뿐이고, 이번에 어떻게 우연히…….”'보미는 경욱의 말을 끊었다.'“……죄송합니다. 선생님께 조금도 관심 없구요. 저, 사귀는 사람 있어요. 저 그 사람 많이 좋아해요.”'“…….”'경욱이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오해는 풀렸니? 오히려 아무것도 몰랐을 때가 나았을라나?”'경욱이 다정하게 말하며 슬프게 웃었다. 보미도 쓰게 미소 지었다.'“오해가 풀렸어도 쓰고 우울한 건 마찬가지에요.”'“미안하다……. 정말 이젠 우리 우연이라도 만나지 말자.”'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말에 보미는 갑자기 마음이 놓였다.'어차피 좋은 선생님으로 남기는 어려웠겠지만 그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갈 무렵 담임은 또다시 나를 한 번 더 힘들게 만들었다. '“……네가 받아 주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이 답답했던 심정, 고백이라고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으니까.”'그는 자리에서 벗어났다. 보미는 자리에서 일어서 그가 커피 값을 계산하는 걸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