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말을 하느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에 물고 있던 주전부리를 떨어트리는 준이의 옆에 서있던 기준이 그의 시선에 닿은 곳으로 눈길을 옮겼다. 거기엔 그들이 다니는 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 둘이 있었는데 상당히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았다. '특별히 눈길을 끌만한 모습은 아니다. 요즘엔 초등학교에 유치원생들도 커플커플거리며 딱 달라붙어 다니는데 고등학생이라고 서로 연애하지 말란 법은 없다. 더욱이 저렇게 예쁘장한 두 사람이라면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흐뭇해진다. 그러니 먹던 것도 떨어트리며 과민 반응하는 준이가 괴상하게 여겨졌다. '“왜?” '“우씨, 죽었어.”'답지 않게 과하게 흥분하며 콧김을 뿜어낸 준이는 그 대단한 식탐 본능도 잊고 큰 걸음으로 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쿵쿵 걸어갔다. 요즘 학생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뭐하는 짓인가. 시비를 걸 목적이라면 정말로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다. 벌써 스물이나 먹은 사내 둘이 고등학생들에게 시비를 걸기위해 간다는 건, 정말 창피한 일이다.'“어디가.”'“야 인마, 이결!”'기준의 물음에도 빠르게 그들에게 걸어간 준은 뒤따르는 그는 이미 잊은 것 같았다. 이름을 부르자 자연스레 고개를 돌린 꽤 예쁘장한 얼굴의 학생이 짐짓 귀찮음이 스치는 표정으로 준이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름을 아는 것을 보니 아는 사이인 듯 한데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귀찮음이 넘치는 저 얼굴에 보통 사람이라면 말을 걸기도 난감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준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기준은 생각보다 훨씬 또렷하고 예쁘장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학생의 모습에 살짝 몸이 흔들렸다.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무언가가 있는 이 느낌. 격렬하지만 그것이 이상야릇한 감각으로 기준을 향해 혀를 날름거린다. '두근.'“음?” '느리게 준이를 따라 가던 기준은 순간 덜컹거린 내장 어딘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고동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더욱 커졌고 그에 대한 심각한 고찰에 대하여 심도 있게 생각하기 위해 더 다가가는 것을 멈추었다. '“야! 너 인마, 내가 아버지한테 말 좀 잘해달라니까!” '아. '기준은 그제야 저기 있는 알콩달콩해 보이는 귀여운 연인 중 준이와 키가 엇비슷해 보이는 학생이 아침부터 친구의 입에 달렸던 ‘망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 있던 과모임 때문에 과음을 한터라 술 깨고 가야한다고 전화로 누군가에게 굽실거렸던 준은 오늘 아침 나타날 땐 퀭하게 변해서 연신 입으로 ‘망할 것’이라며 중얼거렸다. 정확히 여자인지 남자인지 동생을 지칭하는 말이 항상 ‘망할 것’이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는데 이제야 그 정체가 사내자식임을 알게 되자 뭔가를 알게 되었다는 성취보다는 기이한 감각이 앞섰다. '얼핏 보면 여자 같기도 하지만 교복도 바지인데다가 짧은 머리, 투박한 말투는 바로 옆에 있는 지극히 여성스러운 학생에 비해 너무도 괴리감이 나서 전혀 여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애매모호한 찝찝함이 다가서자 기준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술 먹느라 늦는다고 잘 말했어.”'담담하게, 생각보다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기준의 귀에 들렸다. 꽤나 멀리 있음에도 제대로 들리는 것에 기준의 고개가 조금 더 기울어졌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회오리처럼 요동친다. 그리고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선 긴 생머리의 귀여운 소녀가 준이의 동생 팔에 매달리며 까르르 웃자 일순 불쾌감이 솟아올랐다. '아니, 반대일까. 여자애에게 불쾌감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준이의 동생에게 생기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물론 그래야 한다. 종알종알 시종 시끄럽게 자전거가 제 것임을 말하는 준이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씩 ‘아.’라던가 ‘응’이라던가 ‘그런데’하고 건방진 답만 해대는 동생의 목소리만 귀에 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아, 이거 큰일이다. 정말 큰일이다.'“저 입만 산 망할 것.”'씩씩거리며 돌아온 준은 묘하게 붉어진 두 볼을 괜스레 문지르며 다시 제 갈길 가는 두 학생들을 힐끗거렸다. 