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근 날이다.'새벽 어스름이 찾아와 잠을 깨우는 순간 수경은 그 사실을 떠올렸다. 콩닥거리는 심장 위를 손끝으로 지그시 누르면서 그녀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모래알처럼 많고 많은 날 중에서도 유난히 반짝이는 하루가 있다. 예를 들면 기대하던 소풍이라든지, 고등학교 수학여행이라든지, 그리고 오늘처럼 운 좋게 구한 직장으로 내딛는 첫날과 같은.'“몇 신데?”'기분 좋게 돌아눕는 수경의 등 뒤로 잔뜩 잠긴 목소리가 낮게 물어 왔다. 동생 수민이었다. 침실에 퀸 침대 하나를 놓고 자매는 나란히 잠을 잔다. 수틀리면 차서 밀어내 떨어트리기도 하면서.'“6시 3분.”'다 죽어 가는 신음이 수민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아침잠이 많은 동생은 6시 5분 전이나 10분 전이라고 말해 줄 때 제일 좋아했다. 그건 달콤한 새벽잠을 조금이나마 더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니까. '10분 전에 알맞게 뒤척여 주지 못한 못난 언니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생을 뒤로하고 욕실로 향했다. 치약을 묻힌 칫솔을 재빨리 입 안에 쑤셔 넣고 얼른 변기 위에 걸터앉았다. 눈뜨자마자 오줌부터 누는 일은 이 집안 여자의 숙명이었다.'그러나 미처 오줌 줄기가 끊어지기도 전에, 욕실 문이 벌컥 열리며 다급하게 들어온 수민이 변기 앞에 버티고 섰다. 그 고달픈 숙명에서 역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던 수민은 이미 파자마 바지를 반쯤 내린 상태였다. 다리를 꼬며 재촉하는 동생을 위해서라면 온 힘을 다해 마무리를 끊어 주는 것이 혈육의 어엿한 도리이건만, 수경은 일부러 느릿느릿 휴지를 접고 있었다. '인간은 본디 화장실 올 때 갈 때 맘이 180도 다르다는 교훈을 몸소 보여 주려는 듯, 네모난 휴지 모서리를 반듯이 맞춰 세 등분으로 접었다가 네 등분으로 접었다가 하는 수경을 보고, 있는 대로 열을 받은 수민이 마침내 강제로 그녀를 변기에서 끌어내렸다.'“쌀 뻔했잖아!”'동생이 바락 신경질을 냈지만 수경은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어제 아침 수민은 아까처럼 휴지로 종이학을 접고 있다가 수경한테 칫솔로 얻어맞았다. ''수민이 차려 놓은 밥상 앞에 수경이 마주 앉았다. '부모님과 떨어져 함께 살기 시작한 작년부터 자매는 손가락을 걸고 신성한 약속을 주고받았다. 밥 당번은 일주일씩 번갈아 하기로. 하지만 그러다 보니 심각한 부작용이 생겼다. 당번이 아닌 주간이면, 당번에게 거만하고도 깐깐한 반찬 투정을 하는 것이었다.'그래서 그들은 결국 메뉴를 작성하기로 했다. 한 달간의 아침저녁 식단을 꼼꼼히 정해 두고 그것을 일 년 열두 달 무한 반복하자는, 끝내주는 아이디어였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에는 ‘쌀밥, 감자 된장찌개, 계란 프라이, 오이소박이’라는 난이도 최상급의 미션이 당번에게 떨어졌다. 그 반찬이 어떤 경로를 거쳐 식탁 위로 유입되는가는 결코 따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새벽부터 위생장갑을 끼고 소금에 절인 오이 속에 부추소를 박고 있으면 아주 바람직하겠지만, 능력이 달리면 달리 머리를 써서 엄마손 반찬가게의 전폭적인 협찬을 받아 와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두 사람은 보온밥통에서 47시간 뜨끈하게 숙성시킨 쌀밥에다 출처가 불명확한 반찬을 곁들여 감사히 먹기 시작했다. '“학교 같이 갈래?”'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지금까지, 기간제 교사로 서울 시내 중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구멍이란 구멍은 모조리 땜빵을 자처했던 수경이었다. 작게는 3주짜리 구멍도 있었고 크게는 6개월짜리도 있었다. '3년의 순례와 고행 끝에 마침내 오늘 아침, 자신의 모교인 청산고교의 ‘정규직 국어교사’로 임용되어 금의환향할 예정이다. ‘기간제’란 주홍글씨를 지우고 기어이 쟁취한 ‘정규직’이란 단어가 어찌나 마음에 드는지, 어디서 성이 ‘정’이고 이름이 ‘규직’인 남자가 난데없이 찾아와 결혼하재도 그 이름 하나만으로 와락 끌어안을 수 있을 것 같았다.'“문구점 들러서 참고서 사야 해. 먼저 갈게.”'열 살 차이나는 늦둥이 동생 수민은 아직 고등학교 2학년이고, 바로 수경이 근무할 청산고교에 다니는 중이다. '원래 가족이 같은 학교에 머무르게 되는 경우에는 학년을 서로 피하게 만들지만 이번엔 급하게 발령이 난 터라 사정이 따라 주지 못했다. 