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해 오신 어머니. 도현은 자신의 너른 품에 어머니를 꼭 안아 드리며 자신이 어릴 적 어머니가 해 주시던 것처럼 어머니의 등을 몇 번 토닥였다.' “어머니,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랜만이구나. 그러니까 좀 자주자주 좀 오면 어디 덧나니? 이번 명절엔 오지도 않더니…….”'아들의 품에서 빠져나온 어머니가 도현을 슬쩍 곁눈으로 쳐다보며 말하자 도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죄송해요. 근데 어쩝니까? 어머니 아들이 이번에 큰 사건을 하나 맡아서 무지 바빴다니까요. 그리고 할아버님이 매번 결혼해라, 결혼해라 하도 성화여서 솔직히 피하고도 싶었고, 이번에도 아마…… 그 때문이겠죠?”' “아마도? 후후후…….”'어이쿠! 이번엔 또 할아버지가 어떤 여자 사진을 보이며 날 놀라게 하실까? '도현은 자신이 많은 걸 바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처지에 정신 제대로 박힌 여자가 자신에게 시집와 줄 거란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웬만큼은 해야지, 원……. 그래도 평생을 보고 살 얼굴인데 어디 가서 박색이란 말은 듣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고 보면 어머니께선 참 대단하셨다. 오로지 아버지가 좋아 종갓집에 시집을 오셔서 온갖 궂은일 다 도맡아 하시고, 할머님 살아생전에는 그 심한 시집살이 다 견뎌내시고. 도현은 자신도 어머니 같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요즘 세상에 그런 여자가 어디 있어? 결혼 못하면 이대로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사실 도현은 결혼이란 것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제가 그 어렵고 어려운 종갓집의 장손이란 사실을 인식한 다음부터 하면 좋고, 못하면 말고. ' “참! 미래는 요즘 뭐해요? 요 녀석, 많이 컸겠네. 대학 들어갔나?”' “응. 서울에 제법 유명한 여대, 의류학과에 들어갔다더라. 그 집 할아버님도 꽤 완고하셔서 여대 아니면 못 보내시겠다고 하는 통에 여대에 진학했다며 얼마 전에 찾아와서 얼마나 쫑알거리고 가던지. 참 귀여운 아이야. 그치?”' “네, 그렇죠 뭐.”'도현은 미래를 처음 보던 때를 떠올렸다. 도현이 미래를 처음 본 것은 중학교 다닐 무렵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서울로 유학을 했던 도현은 방학 때마다 집에 내려오곤 했었는데, 어느 날, 옆집에서 울고 있던 꼬마 여자아이를 처음 보고 너무 귀여워서 덥석 안아 주었다. 그리고 어머니께 달려와 이런 동생, 낳아 달라고 한참을 보채기도 했었다. 종종 방학 때마다 만난 미래는 어느새 초등학생이 되어 있었고, 중학생이 되어 있었다. 2년 전 고등학생일 때 보고 그 뒤론 본 적이 없었다. 그때 한창 대학 입시 공부를 한다고 살이 얼마나 통통하게 쪘던지 도현이 한마디 하며 놀리자 뾰로통해져서 울며 제집으로 뛰어간 뒤 만나지 못했다.' “나 미래한테 할 말도 있는데, 그때 미안하다고…….”' “그땐 네가 너무 심했다, 이 녀석아! 그래도 한창 예민한 나이의 숙녀에게 돼지라고 놀리면 어쩌니?”' “하지만 그땐 너무 귀여워서. 정말 귀여웠다니까. 그리고 직접적으로 돼지라는 단어를 쓴 것은 아니었다고요. 그냥 통통한 게 귀여워서 한마디 한 것뿐인데. 지금은, 살 좀 빠졌나?”'마지막 보았던 미래의 통통한 모습을 떠올리며 도현이 어머니에게 묻자 어머니는 묘한 표정을 지으시며 도현에게 말했다.' “글쎄? 아마 네가 보면 놀랄 걸? 자, 어서 아버님 방으로 건너가 봐라. 종일 너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다.”'어머니와 좀 더 긴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일단 할아버님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우선이기에 도현이 어머니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고는 대답했다.' “알겠어요.”'도현이 조부의 방으로 들어가 격식에 맞게 인사를 한 뒤 양반다리를 하고 자리에 앉자 곰방대를 물고 있던 조부는 도현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쏘아보며 말했다. ' “네 이놈. 이 할아비 죽기 전에 증손 좀 보여 달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냐?”' “할아버님도. 요즘 아가씨들이 제가 싫다는 걸 어쩝니까?”' “인석이! 너 여기 내려올 때마다 선봤던 아가씨들은 죄다 너 좋다고 하더라.”' “그 아가씨들은, 제가 싫습니다. 그러니 어쩝니까? 하하하…….”'도현은 할아버지가 불쑥 내민 사진 한 장을 아무 생각 없이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는 아까 봤던 그 여자였다. 아까 그 막대사탕을 물고 있던 끝내주던 다리의 주인공. 할아버지가 웬일이실까? 이런 퀸카 중의 퀸카를? ' “암말 말고 그 아가씨 만나. 그리고 웬만하면 올해 가기 전에 식 올리고. 나도 이젠 예전 같지가 않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을수록 올해는 넘길 수 있으려나, 또 다음 해는 어찌 맞이하나 이런 걱정뿐이다.”' “할아버님도 참. 그런 염려 마세요. 앞으로 한 30년은 끄떡없으실 테니……. 제가 장가가서 그 애들 시집 장가가는 거까지 다 보실 테니 걱정 마시라고요.”' “인석이 할아비를 놀려? 끌! 그래, 어떠냐? 이번엔 좀 예쁘지? 그쪽에서 네가 하도 좋다고 해서 마련한 자리니까 특별히 신경 쓰고. 오늘 저녁에 만날 거니까 준비하고 있어.”' “예? 이 여자가 절 알아요?”'누굴까? 아는 여자였나? 이런 미인이라면 단 한번을 봤어도 기억을 했을 텐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도현이 사진을 다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넌 눈이 어디 달렸냐? 미래잖아. 미래.”' “네에? 이 아가씨가 미래라고요?”'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얘가 그사이 성형이라도 한 건가? 