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서후는 서안 위로 편지를 쓰기 위한 종이 한 장을 펴 놓고 잠시 숨을 골랐다. 잠시 뒤 먹을 쥔 팔소매를 왼손으로 정갈하게 잡아 두고 천천히 갈기 시작했다. 작은 붓을 고른 그녀는 붓 끝을 먹물에 적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꼭 보여드리고 싶은 아름다운 화원 하나가 있습니다. 선비를 닮았던 매화나무는 베어지고 분내 나는 여인의 꽃밭이 되었습니다. 연못에 노니는 비단잉어마저 주인을 몰라보고 여인이 주는 먹이에만 넙죽넙죽 입을 벌립니다.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편안한 미소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 미소가 결국에는 제게 닿더군요. 꺾여서 시든 미소에도 미소 짓네요. 허락한 미소입니다. 줘 버린 미소이지요. 남김없이 주려 합니다. 하지만 줘 버린 미소에 향기가 없어 달님께 빕니다. 스스로 향기로운 미소의 주인이 되고자 합니다. 달님 들어주소서.]

하고픈 말을 다 적고 종이가 머금은 물기를 말리기 위해 후후 불고 있을 때 소륜이 들어와 마주 앉았다.

“안 자고 뭐하고 있느냐?”

“편지를 썼어요. 잠은 조금 있다가 자도 됩니다.”

“궁에 보내려고?”

그녀가 귀여워하던 녀석이 궁에 있었다. 그것이 싫었던 소륜의 기색에 짜증과 더불어 냉혹한 빛이 서렸다. 조만간 시간을 꼭 내서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그 왕자 녀석을 한 번 만나 봐야겠다. 다시는 서후가 다른 데 한눈팔지 않게끔…….

“아뇨.”

“거기 말고 편지를 보낼 데가 또 생긴 것이더냐?”

괜스레 심장이 내려앉는다. 그가 불안한 시선으로 글을 쓴 종이를 봉투에 넣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그 봉투를 소륜에게 내밀었다.

“병환 중임에도 찾아뵙지도 못하고, 외조모님을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려야 도리인데, 죄송하다고 여쭤 주세요. 그리고 노마님께 제가 이 편지를 춘호 아저씨께 전해 주길 부탁드렸다고 대신 말씀드려 주세요.”

“무슨 일이 생겼느냐? 궁에서 나오자마자 갑자기 편지는 왜……?”

“음……. 잠시 저와 같이 산책하시겠습니까?”

서후는 받기를 거부하는 그를 걱정해서 봉투를 서안 위에 얌전히 올려 두고 일어났다. 심각해진 소륜이 따라 일어났다. 그와 함께 방을 나간 서후는 선비의 담백한 기상처럼 꽃 피운 매화나무 아래로 갔다. 달빛을 머금은 매화의 여린 꽃잎 하나가 툭 떨어져 서후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서후는 뒷짐을 진 채 무게를 잡고 있는 소륜의 눈앞으로 바짝 다가가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어깨 위에 있던 꽃잎을 날려 소륜의 어깨 위로 보냈다.

“춘호 아저씨께 부탁의 말씀을 드리려고요. 종나라에 가서 제가 부탁한 것을 가져다달라고 할 겁니다.”

그의 어깨에 앉아 있는 꽃잎 한 장에조차 샘이 난 그녀의 손이 그것을 슬며시 털어 냈다. 이 남자가 좋다. 이 남자로 인하여 정 떨어진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 볼 용기를 얻었다. 이 남자 때문에 살고자 하는 희망이 생겼다. 이 남자를 위해서 백화국에서 새로이 시작해 보고자 맘먹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서후는 자신에 관해서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때라고 생각했다.

“제 부모님은……. 종나라를 섭정 중이신 왕과 왕비님이세요.”

방긋 웃던 그녀의 어깨가 수줍게 좁아들었다. 그런데 그는 묵묵부답이다. 그가 걱정스러워진 서후가 머뭇거리던 손끝으로 그의 목 아래 옷깃을 따라 손가락 끝을 움직였다.

“어머니께 가서 해독, 해독제를 저 대신 받아와 달라고 부탁드리기 위해서…….”

흡 하고 거칠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에 서후의 부끄러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저가 뭐라고 저리 아프게 반응하는 줄 모르겠다. 왈칵 코끝이 시렸지만 서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목만 어깨 아래로 밀어 넣었다.

“살고 싶어졌습니다…… 장군님이라면, 살고 싶습니다.”

와락 껴안았다. 소륜은 어여쁜 여자를 터트릴 수도 있는 힘으로 안아 주며 거친 숨을 토해 냈다. 가슴이 크게 들썩일 정도로 흥분한 소륜은 고마워서 그녀의 고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고맙고 고마워서 자국이 남는 것도 겁내지 않고 여린 뺨에 입술을 찍었다. 자신의 곁에 남기로 결정한 그녀가 대견하고 예뻐서 저도 모르게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말았다. 달짝지근한 차향이 느껴진다. 조심조심 자국이 남지도 다치지도 않게 입 맞추고 싶은데 못된 입술은 자꾸만 그녀를 지분거리며 핥다가 거칠게 물어 삼키고 아프게 빨아 당겼다. 그녀의 얼굴에서 겨우 떨어진 소륜은 감동한 눈빛으로 가슴 벅찬 미소를 지었다. 다시 쪽하고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그리고 또다시 쪽하고 입술을 맞췄다. 아예 양손바닥 안에 그녀의 얼굴을 가둬 놓고 쪽쪽쪽 입술을 맞추며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기쁨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