다행히 동생 반에 직접 수업을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라 들었다. '“복도에서 이 언니를 만나면 어쩔 건데?”'“뭘 어째? 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도망가거나.”'수경은 가진 위엄을 모조리 끌어모아 싹수가 노란 수민을 노려보았다. 다른 집 동생들은 말도 잘 듣는다던데, 쟨 대체 왜 저럴까 하는 비난이 가득 담긴 눈초리였다. '손수민이란 인간은 언뜻 보기에 착실하고 성적도 전교를 주름잡는 범생이지만, 알고 보면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하나뿐인 언니를 개똥 취급하는 데다, 가끔은 제가 언니인 줄 착각하고 산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수경에게 응당 가져야 할 최소한의 존경심조차도 옥션에 팔아먹은 지 오래였다. 언니가 자기 학교에 국어 선생님으로 온다는 걸 알게 된 날도 수민의 첫마디는 “어쭈?”였다.'……늦둥이라고 너무 오냐오냐 했어. 수경은 뒤늦게 후회하며 이제라도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다. '“인사 깍듯이 잘 해라. 안녕하세요, 손수경 선생님, 하고.”'“이빨에 낀 고춧가루나 빼세요. 손수경 슨생니임.”'당황한 수경이 혀끝으로 앞니를 더듬으며 거울을 찾는 사이, 수민은 날렵하게 식탁을 벗어나 그대로 등교해 버렸다. 괘씸한지고! 늘 이런 식으로 한 박자 늦어서 당한다. 제때 받아쳐서 한 방 제대로 먹여야 하는데, 오늘도 수경은 분한 눈물을 삼켰다.''시내버스 107번에서 내리니 수십 명의 학생들이 교문을 향해 우르르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다들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갑작스런 연민의 파도가 밀려와 수경의 가슴을 철썩 때리고 지나갔다. 불쌍한 것들. 학교 가기 싫겠지. 공부하기 지겹겠지. 내가 왜 그 맘을 몰라. '수경도 10년쯤 전에는 매일 아침 눈뜨는 게 끔찍했고 사는 게 괴로웠다.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새록새록 깨달았다. 그때가 그래도 참 좋았다는 걸. 학교라는 굴레를 벗어나면 이제는 취업이라는 인생의 가시밭길이 짠, 하고 기다린다. 저 아이들이 그걸 깨달으려면 역시나 무정한 10년을 앞세워야 할까. '모퉁이를 돌아서니, 7년 전에 졸업한 뒤로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악마의 언덕길이 다시금 쫙 펼쳐졌다. '청산중학교를 거쳐 청산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장장 6년간 아침마다 지옥을 맛보게 하던 언덕길이었다. 등고선을 이으면 저만치 야산을 둘러 감고도 남을 그 언덕길. 영광스런 졸업식 날, 내 앞으로 이쪽으로는 오줌도 안 누겠다, 맹세했던 치열한 기억이 지난주에 면접하러 왔을 때는 왜 안 떠오른 걸까. '내 눈 내가 찔렀네, 수경은 낮게 구시렁거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땐 ‘정규직’ 군이 발산하는 엄청난 매력과 카리스마에 완전히 매혹되어 언덕길도 내리막인 듯 미친 여자처럼 교문을 향해 내달렸던 것 같다. '그리하여 수경은, 해발고도 53미터, 경사 43도의 가파른 언덕길을 또다시 눈물로 올랐다. 예수님이 수난당한 골고다 언덕이 이보다 험난했을까. 그래도 예전엔 삭막하기만 하던 이 길에 지금은 울창한 메타세쿼이아가 촘촘히 심겨 풍경은 훨씬 나은 게 한 가지 위안이었다.'<사립학원 청산고등학교> '현판에 청동으로 새겨진 글자는 예나 지금이나 뜬금없이 거창했다. 교문 안을 한참이나 기웃거리다 수경은 심호흡을 하고 들어섰다.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를 정복한 카이사르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하나, 둘, 셋. ''교장 선생님께 인사를 드린 뒤 교감을 따라 교무실로 내려왔다. '교감 선생님은 수경의 학창시절 깐깐하던 수학 선생님이셨는데, 얼굴에 점이 많아서 별명이 ‘점과 좌표’였다. 지금은 어엿한 교감 선생님이 되어 계신 걸 보니, 그동안 정치를 좀 하셨나 보다. '교감 선생님이 손가락을 죽 펴서 창가 옆자리를 가리켰다. '“손 선생 자리는 저기 맨 왼쪽에서 두 번째예요. 이나비 선생 옆이네. 이 선생!”'교감이 입가에 손나팔을 대고 부르자 거기 있던 여선생이 고개를 돌렸다.'“여기는 새로 오신 국어과 손수경 선생. 이나비 선생도 국어과예요. 서로 인사하지?”'교감이 가리키는 대로 여선생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선생은 이름 그대로 나비처럼 고운 사람이었다. 