어떻게 이렇게 예뻐졌지? 그러고 보니 어릴 적 모습이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보다 미래면, 지금 몇 살이냐? 이제 갓 스무 살. 스무 살짜리랑 선을 봐서 결혼을 하라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할아버지. 미래가 지금 몇 살인지는 아시는 겁니까?”' “이놈이! 누굴 치매 환자로 알아?”' “그러니까요. 저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여자랑 지금 선을 보고 결혼을 하라고요? 것도 전 미래가 기저귀 차고 다닐 때부터 봤는데요?”' “여자 나이 스물이면, 옛날 같으면 벌써 애 한 두서넛은 낳았겠구먼.”' “그건 옛날 말이죠. 요즘에 누가요?”'이건 범죄다! '도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어리던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큰 거야? 그것도 잠시잠깐 자신의 혼을 쏙 빼어놓을 만큼 매려적인 아가씨로 말이다. 도현은 다시 한 번 사진을 내려다보며 사진 속 미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 ' '그날 저녁 7시. 결국 도현은 할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약속 장소로 나오고 말았다. 솔직하자면 낮에 잠깐 봤던 미래가 정말 자신이 알던 미래가 맞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더 솔직하자면 그렇게 예쁘게 자란 미래를 꼭 만나고 싶었다.'고풍스러워 뵈는 한 한정식집. 도현과 미래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는 곳. 약속 시간보다 20여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한 도현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차 안에 들어앉아 미래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낮에 난 차사고 때문에 아버지가 몰고 다니는 차를 끌고 나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왜 미래는 그때 자신을 못 알아본 건지. 아니, 못 알아본 척을 한 것인지 말이다.' ‘요런 맹랑한 것. 차 사고도 일부러 낸 게 틀림없어. 좋아, 네가 그렇게 나오겠다면 말이야…….’'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미래의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면서도 매의 눈을 하고 미래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도현은 실소를 터뜨렸다.'늦기까지? 차미래, 많이 컸는데? 매번 아찌, 아찌 하며 쫓아다니던 녀석이 그렇게 예쁘게 컸을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도현은 아직도 차에서 내리던 미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미끈한 각선미하며 초롱초롱하던 눈망울, 게다가 꿀이라도 발라 놓은 듯 반짝이던 피부. 아니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김도현! 너 정신 차려. 이건 범죄라고! 띠동갑보다 더하잖아?'약속 시간 5분 전, 택시 한 대가 미끄러지듯 도현의 차 앞에 정차를 하고 미래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도현은 씩 웃으며 안전띠를 풀었다. 택시가 가고 난 뒤 차에서 내린 도현이 미래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입구에서 일부러 미래와 몸을 살짝 부딪친 도현을 뒤돌아보던 미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도현을 바라보았다. ' “아! 이런, 아까 낮에…….”'도현도 일부러 미래임을 모른 척하며 먼저 아는 체했다. 이미 도현의 눈은 미래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고 있었다. 몸에 타이트하게 맞는 트렌치코트를 입었지만, 그 안에 아까처럼 상당히 짧은 스커트를 입었을 것으로 예상했다. 가는 허리와 대조적으로 불룩 솟은 가슴은 아찔할 정도였다. 도현의 말에 미래가 조금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도현은 의아했다.'미래는 여전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도현 때문에 속상해 죽을 것만 같았다. 열여덟의 여름, 3년 간 짝사랑하던 도현에게 살이 오통통 오른 것이 귀엽다는 말을 들은 후, 그 충격으로 힘든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남들은 고등학교 때 체력이 달린다며 연신 먹어댈 때도 미래는 음식의 유혹을 간신히 참아내며 몇 년 후, 멋진 모습으로 도현 앞에 나타날 것만을 상상하며 일부러 차사고까지 내며 우연을 가장해 도현 앞에 나타났으나 도현은 전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미래의 뾰로통한 모습을 본 도현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동공을 이리저리 굴리는 걸 보니 미래가 맞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낮에 미래가 자신에게 주려고 했던 막대사탕도 미래가 제일 좋아하던 것이었다. 미래가 다섯 살쯤이던가? 고등학생인 도현이 막대사탕을 먹는 걸 보더니 도현의 입속에 있던 사탕을 빼앗아 제 입속에 쏙 넣고 도망가던 꼬마가 눈앞에 선했다. 그 꼬마가 지금 이렇게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자신의 앞에 서 있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였다.' “들어갈까? 차미래 양?”'미래는 도현이 제 이름을 불러 주자 금세 표정을 바꾸고 입술을 씰룩거렸다.' “나…… 못 알아보겠죠? 그렇죠?”' “그래, 인마! 깜짝 놀랐다.”' “들어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