그러다 동생의 왼쪽 팔에 매달려 있던 여학생이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짓자 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댓 발 내밀며 기준을 툭 쳤다.'“예쁘지.” '“어? 아……어.”'네 남동생.'아니! 아니, 아니다! 남동생 말고 그 옆에 여학생. 머리가 길고, 길었던 그런 여학생. 분명 같이 옆에 있었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 여학생의 얼굴과 그에 비해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준의 남동생의 모습에 기준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20년 인생 최대의 깊은 고민이다. 이 쌉싸래한 마음은 대관절 무엇인가.  '“여자 친구인가?”'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뒷말에 준이는 다시금 툭 기준을 치며 말했다.'“뭐, 아. 그럼 남자로 보이냐.”'“그런가.”'역시 여자 친구였나. 이 어마어마한 상실감은 설명이 되지 않으니 모르는 척, 그냥 이해하지 못하는 척 하련다. 그러나 두근두근 바쁘게 움직이는 가슴은 쉽사리 진정이 되질 않는다. 덜그럭덜그럭 쿵쿵 두근두근. '아, 두근두근 거려.'“몇 살인데.”'“19살.”'“한살차이네.”'뭔가 맹해진 기준을 이상한 사람 보든 본 준은 그제야 자신이 바닥으로 간식을 떨어트렸음을 깨달았다. 경악하며 입을 벌리는 친구의 입으로 자신의 손에 들렸던 것을 밀어 넣은 기준은 뒤늦게 아니, 너무 이르게 찾아온 정체성의 혼란에 금방이라도 쓰러져버릴 것 같았다. '“미치겠네.”'심장이 두근거려서 죽을 것 같다. '인생사 한 방이라는 것을 그의 나이 20세에 처음 알게 되어버린 그런 오후였다. ' '''#간지러워.'''“고마워요.”'“아닙니다.”'닮은 사람, 닮은 말투.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로를 대한 여자 둘은 잠시 눈빛을 교환하듯 시선을 공유하다가 각자의 일에 빠졌다. 대단히 유명한 여성 요리 연구가와 훗날이 촉망되는 여대생의 만남치고는 전혀 부드럽지 못하다. 슬슬 날이 더워지는 5월의 어느 날, 학기 초부터 광고되어서 학생들의 심리 불편하게 만들던 유명한 요리 연구가이자 평론가인 홍수현 선생의 초청강의가 있는 당일이었다. '과대표인 결은 일단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교수들과 선생들을 도와 준비를 해야 해서 전날부터 바쁘게 움직였고 오늘 강의가 끝나면 정말 푹 쉬고 싶었다. 게다가 강의 자체를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도우미였기 때문에 무대 한 편에까지 서서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았다. '“그래도 우리는 결이가 도우미 맡아주니까 걱정은 없어. 그 소문 들었지? 저번에 홍 선생님 강의 갔던 학교에서 도우미가 PPT제대로 못 넘겨가지고 불호령 떨어졌던 거? 어휴 진짜 어지간하면 그냥 하면 될 거 가지고 그걸로 무진장 따졌대.”'진저리를 치며 마지막 정리를 시작한 조교의 말에 결은 그저 예의상 한 번 웃어주었다. 친구들의 말에 동의를 할 수 없는 것이 사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함께 했던 홍 선생과의 호흡이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가벼운 손동작이나 눈빛 교환, 짧은 목적어만으로도 홍 선생과 결의 호흡은 잘 맞았고 덕분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홍 선생이 먼저 다가와 고맙다고 말을 할 정도였으니 사실 말 다했다. '“그건 그렇고 결이, 오늘 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아직 시간 있어요. 이거 마무리 하고 갈게요.”'특별한 마찰이 없을 뿐이지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것은 맞지만 홍 선생의 까다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프레젠테이션의 오타와 문맥 확인도 다시 한 번 해야 했고 특별히 매니저나 비서를 대동하지 않은 만큼 내일까지는 결이 비서였다. '“하여간 까다로운 사람이 제일 힘들어.”'고맙게도 함께 남아 뒷 작업을 도와주던 조교는 아무리 생각해도 짜증이 나는지 씩씩거리며 내일 나눠줄 유인물들을 꾹꾹 잡아 접었다. 결도 결이지만 조교 역시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하루 종일 고생했었다. 더욱이 꼼꼼함과는 조금 거리가 먼 조교에게는 그 까다로운 성미가 불만일 수밖에. '“결아, 넌 나중에라도 결혼하면 그런 시어머니 밑엔 절대 들어가지 마라.”'“네?” '“아, 너무 이른가?”'스물 후반대의 조교야 결혼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오는 것이지만 이제 갓 스물을 넘긴 결에게는 낯선 말이다. 살짝 당황하며 반문하는 그녀에게 조교는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그럼 그런 어머니가 있는 남자친구는 절대 사귀지 마!”'“남자친구…….”'남자친구라니.'모태솔로인 결에게는 조금은 먼 이야기 같다. 딱히 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그녀에게 조교는 ‘하긴, 결이라면 잘 하겠지?’하고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