하얀 얼굴에 단아한 이목구비를 가진 빼어난 미인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맑게 웃는 모습은 같은 여자인 수경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예뻤다.'“처음 뵙겠습니다. 손수경입니다.”'“네. 만나서 반가워요. 잘 지냈으면 좋겠네요.”'나비가 활짝 웃으며 답례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담긴 상냥함이 느껴지자, 수경의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딱히 동성애에 뜻을 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는 건 즐겁고 들뜨는 일이다. '교감이 사라진 뒤, 수경은 자기 의자에 슬쩍 앉아 봤다. 햇볕이 잘 들어 따스할뿐더러, 창밖을 통해 교정이 훤히 보이는 좋은 자리였다. 맘에 들었다. '오른쪽이 이나비 선생이라면 왼쪽은 어떤 사람일까. '책상 위에 얹힌 여러 가지 수학교재들로 보아, 수학교사이겠구나 생각하는데 이 선생이 등을 살짝 건드렸다.'“커피 괜찮아요?”'“네.”'그러잖아도 커피 한 잔이 간절했기에 빙그레 웃었다. '“감사합니다.”'“손 선생님은 몇 살이에요?”'“스물여덟이요.”'“나보다 두 살 어리네. 말 놔도 되겠지?”'“그럼요. 편하게 대하세요.”'수경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향긋한 커피 냄새에 긴장한 몸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나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아직 결혼 안 했지?”'“네.”'“그래, 그런 것 같더라. 고운 처녀티가 나는 게.”'“감사합니다. 이나비 선생님도 아직 싱글이시죠?”'헷갈릴 때는 무조건 싱글이냐고 물어야 한다. 그건 장군감이라 불려 마땅한 튼실한 아기를 두고도 일단은 ‘딸이죠?’ 하고 살짝 간을 보는 것과 비슷한 예의다. 만의 하나 딸인데, ‘아이구, 그놈 참 떡두꺼비같이 생겼네. 아들 맞죠?’ 해 버리면 그 뒷감당은 대략 수습이 어려우며 이후론 실의에 빠진 아이 엄마를 피해 다닐 각오를 다져야 한다. '수경이 당연한 듯 눈을 깜빡이며 기다리니 나비가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아냐, 결혼했어. 나 아줌마야.”'대박 났다. 이것이 성공적인 사회생활의 표본이다. 이제 딱 한 발짝만 더 전진한다면.'“어머, 세상에! 정말 그렇게 안 보여요…….”'“오호호호! 말이라도 고마워.”'그렇게 수경이 포인트를 착실히 쌓고 있는데, 웃던 나비가 잔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자리 주인 오네. 성 샘 인사해, 새로 오신 국어과 손수경 선생.”'수경도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 몸을 돌렸다. 그러나 소리도 없이 금세 다가와 눈앞에 선 커다란 남자를 대하는 순간 위압감에 어깨가 저도 모르게 살짝 움츠러들었다.'마주 선 남자는 모든 것이 컸다. 키도 훤칠했고 어깨가 떡 벌어졌으며 다리도 길쭉길쭉했다. 여자치곤 큰 키라, 스스로 작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는데, 묘하게도 이 남자 앞에서는 자기가 아담하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수경이 묘한 두근거림을 감추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 남자가 갑자기 악수를 청했다.'“안녕하세요. 수학과 성도현입니다.”'조금 차갑고 깔끔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이 참 보기가 좋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수경은 얼른 시선을 피해 버렸다. 젊은 남자들과의 첫 대면은 대개 무척 어색했다. 그 사람이 매력적일수록 더욱 움츠리게 되는 본능적인 열등감이라니. 그나저나 저 손을 잡아야 하나. 초면에 악수는 부담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초면이니까 악수하자고 덤비는 거겠지만.'“네, 안녕하세요. 손수경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바짝 긴장해서 커다란 손아귀에 자신의 손을 갖다 붙이자, 그가 살짝 감싸 쥐고 천천히 흔들었다. 남자의 손은 무척 따뜻하고 강하다는 느낌을 주어서 꼭 싫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손을 쥔 채로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손수경, 손수경이라…… 혹시 우리 학교 출신 아닙니까? 낯이 익은데.”'