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Welcome to the Hell - 각자의 지옥문은 열렸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야.”

지옥의 마감 시간을 무사히 넘기고 이제 잠을 좀 청하려던 참이었는데, 누군가 미친 사람처럼 인터폰을 눌러대고 있었다. 우영은 고무줄 사이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긴 머리카락들을 대충 정리하며 월패드를 들여다보았다.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이란성 쌍둥이 언니 김인영이 비장한 각오를 품은 얼굴로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스물다섯 살에 동갑내기 남자 친구와 사고를 쳐 결혼한 언니는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줄 아는 팔불출이며, 결혼 후 5년이 다 되어가지만 사랑이 식지 않은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해 다른 여자가 남편을 채가지 않을까 항상 불안에 떨며 사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하지만 제삼자가 보기에 인영의 남편은 노심초사, 좌불안석할 정도로 썩 잘난 남자가 아니었다. 대기업에 입사한 지 햇수로 삼 년째인 인영의 남편은 이달에 선임으로 진급했다. 인영의 말에 의하면 승진이 쉽지 않은 회사인 데다가, 서른 넘어서 취직하는 사람이 태반인 요즘에 서른인 남자가 선임 직급을 단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 회사 내에서도 이례적인 인사라고 했단다. 그 회사에 직접 확인할 길이 없는 이상 우영은 그저 언니의 남편 자랑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언젠가는 꼭 확인해 보리라 다짐했다.

그나저나 저 남편바라기가 이 시간에 밥은 안 하고 무슨 일? 월패드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슬쩍 시계를 쳐다보니 여섯 시였다. 이 와중에도 인영은 초인종을 연신 눌러대고 있었다. 저러다 인터폰 버튼이 가루가 되기 전에 얼른 문을 열어야지. 우영은 인상을 구기며 문을 열어주었다.

“너 왜 비밀번호 바꿨어.”

하도 멋대로 이 집에 드나들어 며칠 전에 비밀번호를 바꾸어놓았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우리 집에서 밥 먹을라고?”

이유는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예솔이 이모한테 인사해야지.”

“그러는 언니 네가 먼저 인사 좀 해라. 시댁 식구들한테는 그렇게 깍듯하면서 도대체가…….”

“예솔이가 인사한다.”

인영이 우영의 말을 댕강 자르고 자신의 딸을 가리키며 억지로 인사를 받을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강압에 못 이겨 억지로 시선을 내리니 조카 민예솔이 배꼽 위에 손을 가지런히 얹은 채, 이마가 허벅지에 닿을 만큼 깊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저 꼬맹이가 또 뭘 뜯어내려고 저렇게 얌전을 빼고 있는 것이며, 인영의 저 비장한 표정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영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마감에 지친 뇌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언가 구린 냄새가 나는 이 상황에도 계속 하품이 쏟아져 나왔다. 마감을 맞추느라 나흘 동안 서너 시간 잤을까, 우영은 지금 반드시 잠을 자야만 했다.

“형부랑 데이트하려고? 근데 오늘은 절대 안 돼. 나 마감 조금 전에 겨우 끝내서 넘겼어. 앞으로 스물네 시간 동안 잠만 잘 거니까, 솔이 절대 못 봐줘.”

“안녕하세요, 이모.”

민예솔이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나 졸려 죽겠어, 빨리 가.”

“안녕하세요, 이모!”

“솔이가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이모!”

이 모녀가 사람 잠 못 자서 돌아버리는 꼴을 보려고 작정을 하고 왔나, 우영은 진심으로 짜증이 솟구쳐 눈을 크게 부릅뜨며 억지로 현관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아이가 문 앞으로 몸을 쏙 내밀더니 다시 몸을 굽히며 크게 인사했다.

“이모! 안녕하세요!”

“아우, 귀청이야. 넌 무슨 애가 이렇게 목청이 커. 그래. 이모 안녕해, 아주. 너도 안녕해 보여서 다행이네.”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번거롭게 해서 진심으로 미안한데, 그래도 부탁해. 나 정말 절박해, 지금.”

“나도 절박해. 꿀잠이 절박하고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화할 생각이 없는지 인영은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잠시 월패드 위의 시계를 쳐다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괜히 시계 쳐다보지 말고, 뭔 일인지 빨리 좀 말해줄래, 언니?”

“어차피 나도 비행기 시간 때문에 길게 설명은 못 하고, 며칠 동안 솔이 좀 데리고 있어줘.”

엥? 이게 무슨 귀신이 앞구르기하고 뜀뛰기 하는 소리람?

“비행기? 비이해앵기이?”

갑자기 시야가 핑 돌더니 현기증이 났다.

“석현이 출장 갔잖아. 근데 낌새가 이상해. 아무래도 올 것이 온 것 같아.”

아무래도 올 것이 온 건 그쪽이 아니라 이쪽 같지만, 지금 인영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 보였다. 초연해 보이지만 움켜쥔 주먹이 잔뜩 초조한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언니, 내가 항상 말하지만 형부는 언니밖에 몰라. 바람피울 성격도 아닌 데다가 결정적으로 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우영이 다그치자 인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느릿한 그 고갯짓이 얼마나 처연하고 슬퍼 보이는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이미 이혼서류에 도장까지 찍은 줄 알겠다.

“혹시 뭐 의심 가는 거라도 있어?”

지옥에서 온 사자처럼 인영의 눈이 불타올랐다. 얼굴만 보면 이미 외도를 목격한 사람이다.

“출장 가는데, 같은 부서 여직원들하고 같이 간다는 말을 안 하고 간 거 있지.”

“여직원 한 명, 아니면 여러 명?”

우영은 일단 스스로를 다독였다. 지금 상황이 기가 막히지만, 인영을 다그쳐서 해결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같은 부서 직원 한 명하고 다른 부서 직원 한 명.”

“그럼 형부랑 다른 여직원 두 명?”

순간 있지도 않은 머리 뚜껑이 펑하고 열리는 환상을 보았다.

“미쳤지, 미쳤어. 단단히 미쳤어. 보통 미치지 않고서야.”

우영의 입에서 방언 터지듯 미쳤다는 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