일단 잡힌 손부터 빼는 데 최선을 다하면서 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 청산중, 고등 나왔어요. 하지만 저는 잘…….”'수경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강인한 인상이었지만 고른 이목구비가 매끈하게 깎아 놓은 뽀얀 알밤처럼 단정하고 준수했다. 산맥처럼 짙은 눈썹 아래 박힌 검은 두 개의 눈동자에는 부드러운 빛이 감돌고 있었고 쭉 뻗은 콧날과 단단한 턱이 섬세한 얼굴에 남성미를 그려 주었다. '학창시절에 이런 사람이 있었던가, 아무리 10여 년 전 기억을 떠올려 보려 노력해도 하얗게 변해 버린 머릿속은 빙빙 돌기만 했다. 게다가 아까부터 남자가 자신을 너무 빤히 쳐다봤기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려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아무런 말이 없자 남자가 조금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54회 맞지요?”'“네. 선생님은……요?”'“53회. 나 모르겠습니까?”'53회라면 한 살 위다. 한 살 위, 바로 위 학년이라면…… 젠장, 안 좋은 기억만 떠오른다. 문득 스쳐 가는 불쾌하고 서글픈 장면 때문에 수경의 이마가 저절로 찡그려졌다. 그때 교감 선생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손수경 선생?”'“네.”'“좀 있다 교무회의 할 거니까 그때 정식으로 인사하기로 하지. 이쪽으로 잠깐 오세요.”'돌아서 교감 선생님을 따라 걷는 동안, 어쩐지 등허리가 따가웠다. 뒤에서 남자가 계속 쳐다보고 있을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생각이 안 나는데, 누굴까?''“손수경입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전 교직원들이 다 모인 교무회의는 근엄하기 짝이 없었다. 함께 발령 난 선생들과 함께 인사를 드리는데 다리가 덜덜 떨렸다. 학교의 역사가 오래고, 규모도 크다 보니 교직원 수도 백 명을 가볍게 넘었다. 해외 연수 나간 몇몇 선생을 제외하고 모두 참석한 자리라 들었다. '“자, 새로 오신 선생님들께 격려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교무부장님의 축사에 따라 일제히 시작되는 박수소리를 들으며 수경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사립 고등학교라, 웬만해선 인사이동이 드물다. 지금 여기 있는 교직원들과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평생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손아귀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교무회의에서 인사를 마친 뒤 학년부장 선생님을 만났다. 초임 교사에게 담임을 맡기는 경우는 드물어, 수경은 2학년 5반의 부담임을 맡으라고 하셨다. 잠시 후엔 5반의 담임이자 임신으로 배가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박지현 선생이 학교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식사는 따로 교사 식당이 없이 그냥 학생들 급식과 같은 메뉴야. 하지만 우리 학교는 음식이 잘 나오는 편이니까 크게 걱정할 건 없어. 혹시 입에 영 안 맞으면 외식을 해도 되고.”'“음식 안 가리는 편이라 괜찮을 거예요.”'수경은 선선히 대답했다. 무엇을 먹어도 자매표 저질 회전 식단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것보다 지현의 부른 배가 자꾸 눈에 밟혔다.'“저기, 애기 가져서 담임까지 하시려면 힘들지 않으세요?”'“그렇지, 뭐. 지금은 안정이 되어서 좀 괜찮은데, 초기에는 굉장히 힘들었어. 2학기 들어서 출산휴가 받을 때까진 어떻게든 버텨야지.”'푸석푸석한 웃음을 가까스로 짓는 지현이었지만 눈가에 낀 기미나 짙은 피로감은 숨길 수 없었다. 하필 5반은 남자 반이었고, 그건 교생 실습 때의 경험으로 파악하건대 여자 반보다 두 배는 힘들다는 소리였다. 수경이 대놓고 착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여자로서 딱하다는 동정심이 들었다.'“제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그럴게. 말이라도 고마워. 아, 4교시 종 쳤네. 난 수업 들어가야겠다.”'“아, 저도.”'지현이 수업 교재를 챙기러 가자 수경도 책을 들고 교무실을 나섰다. 앞으로 일상이 될 순간순간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면서.